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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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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87577 |
정용섭 목사
보는 믿음, 듣는 믿음
요한복음 20:19-29, 부활절 둘째 주일, 2012년 4월15일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은 부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헛것이고, 기독교인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14)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거나 복을 얻거나 사회봉사를 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주변적인 것들입니다. 부활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이렇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데도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예상 외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대기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산만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부활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상할 수 있지만 부활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부활의 실체를 다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단 한번 일어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이 그것을 두서없이 묘사했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경험을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 20:19-29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두 대목입니다. 첫 대목은 요 20:19-23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 뒤에 제자들은 어느 집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가장 모욕적인 죽음, 아무에게도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을 다 닫아걸고 숨을 죽인 채 숨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 후 첫날 저녁이었습니다. 오늘로 따지만 주일 저녁입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 당시에 못을 박은 자리가 손이고, 창에 찔린 자리가 옆구리입니다. 이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죽은 시체로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상상이 갑니다. 유령이라고 소리를 쳤을까요? 아니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와락 끌어안으려고 했을까요? 복음서 기자는 제자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만 말합니다. 이런 표현이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더 정확하게 경험하고 인식한 뒤에 나온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22절과 사도들의 사죄 권한을 서술한 23절의 말씀을 보면 부활의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는 표현이 후대의 기록이라는 게 더 분명해집니다. 죽은 사람을 며칠 만에 다시 만나는 건 놀라운 일이지 기쁜 일은 아니니까요. 둘째 대목은 24-29절입니다. 도마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그 사실을믿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여드레가 지난 다음 도마를 포함해서 제자들이 다시 모였을 때 부활의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주시고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도마는 부활의 주님의 몸에 실제로 손을 댔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경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 요한복음이 첫 대목에서도 그랬고 둘째 대목에서도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부활의 주님이 바로 역사적 예수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벌어졌던 영지주의와의 논쟁과 연관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가현(假現)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정통 기독교는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역사적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바로 부활한 그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도마의 신앙 도마는 자기가 직접 확인해야만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설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런 주장은 도마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기원 후 90-100년 어간에는 예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원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부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부활 경험자들의 목록에 따르면 5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는 교회에서 부활 신앙이 흔들리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죽었습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이제 아무도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은 그 이전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바울은 고전 15:12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던 시절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 경험자들이 다 죽은 다음에는 그런 주장이 더 강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사건으로부터 2천년이 지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게 가능할까요? 각자 다를 겁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믿기 힘듭니다. 믿지 않아도 신앙생활 하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믿는다고 큰소리를 쳐도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게 삶으로 다 드러납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실제로 믿는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겠지요. 교회가 얼마나 세속적인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정치권처럼 이전투구도 서슴지 않습니다.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모두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모두 건강하고, 모두 엘리트가 되고, 타종교를 멸시하고, 성적 소수자를 무시하고, 교회 이기주의에 매몰됩니다. 물론 현실 교회는 경우에 따라서 잘못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런 것들이 정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 부활 신앙은 허울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한 게 아닐는지요. 부활을 믿기 힘든 이유는, 그리고 겉으로는 믿는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세상을 실증적으로만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봐야만 확실한 것으로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의 세계관에 우리가 완전히 길들여졌습니다. 거기에만 시각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정된 시각으로는 그것 너머의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확실한 것(reality)으로 여기고 살아갑니까? 여러분들의 삶이 실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권력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총선이 있었습니다. 4년 반 전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었습니다. 이런 선거 결과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무엇인가요? 잘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돈은 모든 가치를 재단하는 절대적 기준입니다. 좀 못살아도, 또는 경제발전이 늦어도 정의로운 세상이 되도록 합시다, 하고 주장하는 후보나 정당은 선택받지 못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 진보신당은 최소한의 득표도 못해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기독교인들도 대개는 이런 관점으로 투표를 했겠지요. 보이는 것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부활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아니면 자기 최면에 빠진 겁니다. 듣는 신앙 예수님이 도마에게 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기는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무조건 어리석은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만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이번 총선에서 민통당 비례대표 1번은 전순옥 박사입니다. 영국에서 노동 문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그분의 오빠가 고 전태일 씨입니다. 전태일 씨를 여러분은 못 보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전태일과 연관된 일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전태일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조영래 씨도 전태일 씨가 살아있을 때는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가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만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듣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듣고 믿는 게 보고 믿는 것보다 훨씬 정확합니다. 이런 설명이 여전히 이상한가요? 일상에서는 듣는 것이 위험하기도 합니다. 티브이 광고에 속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에서는 듣는 것이 최선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개인이 직접 확인한다는 뜻이라면, 듣는다는 것은 역사적 전통에 기대 있다는 뜻입니다. 유럽의 각성운동, 청교도운동, 그리고 미국의 부흥운동은 전반적으로 직접적인 경험에 무게를 둡니다. 성령체험도 강조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도 대부분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개인을 강조하고, 지금 여기서의 실존적 경험을 강조합니다. 이게 보는 신앙입니다. 무언가 변화가 당장 일어나는 것을 확인합니다. 듣는 신앙은 교회 역사에 무게를 둡니다. 그 역사에 성경이 있고, 신조가 있고, 신학논쟁이 있습니다. 전자는 개인영성이고, 후자는 공동체영성입니다. 전자는 실존적 영성이라면 후자는 역사적 영성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말은 교회 역사가 전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두 가지 신앙이 충돌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보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보고라도 믿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예수님도 도마에게 손을 넣어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신앙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무언가 구체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는 것에 신경을 너무 쓰지 마십시오. 확증을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거꾸로, 들으려고 하십시오.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도록 하십시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무엇을 우리에게 전승해주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십시오. 부활의 주님은 이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즉 말씀과 교회 전통을 통해서 우리와 만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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