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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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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情
마23:37
2010.2.14
[情]은 군인들이 좋아 한다는 간식용 과자의 이름입니다. 그동안 저는 개인적으로는 너무 달아서 잘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달콤한 게 입에서 당기면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과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情]이라는 단어의 뜻이 예수님의 정체성과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구정 명절이라서 들고났던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 아닙니까? 그 회집의 구심력이 바로 [情]인 것입니다. 가족 간의 [情]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情]은 보편적으로 [母情]즉 어머니의 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이 왜 없겠습니까 만은, [夫情]은 아예 그 단어조차 상용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정과는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보고 탄식하면서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은 것에 비유를 합니다. 조금 뜻밖이지 않습니까? 가부장적인 그리스도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하는 식으로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둔 한 인간의 가장 진지한 자기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구약성서에도 나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 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신32:11-12).
"새가 그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만군의 주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사31:5).
이 구절들을 앞의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면, 암탉 대신에 독수리나 새를 비유한 것 말고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상은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새와 같은, 모성적인, 어머니와 같은 상이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좀 낯선 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아버지 하나님 상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더 친근한 표현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했습니다(막14:36). 이 호칭은 우리말로 '아빠'를 뜻합니다. 그러니 이 '아빠'라는 호칭은 가부장적인 의미의 '아버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친근한 아버지로서의 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아버지가 곧 신이라고 여기던 당시의 가부장제도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인간에 불과한 아버지의 권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10:37)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아버지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모성적인 하나님 상을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해석 하였습니다. 본문으로 읽은 '암탉'은 '새'라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에서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새의 일에 비유한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는 자신의 일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활동을 독수리의 웅장한 날갯짓에 비유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해 온 그 많은 일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의 삶은, 그가 한 일은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기억이 납니다. 봄에 어미닭이 알을 부화해서 수 십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종종거리며 들판을 다니면 독수리나 매가 병아리를 채 가려고 하늘을 빙빙 돕니다. 그러면 긴급하게 소리를 질러 어미의 품안으로 그 많은 병아리들을 모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는가 하면, 양지쪽 흙더미를 뒷발질로 파 헤쳐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찾아 주던 모습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병아리를 품고 있는 어미닭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닭의 강함은 병아리들을 위할 때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존재임을 그의 생애 마지막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면면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신이며, 교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무슨 죄를 졌는지 잘 모르는, 죄인으로 불리는 어떤 여인은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집 주인의 냉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눅7:37). 집 주인인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도 난처하기 그지없고, 기분 나쁜 행동인 것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이런 행동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도 되지 않은 행동을 해도 받아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필요한 용돈을 받기 위해 어머니에게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 내밀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주머니보다 어머니의 정을 더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어머니가 고분고분 내 기분이 상하지 않게 그렇게 용돈을 내 주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래도 어머니가 나를 잘 받아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낯선 행동을 하는 여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딱히 예수님과 그녀는 특별한 관계였던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받아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함께라면 사는 맛이 나고, 속에 있는 것조차 다 털어 놓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심판하고, 꾸짖고, 따져대는 그런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병아리를 품는 암탉의 날개 속 같은, 그런 품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면을 딱 꼬집어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요? 흔히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작은 느낌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정은 그런 것입니다. 그는 꼭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보다는 누가 더 소외되거나 상처를 받지 않는지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합리적이거나 이해 타산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인 끈끈함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한 번 주면 정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밥이 얼마만큼, 몇 그램을 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 술이라도 더 주려는 마음,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여인이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그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 한 적이 있습니다(막12:43). 다들 넉넉한 가운데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 모든 것을 털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고드란트는 요즘 돈으로 5원 정도의 액수입니다. 우리도 아마 5원을 헌금 통에 넣으려면 무척 망설이게 될 것이고, 주위를 둘러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는 것도 바로 그 [情]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마음 씀' 말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하는 헌금의 정신이며 태도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느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여자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걸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도 된다고, 합리적인 이유로 그 여인을 비난했습니다(막14:5). 이것은 노동자 일 년 치 연봉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아름다운 일이다'고 하십니다. 겉으로는 '장례' 운운 하지만 속내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짚고 있는 것은 그 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음보다 크고 귀한 것은 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인을 배려하는 그 정 깊음이 이야기 전체에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이나, 삶 어디에도 강하고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서 남을 지배하고 훈계하는, 까다롭고도 엄한 아버지 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요즘 시중에 '성공한 CEO 예수'라든지, '경영자 예수'같은 도서들이 나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한낱 상술에 해당하는 것이지 본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처럼, 작은 일도 세심하게 배려하며, 늘 감싸주고, 편들어 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열고 다가가 가슴 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 놓게 하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정이 참 많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암탉이 병아리를 몰고 다니다가 목이 마르면 물가로 갑니다. 그러고는 암탉이 먼저 물을 한 모금 머금고는 머리를 하늘로 쳐들죠. 그러면 그 노랗고 까만 병아리들이 어미를 따라 새싹 같은 부리로 물을 쪼아 머리를 하늘로 쳐들곤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갔을 때, '물 한 모금 입에 물고....하늘 한 번 쳐다보고'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치 내가 병아리가 되어 어미를 조롱조롱 따라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어미닭을 따라다니며 물을 먹고 모이를 쪼아 먹는 저 병아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습니다. 때론 양지쪽에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품고 졸고 있는 모습에서도 무한한 행복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저렇게 행복하고 따뜻한 품과 장면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그런 암탉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보다도 [정]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계셨더라면 [사랑]보다는 [정]이라는 말이나 비유를 하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 기독교 신앙관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정 나누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워가야 할 교회도 이것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 보호하고 키우듯, 그 품속에서 신뢰와 행복이 싹트듯, 무한한 정을 통해 이루는 기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족 또한 [情]으로 이루어진 생명 공동체 아닙니까? 혈연을 넘어 그리스도이름으로 하나 된 신성 가족인 [교회]또한 [情]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걸 확인하는 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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