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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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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sarang.onmam.com |
왕의 예루살렘 입성
마21:1-11
2012.4.1 종려주일
오직 한 길 ?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오셔서 33년을 사시고 죽으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셨던 33년 중 본격적으로 사역하셨던 기간은 마지막 3년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모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너무나도 바쁘셨고,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짧고 바빴던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0세라고 합니다. 우리는 80년을 살면서도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인생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들은 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날마다 바쁘게 살면서도 정작 꼭 해야 할 일들은 늘 뒷전으로 미루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중요한 일을 마치지 못한 채로 살아가다가 인생을 마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짧은 공생애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모든 사명을 다 이루실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일들과 주님을 찾는 수없는 사람들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명의 중심에는 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이 한 가지 사명에 집중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걸어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전에도 몇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때나, 귀신들이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늘 말씀하신 그 때,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다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과 갈채를 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되는데,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벳바게에 도착하시어 안식을 보내신 후, 다음날인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유대인들과 문답하셨고, 각종 비유와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반역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셨으며,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시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에 오셨는데,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20:29-34)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오셨는데, 여리고에서부터 이미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에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들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더 크게 불어났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고자 함이러라”(요12: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큰 무리는 나사로의 동네인 베다니를 지나면서 더 크게 불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당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몰려든 엄청난 인파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정복하여 수도로 삼은 후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이후로 예루살렘은 명실공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예루살렘은 대대로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메시아로서 입성한 것임과 동시에,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준비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거쳐 베다니를 지나 예루살렘 근처인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하여 나귀를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나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보내리라 하시니”(1-3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의 주인에게 미리 예약을 해놓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다분히 인본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셨으며, 나귀 주인은 예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셔서 나귀를 끌어오게 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전지하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가 되심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6-7절)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4-5절) 이것은 특히 슥9:9의 성취입니다.
스가랴는 “네 왕”이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토록 기다리며 애타게 고대하던 왕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그 왕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 고침을 받고 영생을 얻은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두 소경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은혜를 전혀 힘입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님은 바로 나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구원하러 오신 왕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버려 백성을 구원하신 왕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임하시는 나의 왕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오늘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왕으로 기꺼이 영접하고 있습니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메시아라면 당연히 군마를 타고 오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메시아요 왕이시면서 군마를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메시아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왕이십니다. 주님은 가장 위대하시면서도 가장 겸비하시고, 가장 높은 분이시면서도 가장 낮고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나귀를 타신 우리 왕은 겸손하시며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평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왕이시되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는 왕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이 왕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십니다. 당신은 주님을 당신의 구주로 모셨습니까? 뿐만 아니라 주님을 당신의 왕으로 영접하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나를 구원하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며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왕께 대한 영접과 찬양
제자들과 무리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얹고 길에 펴거나, 또는 종려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8-9절)
옷을 벗어서 길에 편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예후가 왕이 될 때 그의 동료 장군들이 그를 이렇게 맞았습니다(왕하9:13). 요한은 이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7:9-19)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왕을 영접하는 의식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리들은 주님을 왕으로 축하하며 맞이했던 것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 또는 ‘원컨데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에는 기원과 경배, 기도와 찬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 주여! 우리가 당신께 간절히 비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들의 찬양과 외침은 메시아 예언인 시편 118편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를 축복하였도다”(24-26절) 24절의 ‘이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날, 즉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 날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이루신 주님
마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묘사하면서 구약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는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4절) 마태가 이것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구약에 예언된 일이며,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하나님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이미 말씀하신 뜻과 명령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즉 구원자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오셨으며, 오직 이 일을 이루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오직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
하나님이시며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길,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길,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임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어떤 고난을 당하실 것인지도 자세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장면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주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놓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한 길,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결연하게 십자가를 향하여 마지막 길을 걷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과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이 한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따라오라고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남은 삶을 주님을 따라, 사명을 위해 걸어가야 합니다.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최고의 길, 승리의 길, 영광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도 주기철 목사님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갔는데, 나중에 보니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가더라.” 십자가 때문에 내가 살았고, 이 사명 때문에 내 인생이 복되고 값진 인생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결연하게 십자가의 마지막 길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따라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 마치는 날까지 이 사명에 집중하여,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다 이루고 하나님 앞에 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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