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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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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이게, 오늘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마11:28-30
2010.1.31
어렸을 때 제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내 키에 맞는 지게였습니다. 어린나이부터 일을 해야 하는 형편으로서는, 그 일의 대부분이 짐을 지거나 날라야 하는 것인데, 내 또래의 아이들이 제 키에 맞는 지게를 지고 꼴을 베 나르거나, 정미소로 낱알을 져 나르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인 '자가용 지게'를 만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집 근처에서는 아버지의 지게를 졌지만, 멀리 물건을 나를 때는 '질빵'이라는 것으로 물건을 날랐습니다. 이것은 끈으로 물건을 달아서 두 어깨에 걸어 이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끈이 넓던지 좁던지 멀리 가는 동안 물건의 무게 때문에 어깨는 마치 칼로 베듯이 아팠습니다. 그 때 어린 저는 '무거운 짐'이라는 게 어떤 건지 톡톡히 배웠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거의 짐을 지지 않습니다. 가끔 네팔의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셀파'들을 보면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것은 다 차로 실어 나릅니다. 짐은커녕 자기 몸도 옮기기 싫어서 한 정거장을 가는데도 버스를 탑니다.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더 무겁게 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마음의 짐입니다.
엊그제 삼성전자의 부사장이 자살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유서로만 본다면 '짐이 무거워'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아주 유능하고 탁월한 직장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무거운 짐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디 그분만의 이야기겠습니까?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청년은 청년들대로, 회사에 간신히 취직한 직장인은 또 그들대로, 정치인은 정치인 나름대로, '미래의 행복'이라는 미명아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무거운 짐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쟁취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쓰러집니다. 무거운 짐 때문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뭡니까? 무거운 짐 아닙니까? 그 짐을 좀 벗어 던지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더 큰 마음의 짐이거나, 죄의식의 짐 같은 것을 보탭니다. 등에 진 짐이라면 덜어서 같이 질수도 있지만 마음의 짐은 내려놓기도, 같이 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을 부르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라"(28).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는 것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만 나오는 독특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어떤 짐인지도 묻지 않겠다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문자 그대로, 수고를 하며 등에 짐을 지고 나르는 당시의 농민, 남의 집 일꾼, 또는 날품팔이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초청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구절에서 말하는 '무거운 짐'은 '등에 지는 짐'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29절에 보니까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쉼'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는 '몸의 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게 꼭 '정신적인 쉼'이거나 '마음만의 쉼'은 아닙니다. 뜻을 살려서 풀이해보면 '마음 또는 영혼으로 느끼는 쉼'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온전하게 쉬는 것을 말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무거운 짐'은 단지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짐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전체를 억누르는 어떤 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마23:4). 바리새파 사람들은 주로 그 사회의 중간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중간계층'이란 먹고 살만 한 사람들의 층이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두개파 다음으로 정치, 종교적인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예비하겠다는 사회 개혁의 신념에서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실세가 되면서, 체제수호 세력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창하던 사회 개혁은 뒷전이고 편협하고 경직된 율법주의로 기울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해석과 번역을 독점했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 법, 정결 법, 십일조 법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율법의 강력한 적용이 그들의 삶을 살찌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수백 개의 세부 조항과 수천 개의 불문율을 지킬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러한 것을 그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 대해서,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에 지치고, 기가 죽어 있다고 하셨어요(마9:36). 그들 가운데는, 사람들이 꺼리는, 힘들고 냄새 나는 일을 하면서, 종종 그 천한 직업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요구하는 철저한 율법과 수많은 규정들을 다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그들로부터 구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한일로 고생하며 지친데다가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아서 기도 펴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란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란, '수고하는 사람'과 '무거운 짐 진'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수고를 하면서 무거운 짐까지 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일로 겪는 고생만으로도 무거운 짐인데, 거기에다가 율법주의자가 지운 무거운 짐까지 지고서 허덕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위선자들', '눈먼 자들', '회칠한 무덤', '뱀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까지 하면서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마23:1-36). 그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까지 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그것은 어떤 보상도 행복한 미래에 대한 환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28).
단지 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숙명처럼 자기가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죄인, 세리, 창기, 어부, 온갖 병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 그리고 그 밖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진정으로 쉴 수 있었습니다. 그 쉼 다음에 그들은 기쁨에 사로잡혔고, 새로운 자아가 발견되었고, 가진 것을 나누게 되었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차지를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비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명상을 통해서 무슨 심오한 진리를 터득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그 말을 곧이듣고 나아와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웬일인지 마음이 편해지고 기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김지하는 架浦日記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신은 다반사 안에 시어머니처럼 쪼그리고 있어 잔소리하는 노쇠한 망령이 아니다. 참된 신은 굵고 원대하며 우주와 세계와 미래를 채우는 청춘의 법이다. 그것은 건설하는 망치요 씨뿌리는 거친 손이며 수확하는 낫이다. 죄 속으로 웅크리지 말라! 너는 한 발짝도 못 나간다. 나가라! 그리고 죄를 뛰어 넘어라! 죄는 진보의 또 하나의 이름이다. 예수는 이 진보의 대가를 죄로 짊어졌다. 십자가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시어머니처럼 잔소리하며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인, 율법학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그런 무거운 짐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진정으로 쉬게 해 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하여 그런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는커녕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지지 않는 무거운 죄의식의 짐까지 지고서 허덕이는 것입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사했다'고 하면서도, 맨 날 죄지은 것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사소한 일로도 찜찜해하며 자신을 감추려고 변명하고 핑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한 율법주의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변질된 모습으로 우리 속에 더 견고히 뿌리박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은혜' '은혜'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사사건건 다른 사람의 흠이나 결점을 찾아내서 정죄하기에 바쁜 게 아닙니까? 남들에게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럽니다. 그러니 아주 편협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언제나 틀린 것으로 매도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데서 오는 고통을 예수님이 주시는 것,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받는 것, 예수를 위해 마땅히 져야 하는 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찌 우리에게 먼저 그런 짐을 지운단 말입니까? 오히려 정 반대로 우리를 그런 짐에서 해방시키려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라는 제도와 체제가 지워준 짐과 스스로 만들어 낸 짐까지 지고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입니다. 거미줄처럼 우리를 얽고 죄여오는 죄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회개를 하고 기도를 한다 해도 말입니다. 먼저 죄 의식을 뛰어넘고, 그 무거운 짐에서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과 더불어 예수님은 비로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짐을 벗고 진정으로 쉴 수 있을 때,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처음으로 느낀 그 해방의 경험과 진정한 쉼은 한 번 느끼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계속되고 전파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쁘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꺼이 메고 싶은 멍에이고 지고 싶은 짐이었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공동체를 이루되 구성원들을 죄의식으로 포위하지 않는 것, 진정한 자유의 기쁨으로 살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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