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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4:2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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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믿음을 키우는 유일한 비결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28-31)
예수님이 먼저 떠나보낸 제자들과 동행하려고 밤 사경에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여러 사람을 태운 배는 바람에 거슬린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24절) 반면에 예수님은 혼자 거친 풍랑 속에서도 아무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걸어오고 있었다고 표현한 뜻은 그 움직임에 전혀 부자연스런 모습 없이 실제로 걷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공중 부양하듯이 날아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심한 바다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밟는 그 자리만 순간적으로 마른 땅처럼 된 것입니다. 비유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있는 동안만은 바다가 마른 땅으로 변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이 행하는 곳 어디나 당신의 거룩한 통치가 완벽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도 주님에게 부탁하여(?)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바람에 물에 빠져가기 시작했고 다시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여 익사를 모면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믿음이 적은 자라고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혹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기사를 두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고취하려고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도저히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있는 기존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적을 부인하는 자는 결코 기적을 맛볼 수 없습니다.
기존 질서만으로 모든 일이 운행된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고 믿음도 무용지물입니다. 매사에 가시적 사안으로만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적용하면 됩니다. 신자가 할 일도 자기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나 교인인 양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신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려다 오히려 스스로 부인하게 된 꼴입니다.
성경은 아주 정미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렁이는 물을 보고 무서워 빠졌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이 육안으로 바람을 볼 수는 없습니다. 풍랑이 이는 모습이나 귓가에 스치는 감각으로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지금 베드로가 바로 자기 발밑의 물을 보고 두려워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가 디뎠던 바다도 발을 밟는 그 순간만은 땅처럼 단단해졌던 것입니다. 얼마를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발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풍랑을 보고 혹시 휘말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가 드는 순간에 그가 디딘 바다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나아가 “빠져 가는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영을 전혀 못하는 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므로 틀림없이 상당한 수영 실력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수영조차 못할 정도로 큰 폭풍우였다면 처음부터 바다에 뛰어들 생각도 안했을 것입니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더 조심하는 법입니다. 설령 그런 큰 폭풍우였다 해도 물에 빠져서 그리 쉽게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서서히 물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지칭한 것입니다. 즉 의심이 그의 마음을 파고 드는 시간적 경과에 따라 그의 발밑의 딱딱했던 상태가 서서히 약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논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말씀의 진의를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믿음이 많고 적음이 결코 신자의 의지적 결단력과 응집력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나를 틀림없이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을 거야!!”를 수십 번 되뇌면서 이제 물에 뛰어들어보기로 하자라고 행하는 것과 믿음과는 사실상 별개라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물에 뛰어 들어간 것뿐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각오를 다지면서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 흔들림 없이 물 위를 걸어오는 주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또 주님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배에서 내린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불신과 의심은커녕 주저함도 전혀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좋은 믿음을 의심이 없는 상태와 연결시킨 까닭입니다. 좋은 믿음은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지 의지력의 세기와는 아예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에선 더 세분하여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예수를 믿기에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듭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부러 전혀 의심 내지 의식조차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또 그것이 믿음을 세우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모순입니다. 인간 사고의 흐름상 아주 부자연스런 상태입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상, 교육상, 사물의 본질상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자유주의학자가 성경기록의 진실성을 계속 물고 늘어질 정도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합니다. 베드로가 평생 동안 바다에서 터득한 원리도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알기 쉽게 말해 베드로가 물에 띄어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도 안했지만, 믿음으로 행하면 충분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거야라고 단단히 다짐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한쪽 발을 내밀었더니 그 밑의 물이 딱딱해졌고 그대로 걸어간 것입니다. 결국 의심이 적거나 없어서 믿음이 좋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굳세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 대부분은 강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도한 제목들이 응답이 될 거야라고 열심히 믿거나,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으려 노력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믿음을 더 세게 만들면 반드시 응답되고야 만다는 사실부터 믿으려 듭니다. 그럼 믿음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의심을 없앨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응답되리라는 사실 등이 열심히 믿으려는 대상들입니다. 정작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하나님과 예수님은 빠져 있습니다.
믿음은 정말로 아주 단순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안 섞이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온전히 성삼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기도한 사실이 이뤄질 것부터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그 다음에 응답될 것도, 단 하나님의 방식으로, 믿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응답되든 안 되든 이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순히 전지전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못 믿는 자는 없습니다. 또 안 믿으면 기도도 하지 못합니다. 간단히 말해 믿음은 나와 내 일생이 그분의 거룩한 손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없는 것도 그 부분에 전혀 흔들림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냥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풍랑을 보는 순간 두려워진 것까지는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바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 “아차! 이러다 빠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예수님이 오라는 대로 단순하게 따랐던 자세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의심에 붙들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물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그때야말로 그는 자기 믿음을 강하게 해서 물 위를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중에 통용되는(?) 믿음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나로 물 위를 걷게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을 그 짧은 순간에 수십 번도 더 읊조렸을 것입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그대로 행하면 그만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믿습니다, 믿음을 주십시오, 믿을 수 있도록 징조를 주십시오, 등등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 그분에 대해서도 의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풍랑을 보면 겁을 집어먹기 마련입니다. 아니 베드로처럼 물에 띄어들지도 못합니다. 그럴 엄두도 못 내는 소인배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고 굳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내가 믿으려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까지 나를 사랑한 그 사랑에 온전히 붙잡혀 있다는 온전한 확신부터 가지고 그 확신에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도록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믿음을 자꾸 크게 키우기보다는 막상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이 사실은 믿음을 키우는 본질입니다. 예수 믿은 후의 일생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붙잡혀 있으면 본문의 베드로처럼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구태여 따로 믿고 자시고 할 일이 없습니다.
정작 본문이 주는 의미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순순히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믿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보자고 하는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좋게 보면 주님의 권능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단순하게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마중 나가는 심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나쁘게 또는 엄밀히 해석하면 그로선 자기도 물 위를 걸어봐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풍랑을 보는 순간 걸어야겠다는 목표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즉, 자기가 물에 빠질 것 같으니까 두려워진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믿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현재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렇게 믿거나, 다짐하거나, 소원하거나 간에) 생각이 들면 들수록 자신의 믿음을 더 강하게 세우려 들고 동시에 의심도 더 많이 생기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믿음을 키우려 들어선 절대 의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를 계속 환난에 빠트리려고 사단의 방해가 심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일수록 신자는 하나님을 더 찾게 마련이니까 즉, 어떤 신자라도 위급하면 기도하니까 오히려 사단은 신자에게 풍요와 형통을 주려 애를 씁니다.
욥의 경우처럼 도리어 하나님이 신자를 환난에 방치하거나 밀어 넣을 수 있음에 우리 믿음의 눈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라고,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그냥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요컨대 순종이 앞서지 않고 단순히 믿음을 키우려 해선 절대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온갖 풍랑이 일렁거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풍랑만 제거하면 만사형통하고 믿음이 자라며 더 순종할 것 같습니까? 또 그런 뜻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믿음을 굳세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그런데 잠시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모든 신앙경험을 되돌아보십시오. “이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응답될 것만 믿었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응답 안 되면 하나님도 안 믿을 작정입니까? 솔직히 우리가 되풀이 했던 잘못이지 않습니까? 주님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에 계시된 뜻 그대로 행하는 것 말고는 의심을 제거하고 믿음을 키우는 길은 사실상 없습니다.
8/1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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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28-31)
예수님이 먼저 떠나보낸 제자들과 동행하려고 밤 사경에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여러 사람을 태운 배는 바람에 거슬린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24절) 반면에 예수님은 혼자 거친 풍랑 속에서도 아무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걸어오고 있었다고 표현한 뜻은 그 움직임에 전혀 부자연스런 모습 없이 실제로 걷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공중 부양하듯이 날아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심한 바다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밟는 그 자리만 순간적으로 마른 땅처럼 된 것입니다. 비유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있는 동안만은 바다가 마른 땅으로 변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이 행하는 곳 어디나 당신의 거룩한 통치가 완벽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도 주님에게 부탁하여(?)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바람에 물에 빠져가기 시작했고 다시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여 익사를 모면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믿음이 적은 자라고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혹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기사를 두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고취하려고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도저히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있는 기존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적을 부인하는 자는 결코 기적을 맛볼 수 없습니다.
기존 질서만으로 모든 일이 운행된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고 믿음도 무용지물입니다. 매사에 가시적 사안으로만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적용하면 됩니다. 신자가 할 일도 자기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나 교인인 양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신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려다 오히려 스스로 부인하게 된 꼴입니다.
성경은 아주 정미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렁이는 물을 보고 무서워 빠졌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이 육안으로 바람을 볼 수는 없습니다. 풍랑이 이는 모습이나 귓가에 스치는 감각으로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지금 베드로가 바로 자기 발밑의 물을 보고 두려워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가 디뎠던 바다도 발을 밟는 그 순간만은 땅처럼 단단해졌던 것입니다. 얼마를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발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풍랑을 보고 혹시 휘말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가 드는 순간에 그가 디딘 바다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나아가 “빠져 가는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영을 전혀 못하는 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므로 틀림없이 상당한 수영 실력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수영조차 못할 정도로 큰 폭풍우였다면 처음부터 바다에 뛰어들 생각도 안했을 것입니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더 조심하는 법입니다. 설령 그런 큰 폭풍우였다 해도 물에 빠져서 그리 쉽게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서서히 물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지칭한 것입니다. 즉 의심이 그의 마음을 파고 드는 시간적 경과에 따라 그의 발밑의 딱딱했던 상태가 서서히 약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논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말씀의 진의를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믿음이 많고 적음이 결코 신자의 의지적 결단력과 응집력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나를 틀림없이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을 거야!!”를 수십 번 되뇌면서 이제 물에 뛰어들어보기로 하자라고 행하는 것과 믿음과는 사실상 별개라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물에 뛰어 들어간 것뿐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각오를 다지면서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 흔들림 없이 물 위를 걸어오는 주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또 주님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배에서 내린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불신과 의심은커녕 주저함도 전혀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좋은 믿음을 의심이 없는 상태와 연결시킨 까닭입니다. 좋은 믿음은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지 의지력의 세기와는 아예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에선 더 세분하여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예수를 믿기에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듭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부러 전혀 의심 내지 의식조차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또 그것이 믿음을 세우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모순입니다. 인간 사고의 흐름상 아주 부자연스런 상태입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상, 교육상, 사물의 본질상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자유주의학자가 성경기록의 진실성을 계속 물고 늘어질 정도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합니다. 베드로가 평생 동안 바다에서 터득한 원리도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알기 쉽게 말해 베드로가 물에 띄어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도 안했지만, 믿음으로 행하면 충분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거야라고 단단히 다짐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한쪽 발을 내밀었더니 그 밑의 물이 딱딱해졌고 그대로 걸어간 것입니다. 결국 의심이 적거나 없어서 믿음이 좋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굳세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 대부분은 강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도한 제목들이 응답이 될 거야라고 열심히 믿거나,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으려 노력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믿음을 더 세게 만들면 반드시 응답되고야 만다는 사실부터 믿으려 듭니다. 그럼 믿음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의심을 없앨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응답되리라는 사실 등이 열심히 믿으려는 대상들입니다. 정작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하나님과 예수님은 빠져 있습니다.
믿음은 정말로 아주 단순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안 섞이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온전히 성삼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기도한 사실이 이뤄질 것부터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그 다음에 응답될 것도, 단 하나님의 방식으로, 믿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응답되든 안 되든 이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순히 전지전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못 믿는 자는 없습니다. 또 안 믿으면 기도도 하지 못합니다. 간단히 말해 믿음은 나와 내 일생이 그분의 거룩한 손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없는 것도 그 부분에 전혀 흔들림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냥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풍랑을 보는 순간 두려워진 것까지는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바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 “아차! 이러다 빠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예수님이 오라는 대로 단순하게 따랐던 자세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의심에 붙들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물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그때야말로 그는 자기 믿음을 강하게 해서 물 위를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중에 통용되는(?) 믿음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나로 물 위를 걷게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을 그 짧은 순간에 수십 번도 더 읊조렸을 것입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그대로 행하면 그만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믿습니다, 믿음을 주십시오, 믿을 수 있도록 징조를 주십시오, 등등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 그분에 대해서도 의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풍랑을 보면 겁을 집어먹기 마련입니다. 아니 베드로처럼 물에 띄어들지도 못합니다. 그럴 엄두도 못 내는 소인배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고 굳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내가 믿으려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까지 나를 사랑한 그 사랑에 온전히 붙잡혀 있다는 온전한 확신부터 가지고 그 확신에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도록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믿음을 자꾸 크게 키우기보다는 막상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이 사실은 믿음을 키우는 본질입니다. 예수 믿은 후의 일생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붙잡혀 있으면 본문의 베드로처럼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구태여 따로 믿고 자시고 할 일이 없습니다.
정작 본문이 주는 의미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순순히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믿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보자고 하는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좋게 보면 주님의 권능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단순하게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마중 나가는 심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나쁘게 또는 엄밀히 해석하면 그로선 자기도 물 위를 걸어봐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풍랑을 보는 순간 걸어야겠다는 목표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즉, 자기가 물에 빠질 것 같으니까 두려워진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믿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현재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렇게 믿거나, 다짐하거나, 소원하거나 간에) 생각이 들면 들수록 자신의 믿음을 더 강하게 세우려 들고 동시에 의심도 더 많이 생기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믿음을 키우려 들어선 절대 의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를 계속 환난에 빠트리려고 사단의 방해가 심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일수록 신자는 하나님을 더 찾게 마련이니까 즉, 어떤 신자라도 위급하면 기도하니까 오히려 사단은 신자에게 풍요와 형통을 주려 애를 씁니다.
욥의 경우처럼 도리어 하나님이 신자를 환난에 방치하거나 밀어 넣을 수 있음에 우리 믿음의 눈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라고,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그냥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요컨대 순종이 앞서지 않고 단순히 믿음을 키우려 해선 절대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온갖 풍랑이 일렁거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풍랑만 제거하면 만사형통하고 믿음이 자라며 더 순종할 것 같습니까? 또 그런 뜻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믿음을 굳세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그런데 잠시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모든 신앙경험을 되돌아보십시오. “이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응답될 것만 믿었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응답 안 되면 하나님도 안 믿을 작정입니까? 솔직히 우리가 되풀이 했던 잘못이지 않습니까? 주님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에 계시된 뜻 그대로 행하는 것 말고는 의심을 제거하고 믿음을 키우는 길은 사실상 없습니다.
8/1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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