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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자녀의 비밀

요한일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86 추천 수 0 2012.05.05 23: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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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일3:1-6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88472 

jys.jpg 정용섭 목사

 

하나님 자녀의 비밀

요한일서 3:1-6,

부활절 셋째 주일, 2012년 4월22일


기독교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 요일 3:1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2절에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테크나 데우’이고, 영어로 ‘췰드런 오브 갓’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식들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에게 자식이 있을 수 있나요? 헬라 신화의 신들은 사람과 똑같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지금 여러분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시나요?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에 영향을 끼친 주변의 사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사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민사상입니다. 온 세상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유대민족만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구약에 흔하게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약속을 맺으셨고, 모세를 찾아와서 출애굽 사명을 맡기시고 또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뛰어나거나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주시고 후손을 많게 해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이 크게 흔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파멸과 포로생활이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이런 주장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백성이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그노시시즘)는 지식이라는 뜻의 헬라어 그노시스에서 왔습니다.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비한 지식입니다. 그런 신비한 지식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선과 악의 대립입니다. 영과 육이 대립합니다. 거룩한 영과 악한 영이 대립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대립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이고, 마귀의 자녀는 어둠의 자녀입니다. 이런 사실이 그냥 깨달아지지는 않습니다. 빛에 속한 사람들만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영지주의의 이런 입장은 초기 기독교의 입장과 별로 다른 게 없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빛의 자녀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마귀의 자녀들과 대립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어둠의 세계와 대립하는 빛의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까지만 비슷합니다. 원래 이단은 전부 다른 게 아니라 끝만 다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구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이미, 아직 아닌

    

영지주의는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미 빛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신성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이제 그 사실을 뚫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이 아무리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자신들이 죄를 짓고 실수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악의 지배를 받습니다. 인간은 선에 속했으면서도 악을 행한다는 딜레마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빛에 속했다는 사실과 어둠에 속했다는 사실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 딜레마를 해결합니다. 자신들이 악의 지배를 받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겁니다. 악에 지배당하는 몸은 실제의 자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재 이미 몸을 떠나 완전히 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육에 의한 잘못은 자신들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편리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한국에서 귀신론으로 통칭되는 김기동 목사의 주장이나 구원파로 통칭되는 박옥수 목사의 주장 역시 유사 영지주의입니다. 귀신론을 아시지요? 모든 악한 일은 귀신 책임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도 귀신의 장난으로 봅니다. 심지어 감기도 역시 귀신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구원파에게도 죄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 벌어지는 죄는 죄도 아닙니다. 철저한 영육 이원론에 기울어진 것입니다.

    

정통 사도들과 교부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직 완전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우리 개역개정역은 신학적으로 애매합니다.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장에 나오는 두 가지 부사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schon(숀, 영-already)이고, 다른 하나는 noch nicht(노흐 니히트, 영-not yet)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긴장이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이미’에만 절대적인 무게를 둔다면 교부들은 ‘아직 아님’과의 긴장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차이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단순히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지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작게 보이는 차이가 결국은 결정적인 차이로 나타납니다. ‘아직 아님’이라는 부분이 약화되면 죄가 추상화됩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교회에 ‘영적 싸움’이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것이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깝게는 한국에서 불교를 적대시하고, 멀게는 이슬람권을 적대시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벌이는 퍼포먼스가 속칭 ‘땅밟기’입니다. 이런 주장은 일종의 기독교 패권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는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역사와 삶이 실종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비정규직 문제, 사회 소수자, 경제 민주화, 통일문제, 그리고 핵 문제와 생태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습니다. 미자립 교회 문제는 강 건너 불로 여긴 채 해외 선교사 파송에 열을 올립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는 문제인데, 미자립 교회를 방관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런 현상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추상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지주의의 유산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정통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인간의 죄, 역사적 책임, 악과의 투쟁을 엄중하게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직 아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역시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악한 몸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총체적인 부패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는 실질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6절은 이렇습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죄를 행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죄는 자기의 책임입니다.

 

종말론적 희망

    

하나님의 자녀가 ‘아직 아님’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 차이가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머리에 사슴처럼 아름다운 뿔이 달리거나 눈에 광채가 나는 게 아닙니다. 방언, 입신도 증거가 아닙니다. 큰 교회당도 그런 표시가 될 수 없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종말론적 영성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3절)가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종말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그 소망으로 삽니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그래서 악과 투쟁합니다.

    

종말이라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지시나요? 2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순간이며, 바로 그 사건입니다. 부활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아직 못 봅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말처럼 살아있는 한 아무도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미 승천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간혹 주님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천당을 보고 왔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든지 아니면 자기 착각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본다는 것인데, 그것은 종말에만 가능합니다. 그때가 되어야 우리는 부활생명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기대가 되지요? 마음이 설레지요? 세상살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데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으신가요? 오해는 마십시오.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경쟁중심의 세상살이에 지쳐서 현실 도피적으로 종말의 부활을 희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종말 신앙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도 희열을 느낍니다. 천상병 시인의 표현처럼 세상살이를 소풍처럼 여기고 삽니다. 그러나 부활 생명은 이런 것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생명입니다. 플라톤의 비유로 말씀드리면 동굴 안이 아니라 동굴 밖의 생명입니다. 그게 기다려지시나요? 거기에 영적인 관심이 기울어져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그것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희망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요일 3:1b이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세상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통치도 모르고, 부활 생명도 모릅니다. 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종말의 부활 생명을 희망하는 우리를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너무 잘 알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생명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을 여러분은 실제로 알고 있으신가요? 그걸 모른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종말에 우리가 부활의 주님과 같아진다는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3절) 왜냐하면 지금 이런 육신을 안고 사는 우리가 부활체로 변화될 것을 알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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