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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음란물

베드로전 이관희 목사............... 조회 수 3319 추천 수 0 2012.05.04 17:05:29
.........
성경본문 : 밷전4:1-7 
설교자 : 이관희 목사 
참고 :  

교회와 음란물

본문 베드로 전서 4:1-7 -

 

제가 미국 캘리포니아 S시의 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당시 우리 교회의 소위 수(首)집사라는 사람이 비디오 가게를 새로 연 일이 있습니다. 교인이 새로 영업을 시작하면 방문하여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회가 하는 일의 하나였으므로 방문을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디오 가게 한 켠에 온통 울긋불긋한 음란 비디오가 전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곧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비디오 물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무렵이었으므로 비디오 가게 영업에 음란물은 빠질 수 없는 주력 상품이었습니다. 그것을 치우라고 하는 것은 곧장 비디오 가게 문을 닫으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비디오 가게 문을 닫으라, 마라 보다 그런 말을 입밖에 냈을 경우 당장에 당사자의 반응이 불을 보듯 뻔할 것이라는 것이 우선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장로가 없는 개척교회에서 수 집사 라고 지목되는 사람의 위치는 교회의 중심 기둥입니다. 중심 기둥이 기우뚱하고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한두 주일 고민만 하고 있을 때, 하루는 B집사라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좀 뵙자는 것이었습니다.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대뜸 목사님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하실 거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까닭은 다른 것 다 빼 놓고 강직하시다는 점 하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실생활에서도 설교대로 강직하시게 실천하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결국 나는 그 문제를 입 밖에 내었고, 교회는 예상하였던 대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수집사는 즉각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주일 그렇게 혼란 속에서 교회가 기우뚱거렸습니다.

그런 어느 날, 하루는 연세 많으신 권사님 한 분이 나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나무라시는 것이었습니다.

'성(性)생활을 누구나 다하고 산다. 목사님은 성생활 안 하느냐? 색스 비디오가 뭐 어떻다고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이렇게 나무라시는 권사님 앞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내 나이가 40 중반쯤이었으므로 그 권사님에게는 아마 아들 뻘쯤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나는 사표를 냈고, 그것으로 나의 5년 동안의 강단목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목사가 되어 교회 담임목사를 한 마지막이었습니다.그 후 강단 목회로 돌아갈 기회가 한번 더 있었으나, 그때도 교포 사회의 민감한 문제에 관해서 바른말을 했다가 이번에도 교인 중에 그 문제와 관련된 사람이 있어서 또다시 쫓겨나다시피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내가 글 쓰는 일로나마 목사 노릇을 대신 하려고 미국 이민간 이래 손에서 놓았던 문학의 붓을 다시 잡게 되었을 때 번쩍하고 그때 일과 관련된 매우 충격적인(?) 생각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은 그때뿐만이 아니고 그 후 근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충격이 되고 있습니다.오늘 저는 그 충격적인 생각에 관련된 말씀을 드리려고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적인 생각이란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 책상 앞에 앉자 '일반 교회 담임 목사님들은 강대상에서 음란물에 관한 문제는 전혀 다루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었습니다.나는 주일학교 시절부터 들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들은 목사님들의 설교 가운데서 예를 들어 다윗왕의 불륜 현장을 묘사하는 설교를 들어본 일이 있는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다윗 왕 뿐만이 아니라 그 외 어떠한 음란 행위에 대해서도 성경말씀만큼이라도 말하는 설교를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나는 그것이 왜 그럴까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까닭은 내가 왜 그럴까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이 시대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게 그 이유를 증언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그 이유란 현대 교회가 너무나도 '인습적인 거룩증'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음란에 관한 일을 말하는 일은 설교하는 목사도 거북한 일이고, 듣는 교인들도 거북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예를 들면, 다윗의 범죄에 관한 말을 해야 할 경우, '다윗이 어느 날 저녁 무렵 왕궁 옥상에서 여염집 젊은 아낙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고 있는 현장은 그 얼마나 야한 장면이냐, 황홀한 저녁 놀빛에 물든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 그것은 현대의 어떤 야한 영화 장면에 못지 않은 음란한 장면이었다'라는 식의 묘사는 전혀 못합니다.
 

다시 한번 방금 말씀 드린 것을 다시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황홀한 저녁 놀빛에 물든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 그것은 현대의 어떤 야한 영화 장면에 못지 않은 음란한 장면이었다.'여러분은 목사님이 강대상 위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는 사람이 다윗 왕과 같은 그런 장면에 부딪쳤을 때 인간 내면 속에 숨어 있던 관음증이라는 죄성이 어떻게 무서운 얼굴로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게 되느냐라는 문제에 관해서 는 설교를 못합니다. 나는 그동안 다닌 수많은 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그 결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슴 깊은 곳에 지니고 있는 이 뿌리 깊은 관음증의 무서운 파괴력에 관해서는 아무 경고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세상의 음란물 문제는 교회가 당장에 눈알을 부라리고 나서서 현실적인 참견을 해야 할 정도로 크게 범람하지는 않았습니다.그러나 1980년대 중반 무렵 비디오 기계가 가정용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란물은 마치 홍수를 버티고 있던 둑이라도 터진 듯 일시에 온 지구촌을 강타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든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급박한 현실이 되었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목사가 그런 문제를 교인들 앞에서 말하는 일은 너무나도 거룩하지 못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런 거룩하지 못한(?) 설교 때문에 담임 목사 직에서 물러나고 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도 그만 입을 다물고 말 것인가? 이제는 글 쓰는 일로밖에 전도의 일을 더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글 쓰는 일에서마저 배척받게 되면 나는 어쩌나? 목사 노릇 접어버리고 말 것인가? 아니면 입 다물고 이제부터는 얌전한 글만 쓸 것인가?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나는 그런 고민에 오래 빠져 있을 만큼 한가롭지가 못했습니다. 내가 그런 고민에 한가롭게 빠져 있기도 전에 발등에 떨어진 불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벌써 음란물 문제를 내 글에다 마구 써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글 쓰는 일에서는 강대상에서 음란물 문제를 다룰 때와는 달리 아무 문제도 없었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내가 교회에서 음란물 문제를 말하였을 때는 교회 내의 문제로 교인들 몇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세상을 향해서 음란물 문제를 말하자 이번에는 미지의 안 믿는 독자들로부터 불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나의 음란물 문제를 다룬 글을 읽어 본 어느 독자가 최근에 내 웹사이트에 남기고 간 글입니다.

우연히 무언가를 검색하다가 보이는 글들이 영 이상해서 한번 들어와 봤습니다.
와― 정말 기가 막히군요.
예수님 왜 믿으십니까?
창녀라는 말을 그리 함부로 쓰시나요.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옵니다.
………
제발 기독교도라 말하지 마십시요.
………
여성이시며 동시에 남성이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 같은 꼴 보수 기독교 인사가 있다는 게 정말 치가 떨리는군요….

'창녀'라는 말은 아무리 되풀이해서 말을 한다 해도 창녀 그 자체보다 더 윤락 적이지는 않습니다. 또 '음란물'이라는 말도 아무리 강조해서 말을 한다 해도 음란물 그 자체보다 더 타락적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다시 말하면 창녀라는 말은 아무리 반복해서 말한다 해도 창녀짓 그 자체보다 더 부도덕할 수 없고, 음란물이라는 말도 아무리 힘을 주어 말한다 해도 음란물 그 자체보다 더 음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예를 든 어느 독자는 나의 글에서 '창녀'라는 단어를 읽고 마치 '창녀짓'이라도 본 듯 불쾌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에 저에게 불평을 한 그 사람이 시중 아무 책방에나 가서 문학잡지나 한 권을 사다가 소설을 읽는 중에 '창녀'라든지 그 외 어떤 음란한 행위를 묘사하는 글을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그때도 나에게 보인 불평처럼 불쾌한 느낌을 가지고 작가를 향해 '소설 왜 쓰세요? 제발 작가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불평하였겠습니까?
 

나는 당연히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사람은 영화 '거짓말' 같은 벌거벗고 난잡한 변태 성교를 하고 있는 영화를 보고서도 단 한마디도 감독이나 배우를 향해서 '영화 왜 만드세요? 제발 감독이라고도 영화 배우라고도 하지 마세요'라는 불평을 토한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란 그런 것이다'라는 것이 현대인의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은 나에게는 앞서 소개해 드린 것과 같이 '와 굉장하네요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옵니다'라고 까무라칠 듯 놀라고 불평을 하는 것이겠습니까?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목사란 창녀라는 말을 입에 담지 조차 않을 정도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은 목사가 창녀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거룩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목사가 창녀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거룩입니까?
  과연 목사가 음란 채팅 문제를 말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거룩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어디서 가지게 된 것입니까? 현대 교회를 통해서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왜냐하면 현대 교회는 창녀라든지, 음란물이라든지, 관음증이라든지, 음란 영화라든지, 음란 웹사이트라든지, 원조 교제라든지, O양의 비디오라든지, B양의 비디오라든지, 영화 배우 아무개 양이 발가벗었다는 얘기라든지, 또 그 뒤를 백 미터 빨리 달리기 경쟁이라도 하듯 S양도 다투어 발가벗고, K양도 다투어 발가벗고, L양도 H양도 다투어 발가벗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으니까 이 사람은 그런 것이 기독교의 거룩인 줄로 알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 그런 것입니까? 당장에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나의 이 설교 같지 않은 설교를 듣고 계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 입에서 다윗 왕이 왕궁 옥상에서 저녁놀 빛에 물든 벌거벗은 여인의 황홀한 나신을 훔쳐보는 장면은 현대의 어떤 야한 영화 장면에 못지 않은 야한 장면이었다는 말이 나오고, 음란 웹사이트 말이 나오고, O양의 비디오 얘기가 나오고, B양의 비디오 얘기가 나오고, 원조 교제, 빨가벗는 여배우들 얘기가 나왔을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기독교는 과연 창녀라는 말을 함부로(공개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일로 되어 있습니까?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녀 혹은 창기라는 말씀부터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신명기 23장 17절에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즉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곧 남창)의 소득은 아무 서원 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또 16절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 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잠언서 29장 3절에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하느니라."

다음은 음란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급기 34장 15절 말씀에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신명기 31장 16절 말씀에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사사기 2장 17절 말씀에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에스겔서 23장 27절에,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급 땅에서부터 음행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호세아서 2장 2절 이하에 "너희 어미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에레미야 3장 2절 말씀에,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음행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행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로마서 13장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베드로전서 4장 3절 말씀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열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것으로 부족합니까? 교회가 음란물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이것으로 부족하냐 말입니다. 교회가 음란물 문제를 말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상에 예를 든 말씀들로 만으로는 부족하냐 이 말씀입니다.
 

방금 전에 끝으로 소개해 드린 말씀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음란물 문제를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입니까?
 

왜 목사가 음란물에 대해서 말하면 거룩하지 않고 신령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까?
왜 성경은 이상에 예를 든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음란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데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교회는 음란 웹사이트 문제와, 음란 비디오 문제와, 음란 나체 사진집 문제와, 음란 화상 채팅 문제와, 음란 비디오방 문제와, 음란 노래방 문제와, 원조 교제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거룩해졌기 때문이 아닙니까?목사의 입이 하나님의 입보다 더 거룩해졌기 때문이 아니냐 말입니다.

목사란 그 선생이 하던 일을 이어 받아서 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목사들은 위에 예를 든 것처럼 무수히 음란과 음행에 관한 문제를 말하였습니다.그런데 왜 현대 교회 목사들은 화상 채팅의 실상이 얼마나 목불인견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 말입니다.
 

예수는 교인들 등이나 두드려 주고 헌금이나 따먹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예수는 청와대 조찬 기도회에 가서 독재자들을 위해 축복기도나 해주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세례 요한은 독재자들을 위한 축복기도 대신 그 죄악을 정면에서 꾸짖었다가 목이 달아났고, 예수도 당시의 목사들 격이었던 사람들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여"라고 하였다가 화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이 기독교 목사가 할 일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목사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지 않은 자들이 거룩한 체한다는, 이것이 현대 교회 제일의 문제입니다.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선생)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신약성경 마태복음 23장 1절 이하)

어쩌면 현대 교회 목사들의 모습을 이렇게도 그림처럼 기가 막히게, 아니 동영상처럼 실감나게 그려 보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현대 교회가 교회란 이런 것이다, 목사란 이런 것이다라는 세속적인 스테레오 타이프의 오랏줄에서 벗어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먼저 신사복부터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언제부터 넥타이에 신사복이 교회의 예복이 되었습니까?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습니까?교회는 반드시 넥타이를 매고 신사복을 입고 나와야 된다고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주님께서 목사들은 신사복을 입고도 그 위에 반드시 검은 가운을 입고 강대상에 서야 된다고 명령하셨습니까?

아닙니다.기독교의 예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흰옷 입은 백성들입니다.여러분은 다 그 흰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기독교의 목사란 본래 목수였고, 어부였고,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노동복을 입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다만 찢어진 곳은 기우고 냄새나는 것은 빨아서 단정하게만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옷(제복)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누구든지 어떤 기독교 서점에든 가서 교회사 책 한 권만 사다가 읽어보시면, 교회가 타락한 것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거룩한 모양의 옷을 입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세상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친 예수처럼은 못하더라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친 세례 요한의 일면이라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음란물도 없었고, '젖소부인'류의 음란 비디오도 없었고, 영화 '거짓말' 같은 빨가벗는 영화도 없었고, 음란 화상 채팅도 없었고, 음란 PC방도 없었고, 몰래 카메라도 없었고, 원조 교제도 없었고, 빨가벗고 사진 찍어서 팔아먹는 처녀 여배우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음란 문제를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왜 음란물 문제를 말해야 됩니까? 음란죄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음란 죄를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창녀가 번 돈이나 남창이 번 돈은 제물로도 가져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왜 하나님이 이토록 음란 죄를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음란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호세아서 4장 12절)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범죄한 인간의 죄악을 남편을 떠나 음행한 간부의 죄와 같이 여기시기 때문에 음란 죄를 무엇보다도 가증히 여기시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하나님만 그렇습니까?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하하대고 웃기만 합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껄껄대고 웃고 맙니까?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TV방송극인 '앞집 여자'들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도 바람을 피우면서도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죽어도 못 보고, 자기 자신도 아내의 코앞에서 딴 여자와 놀아나면서도 아내의 바람은 죽어도 못 보는 것이 '앞집 여자'라는 방속극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여러분은 괜찮습니까?음란 죄를 못 본 척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까?예수가 음란 죄를 못 본 척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더란 말입니까?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집 여자'들보다 더 무섭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음란 죄라면 이를 가시는 분이십니다.하나님이 어찌나 음란 죄를 미워하시는지 음란 죄에 대하여서라면 마치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없으시다는 듯 당장에 그 당대에서 벌을 내리시기도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 좋은 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닌 음란 죄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지구촌은 심판의 날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불법이 성하리라던 예언의 말씀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듯 실감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민족과 민족이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제는 새로운 소식도 아닙니다.바다에서는 해마다 그 수를 다 셀 수 없는 물고기들이 떼로 죽고, 마실 물은 점점 더 쓰게 되어 코앞에 닥친 지구촌의 물 재앙을 너도나도 이구동성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각종 생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수천 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종잡을 수 없는 기상 이변 소식은 금년에만도(2003) 연중 신문 지면을 톱으로 장식하였고, 유럽을 덮친 지난 여름의 이상 폭서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서 수많은 목숨들을 앗아갔습니다.그런 중에 지구촌이 2천년대에 들어서자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무서운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9·11 테러와 미국의 돌변입니다. 때마침 대통령이 된 부시는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대통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9·11 테러는 지금 미국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옛날의 부드러운 미국이 아닙니다.지난 20세기 내내 지구촌을 지배한다는 말을 들어온 미국이었지만 그러나 그나마도 얼마나 부드러운 미국이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만큼만 부드러운 미국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변화가 미국만의 변화일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의 변화는 미국만의 변화가 아닌 지구촌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지구촌은 더 이상 9·11 이전의 그 지구촌이 아닙니다. 앞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 되든 미국은 물론 온 지구촌은 결코 9·11 이전의 그나마 부드러웠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테러의 원인은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 없이 점점 더 원자폭탄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팽배해져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촌은 9·11 이후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낯선 시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여러분은 9·11 테러가 낯선 모양이었습니까? 어디서 많이 듣고 또 그 비슷한 모양을 실제로 보기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성경책과 영화를 통해서 말입니다.기독교인들은 9·11 테러보다 더 무서운 종말의 재앙들을 2천년 동안이나 날마다 성경책에서 읽어 왔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불법의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될 종말의 재앙들은 9·11 테러 정도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의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무서운 재앙들입니다.기독교인들에게 9·11 테러는 그 같은 무서운 성경적 종말의 예고편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겠으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나는 성경 예언서 해석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것이 2천년 전에 쓰여진 글이 아니라, 마치 현대의 어느 작가가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 쓴 '논픽션'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너무나도 현장감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생생한 성경의 종말의 예언 가운데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일어난 일도 아닌, 가장 이름 없고 힘 없는 한 개개인에게 당장에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떨어진 재앙이 하나 있습니다.그것이 다름아닌 저 1980년대 초반부터 지구촌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비디오 기계를 신호탄으로 돌격해 들어온 음란물의 홍수입니다.
 

그러나 비디오 기계는 음란물 공격의 선발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디오 기계 뒤를 바짝 뒤쫓아 90년대 초반부터 갑작스럽게 일반화된 인터넷은 하루 아침에 지구촌을 음란물의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테러는 그래도 지구촌 전체가 일어나서 막고 있고, 살인과 도둑은 기왕에 오래 전부터 각 나라 정부가 막아온 일이었지만 음란물의 홍수는 각 나라 정부조차 손을 놓고 바라만 보고만 있습니다! 아니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바라만 보고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화 거짓말은 음란물이 아니다'라고 음란물의 손을 적극 들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정부가 하는 일입니다.
 

대통령들과 국회의원들과 장관들이 빨가벗는 여성들을 향해서 감히 눈조차도 흘기지 못하는 까닭은 당장에 선거 투표소에서 후두둑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세상은 자신들의 사리 사욕을 채우느라고 음란물이 홍수를 이루든 말든, 국민들이 음란물의 독에 빠져 자나깨나 색스, 색스, 색스만 생각하는 성도착증 환자들이 되든 말든, 자기 표 단속을 위해서 굳건히 침묵을 지킨다고 하지만, 교회는 왜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까?교인들이 떠나갈까 봐서 그러는 것입니까?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않는 것은 돼지코에 금고리와 같다"고 꾸짖고 계십니다.(구약성경 잠언 11장 22절)
 

이는 곧 음란은 여성들이 얼마나 치마끈을 단단히 붙들어 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 세대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우리들 눈앞에 실물로 펼쳐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여러분, 저 홀라당 홀라당 옷을 벗고 있는 여자들이 인권 탄압 때문에 할 수 없이 벗기 싫은 옷을 죽지 못해 벗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여성 해방'으로 얻은 자유를 가지고 저렇게 홀라당 홀라당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여성 해방 운동이 옷 벗기 위한 목적에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국회의원 자리 욕심내기 전에, 장관 자리 욕심내기 전에, 대학 교수 자리 욕심내기 전에 같은 여자들 빨가벗은 몸뚱이 가리는 운동부터 앞장서십시오.
 

여자들이 빨가벗은 몸뚱이부터 가리지 않는 한 설사 여성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참된 여성 해방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남성들이 여자만 봤다 하면 그 짓 할 생각부터 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참된 여성 해방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견물생심은 땅이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이 세상 죄성의 법칙이 될 것입니다.

음란 죄는 성경이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죄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데, 두고두고 그 총체적인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가장 원죄의 형태에 가까운 죄악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을 배반한 죄악은 남편을 배반하고 간부의 품에 안기는 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도 인간의 죄악의 실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음란 죄 이상 더 가까운 예를 들어 설명하실 것이 없었다면 현대 교회는 얼마나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고, 얼마나 더 하나님보다 문학적이기에 음란 죄를 말하지 않고도 인간의 죄악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설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

 

글 : 이 관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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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순댕

2012.05.07 18:06:37

세상의 난잡함이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합니다. 교계는 음란의 문제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사랑스런 자녀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고 있는데 더럽기 짝이 없는 영상물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어른들도 인터넷사이트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데 우리 순수한청소년들은 병들어갑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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