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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15: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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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sarang.onmam.com |
2012.4.15 주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타락한 후 인류는 모두 소망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일 년 수개월의 여행 끝에 가나안 땅을 앞에 둔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거기에는 강한 족속들이 살고 있으며, 성은 견고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가나안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메뚜기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정탐꾼들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차라리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게 할 것이지, 하나님은 왜 우리를 가나안 땅에 데리고 들어가서 죽게 하려고 하느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불신앙에 진노하셔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광야로 나가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죽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출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이 가까운 곳까지 왔는데, 거기서 그들은 불신앙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죄인인 우리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늘 실패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완전히 실패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여전히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늘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회복시켜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다시 소망을 갖게 되며,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1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실패한 일과 호르마에서 가나안 사람들에게 패배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5장에 오면 소제와 전제, 처음 익은 곡식을 드리는 법, 부지중에 범한 죄를 속하는 제사, 안식일을 범한 자에 대한 형벌, 옷단의 술에 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15장의 내용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15장에 기록된 이러한 규례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결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20세 이상된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15장에 오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하는 땅에 들어가서”(1-2절)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들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규례들을 주심으로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규례들을 명령하심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하고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을 새롭게 회복시키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약속을 상기시키는 규례들(3-12)
제사에 대한 이 모든 규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규례들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전제로 하고 주어졌습니다.
최근에 심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거하게 할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하는 땅에 들어가서”(15:2) 이 말씀이야말로 가네스 바네아에서 실패한 백성들의 모든 의문과 두려움과 실망을 말끔히 제거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대답이었습니다. 패역하고 범죄한 세대는 광야에서 죽겠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은 여전히 양육되어 해변의 모래보다 더 많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겠습니까? 우리가 불성실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며, 우리가 실패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번제와 소제들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죄와 회개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물 드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백성의 복되고 정상적인 삶인 것입니다.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3절) 제물 드리는 것에 대해서 특히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들을 힘입게 될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희생 제물들에는 소제와 전제가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소제와 전제는 그 땅에서 나는 소산물, 즉 곡식과 포도주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 규례들에는 그들이 장차 들어가 정착할 가나안 땅에서 번영하게 될 것이며, 그 풍성한 소출을 누리게 될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4-12).
제물을 드리는 방법
3-12절에는 제물 드리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물은 소나 양을 잡아서 드리는데, 이 제물을 드릴 때 일정한 양의 고운 곡식 가루에다 일정하게 정해진 양의 기름을 섞어서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헌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4절)
여기 언급된 모든 제물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순결한 소나 양은 거룩하시고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고운 가루는 예수님의 아름답고 완전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예물은 또한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백성들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과 삶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는 반드시 기름이 있어야 했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하나님 백성들은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하심과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예배와 헌신과 봉사와 삶에 성령께 함께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섬기는 성도는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타국인들에 대하여(14-16)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타국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할례를 받아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도 본토인과 똑같이 제사규례를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나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가 하는 대로 그도 할 것이니라”(14절)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히브리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규례를 통하여 히브리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사실상 철폐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방인 거주자들은 빠르게 유대민족에게 동화되어갔습니다. 특별히 이 규례는 매우 배타적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될 것을 예표하며 준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교회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자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적응하고 동화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새로 나온 성도들이 교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으며, 기존의 신자들끼리도 낯설고 서먹한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우리는 좀 더 마음을 열고 성도의 사랑과 교제에 힘써야 하며, 특별히 새로 나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규례들(17-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특별히 처음 익은 곡식을 예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나타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여기에도 ‘너희가 나의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이라는 말씀이 전제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18절)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이 모든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얻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신실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 약속을 붙잡고 흔들림 없이 전진하고 있습니까?
첫 열매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는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19-20절) 처음 익은 곡식가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수확의 모든 열매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열심히 일하여 얻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모든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며, 그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첫 열매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고백과 감사로 드려졌습니다.
우선적인 찬양
대개 모든 제사는 성전에서 드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제는 타작마당에서 드려져야 했습니다.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20절) 그것을 타작해서 성전으로 가지고 가기까지 기다렸다가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작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신속하고도 즐겁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백성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신과 은혜로우심을 신속하게 깨닫습니까? 그리고 즉시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우리 삶의 최우선에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우리의 시간과 노력과 수입을 우선적으로 바쳐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친교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주님은 진정으로 당신의 모든 것이 되십니까?
일상적인 의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얻을 첫 열매로 드리는 거제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21절)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식사할 때 드리는 기도와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개인적인 모든 기도도 역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신실하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우리에게 풍성하게 축복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늘 실패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이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범죄하고 실패하고 넘어지는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래서 과거의 범죄와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우리를 붙드셔서 마침내 승리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무엇보다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섬겨야 합니다. 또 하나님 백성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삶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힘입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충성 다해 하나님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회복(2) 민15:22-41
2012.4.22주일 설교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도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범죄하고 실패하여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이처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 중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불신앙으로 거역하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광야로 되돌려 보내셔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징계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심한 실망과 허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죄로 인하여 실패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장에 나오는 모든 규례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므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은 반드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거기서 얻은 풍성한 소출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었습니다. 죄를 속하는 규례(23-29) 죄에는 알고 짓는 죄와 알지 못하거나 실수로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실수라고 변명하거나 가볍게 넘기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죄도 본질적으로 같은 죄입니다. 이런 죄를 가볍게 여기고 간과하면,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과 양심이 둔해지고 희미해집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범한 죄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죄도 하나님의 백성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해서는 안 되며, 만일 그들이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속죄 제사를 통하여 사함을 받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고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는 ‘부지중에 범하는 죄’였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는 무의식적으로, 또는 모르고 지은 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알고도 하나님께 반항하여 짓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부지중에 짓는 죄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회중 전체가 짓는 죄와 개인이 짓는 죄입니다. 먼저 온 회중이 이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24절) 개인이 이 죄를 범한 경우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부지중에 범죄하면 일 년 된 암염소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부지중에 범죄한 사람이 부지중에 여호와께 범한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27-28절) 회중이 단체로 지은 죄와 개인이 지은 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죄일까요? 우리는 대개 전체가 지은 죄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단체가 지은 죄가 훨씬 더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27:2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죗값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학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은 육백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민족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회중이 짓는 죄는 개인이 짓는 죄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의 죄,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죄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 규례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므로 죄로 인하여 더렵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죄 사함 속죄 제사는 범죄한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허락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속죄 제사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피 흘림, 즉 제물의 죽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 곧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죗값을 요구하기 때문에 동물의 피로 죗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을 용서해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속죄 제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요청되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으며 효력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은혜의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대속하신 구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30-36) 이렇게 부지중에 지은 죄는 속죄제를 드림으로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의로 지은 죄’입니다.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30절) 이것은 고의적이고 반항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 죄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무시하고 죄악된 일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죄를 “여호와를 비방하는 것”(30절)과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는 것”(31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계명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31절)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얻는 제사법이 있으나 이 죄는 사함 받을 길이 없으며, 성경에는 이 죄를 사함 받기 위한 희생제물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 영벌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요한도 이 죄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5:16) 고의적으로 짓는 죄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범한 죄 ‘고의로 범한 죄’에 대한 예로 안식일을 범한 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이 그 하는 일을 멈추고 쉼을 얻게 하셨으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안식일은 타락 후 죄의 결과로 찾아 온 노동의 고통을 벗고, 하나님의 구속을 앙망하며 회복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인식하며 고백하는 날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구속을 바라보는 날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존경을 상징하며,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안식일을 범한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처신한 행위였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멸시한 것으로 ‘여호와를 비방하는 죄’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백성들이 그 사람을 돌로 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얼마나 큰 불순종의 죄인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일과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안식일은 주일로 대치되었습니다. 원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완성을 기념하고 기뻐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그 분 백성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포함하면서 우리를 구속하신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고,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성도의 태도는 안식의 기쁨뿐만 아니라, 구속을 통한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일을 범하는 것은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는 두려워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구약시대의 백성들보다 더욱 진지하게 이 날을 지켜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지키는 데 매우 소홀합니다. 오늘 우리는 좀 더 구별된 자세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옷단에 다는 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는 구별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하나님 백성은 죄에서 깨끗해야만 합니다. 연약하여 부지중에 범한 죄라 할지라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속죄 제사의 규례는 이미 범한 죄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한 죄를 예방하기 위한 규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려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38-40절) 옷단에다 술을 다는 것은 그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모든 법을 기억하여 진심으로 그 법에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술에 청색 끈을 더하라고 하셨는데, 청색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청색 끈이 달린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로 다짐해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에도 이 술을 보면서, 자신들이 가나안 백성이 아니라 하늘나라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전에 범죄하는 것을 예방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관습들이 남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마23:5). 바리새인들은 이 규례를 자기들의 믿음과 열심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외적인 규정들에 얽매이지 않지만, 우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더욱 순종함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님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40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15장의 모든 규례들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41절)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출되어 광야로 나왔습니다. 일 년 수개월의 여행 끝에 그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이 눈앞에 보이는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은 불신앙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광야로 나가 40년을 방황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40년 동안 당시 20세 이상 되었던 사람들은 다 죽고, 그들의 자녀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범죄하고 실패하여 소망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하나님 백성으로 여기셨으며, 하나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불러내어 구원해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세상 백성과 다르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백성임을 나타내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는 또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잘못해서 죄를 지었을 때는 진심으로 회개하여 사유하심과 회복의 은총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된 것을 잊지 말고 예배하는 삶, 거룩한 삶, 천국 소망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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