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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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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신자의 엉터리 행복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항상 좋은 일과 기쁜 소식과 자기를 좋아 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있기를 좋아 합니다. 본성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노력 자체를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잘하는 일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로 항상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좋은 일과 기쁜 소식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인간 세상은 구조적으로 아예 그렇게 될 수 없다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과 피조세계가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본인은 물론 그 행복을 제공하는 여건이 되어야 할 주위 사람과 환경도 모두 불완전하기에 결코 완전한 행복을 이 땅에서 얻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어차피 불완전한 행복 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선(first)이 안 되니까 차선(second)의 행복이라도 얻으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들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고유의 행복관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관에 관해 정작 먼저 따졌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정확하게는 아담의 원죄를 모르는 불신자들은 사실 완전한 행복이 구조적으로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전히 그들은 평생을 통해 좋은 일, 좋은 소식, 좋은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있기를 원합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행복을 추구하므로 그들의 인생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자주 나옵니다.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불러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민22:6)고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도 선지자 미가야에 대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왕상22:8)라고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당연히 이들 두 사람의 인생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해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신자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혹시 죄가 되는가요? 어차피 완전한 행복이 불가능하다면 신자도 차선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요? 그 답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불신자와는 정반대의 행복관을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나쁜 일, 나쁜 소식,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관에 여러 분은 동의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을 엄밀히 따지면 그런 행복관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가는 곳마다 슬프고 애통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만 만났습니다. 힘든 일들과 나쁜 소식이 없었던 적이 없고 따르는 사람들 또한 귀찮게 하거나 비방하거나 뭔가 받을 것이 있는 자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항상 함께 했지만 그들은 오순절 성령 받기 전까지는 스승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끼리 누가 높아질 것인가 다투기도 하고 스승을 직접 배반하는 자가 나오는가 하면 결국에는 스승을 다 버리고 도망갔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제목처럼 바로 곁에 자기를 팔자, 배반할 자, 현실적 축복을 목표로 따르는 비천하고 무식한 자들 12명을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전부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언제 어디에서라도 오라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따지면 수고하지 않고(편안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상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당신께서 이 땅의 삶에서 갖고 실천했던 행복관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당신으로서 메시야였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하고 비교하면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물질을 밝히지 말고 선을 행하여 정신 건강부터 찾으라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행복관을 가지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인간과 세상은 부패해서 불완전합니다. 그 불완전한 곳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어떤 수단을 강구해도(율법, 도덕, 사상, 종교 등을 다 포함해도) 불완전한 행복밖에 산출되지 못합니다. 그럼 가장 급선무는 불완전한 인간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꾸어진 인간들이 힘을 합하여 불완전한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세상에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짐에 눌려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에게서 그 멍에부터 벗겨 주려 한 것입니다. 인간들더러 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가장 먼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수고와 짐부터 예수 안에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만 벗어선 무인도에 가서 평생을 혼자 살지 않는 한 여전히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자기 주위에 수고하고 짐 진 자들부터 그 멍에를 벗겨 준 후에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행복관이 볼신자의 정 반대로 자기에게 힘든 일, 나쁜 소식, 좋지 않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야 한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를 믿엇다고 의무적으로 전도의 짐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여전히 또 다른 종류의 짐을 신자들에게 지게 한 것밖에 더 됩니까? 신자 자신의 참 행복을 위해 스스로 주위의 짐을 져야 하고 또 그 길 외에 신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예수 안에서 수고와 짐을 벗어버림으로써 그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벗어버려야 할 짐은 절대로 현실의 고통, 인간관계의 상처, 세상의 재앙 등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오직 좋은 일, 기쁜 소식, 좋은 사람에 둘러싸여 살겠다는 잘못된 행복관을 벗어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그런 욕심들이 불현듯 솟구칠 수 있지만 최소한도 내가 먼저 예수 안에서 변화되지 않고는 또 내가 변화되어도 이 세상과 이 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땅에선 절대로 완전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확고한 인식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본질상 세상과는 항상 거꾸로 가는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라는 것을 세상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이 우선이 되는 세상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 안에서 나쁜 소식이 됩니다. 세상의 행복관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절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지닌 복음이 세상 사람에게 진정한 복음이 되어야만 신자의 행복이 보장됩니다. 신자가 세상의 나쁜 일, 나쁜 소식, 나쁜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어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궁극적으로 좋은 일, 좋은 소식,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때에 비로소 신자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에게 진정한 행복을 맞볼 수 있도록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리라.” 이것만이 신자의 참 행복관입니다. 그런데도 작금 대부분의 신자의 행복관이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 빨리 나에게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속히 벗겨주세요. 그래야 예수님도 좀 편하게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8/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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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항상 좋은 일과 기쁜 소식과 자기를 좋아 해주는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있기를 좋아 합니다. 본성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노력 자체를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잘하는 일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로 항상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좋은 일과 기쁜 소식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인간 세상은 구조적으로 아예 그렇게 될 수 없다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과 피조세계가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본인은 물론 그 행복을 제공하는 여건이 되어야 할 주위 사람과 환경도 모두 불완전하기에 결코 완전한 행복을 이 땅에서 얻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어차피 불완전한 행복 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선(first)이 안 되니까 차선(second)의 행복이라도 얻으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들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고유의 행복관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관에 관해 정작 먼저 따졌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정확하게는 아담의 원죄를 모르는 불신자들은 사실 완전한 행복이 구조적으로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전히 그들은 평생을 통해 좋은 일, 좋은 소식, 좋은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있기를 원합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행복을 추구하므로 그들의 인생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자주 나옵니다.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불러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민22:6)고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도 선지자 미가야에 대해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왕상22:8)라고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당연히 이들 두 사람의 인생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해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신자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혹시 죄가 되는가요? 어차피 완전한 행복이 불가능하다면 신자도 차선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요? 그 답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불신자와는 정반대의 행복관을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나쁜 일, 나쁜 소식,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관에 여러 분은 동의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을 엄밀히 따지면 그런 행복관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가는 곳마다 슬프고 애통하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만 만났습니다. 힘든 일들과 나쁜 소식이 없었던 적이 없고 따르는 사람들 또한 귀찮게 하거나 비방하거나 뭔가 받을 것이 있는 자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항상 함께 했지만 그들은 오순절 성령 받기 전까지는 스승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끼리 누가 높아질 것인가 다투기도 하고 스승을 직접 배반하는 자가 나오는가 하면 결국에는 스승을 다 버리고 도망갔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제목처럼 바로 곁에 자기를 팔자, 배반할 자, 현실적 축복을 목표로 따르는 비천하고 무식한 자들 12명을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전부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언제 어디에서라도 오라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따지면 수고하지 않고(편안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상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당신께서 이 땅의 삶에서 갖고 실천했던 행복관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당신으로서 메시야였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하고 비교하면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물질을 밝히지 말고 선을 행하여 정신 건강부터 찾으라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행복관을 가지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인간과 세상은 부패해서 불완전합니다. 그 불완전한 곳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어떤 수단을 강구해도(율법, 도덕, 사상, 종교 등을 다 포함해도) 불완전한 행복밖에 산출되지 못합니다. 그럼 가장 급선무는 불완전한 인간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꾸어진 인간들이 힘을 합하여 불완전한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세상에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짐에 눌려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에게서 그 멍에부터 벗겨 주려 한 것입니다. 인간들더러 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가장 먼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수고와 짐부터 예수 안에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만 벗어선 무인도에 가서 평생을 혼자 살지 않는 한 여전히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자기 주위에 수고하고 짐 진 자들부터 그 멍에를 벗겨 준 후에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행복관이 볼신자의 정 반대로 자기에게 힘든 일, 나쁜 소식, 좋지 않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야 한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를 믿엇다고 의무적으로 전도의 짐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여전히 또 다른 종류의 짐을 신자들에게 지게 한 것밖에 더 됩니까? 신자 자신의 참 행복을 위해 스스로 주위의 짐을 져야 하고 또 그 길 외에 신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예수 안에서 수고와 짐을 벗어버림으로써 그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벗어버려야 할 짐은 절대로 현실의 고통, 인간관계의 상처, 세상의 재앙 등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오직 좋은 일, 기쁜 소식, 좋은 사람에 둘러싸여 살겠다는 잘못된 행복관을 벗어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그런 욕심들이 불현듯 솟구칠 수 있지만 최소한도 내가 먼저 예수 안에서 변화되지 않고는 또 내가 변화되어도 이 세상과 이 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땅에선 절대로 완전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확고한 인식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본질상 세상과는 항상 거꾸로 가는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라는 것을 세상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이 우선이 되는 세상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 안에서 나쁜 소식이 됩니다. 세상의 행복관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절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지닌 복음이 세상 사람에게 진정한 복음이 되어야만 신자의 행복이 보장됩니다. 신자가 세상의 나쁜 일, 나쁜 소식, 나쁜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어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궁극적으로 좋은 일, 좋은 소식,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때에 비로소 신자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에게 진정한 행복을 맞볼 수 있도록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리라.” 이것만이 신자의 참 행복관입니다. 그런데도 작금 대부분의 신자의 행복관이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 빨리 나에게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속히 벗겨주세요. 그래야 예수님도 좀 편하게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8/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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