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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97 추천 수 0 2012.05.18 18: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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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18-31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성암교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
고전1:18-31

2010.3.7

    *2월 한 달을 [교회]에 맞춰 설교하다보니 길어졌습니다.
     두 주로 나눠 할까, 점심을 먹고 계속 이어서 할까는 기도중입니다.
     아마, 점심먹고 이어서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성서 또는 예수님의 '말씀'은 싫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현의 훌륭한 가르침이니까요. 그러나 말을 바꿔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 사정은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에 나온 그대로라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은 전자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를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했지요(18절). 그러니 뭡니까? 사람이 구원을 받는지 안 받는지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다른 것으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십자가의 말씀 앞에 있느냐 없느냐' 만을 따집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은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잘난 사람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두고 바울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20)이라고 하며, '이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된 일'이라고 풍자적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21).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지혜 곧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지혜'를 '멸망할 자들은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와 나란히 두고,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지혜'를 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2:8). 그러니까 '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뜻이죠.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도저히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구원사건이라고 선포하는 바울의 '십자가의 말씀'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선포'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21). 실제로 그가 했던 '십자가의 예수'선포가 어리석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 있다는 자들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죠. '어리석은 선포'라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 세상의 형편에 따라 뜻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좋도록 적당히 적용하거나 변경시키지 않고, 그들이 그것을 어리석음이나 미련함으로 여길 정도로 진실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말씀'으로만 복음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2-24).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한다'는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23). 그는 이러한 선포를 유대 사람이 표적을 구하는 것과 그리스 사람이 지혜를 찾는 것과 대조를 시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 사람의 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여서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막8:11).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유대사람의 특징은 그런 게 아닙니다. 또 바울은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로 특정한 민족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같은 문장에서 '그리스 사람'을 '이방 사람'과 동의어로 쓰는 것을 보아 그렇습니다(23-24).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의 본심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 사람과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로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지칭하려는 게 아니라, 그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특징적으로 말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 밖에서 바울을 헐뜯고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것을 전하려고 하는, 이른바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 안에서 물의를 일으킨 이른바 열광주의자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 예수를 직접 따라다닌 제자가 아니라는 것들을 들어서 바울의 사도자격이 없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고전9:1)하고 항변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말하기를, 진정한 사도라면 기적과 기사로 '사도된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마지못해 자기가 본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서(12:1), 자신도 표적과 기사와 기적으로 사도의 표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12:12).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추천장이 없다(3:1), 육정을 따라 처신한다(10:2), 말주변이 없다(10:10), 정해진 금 밖으로 나가 선교를 한다(10:13-14), 간교한 속임수로 교인들을 사로잡는다(12:6)고 하면서 바울을 모함합니다.
  
이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요 거리낌이었습니다(23). '거리낌'이란 곧 '걸림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없으면 잘 갈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유대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신21:23, 갈3:13). 그런 그들의 상식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것은 있을 수 있어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걸려 넘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적대자들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는 자들'(고후11:13),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2:17), '빛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11:14-15)등으로 부르면서 맹렬히 공격합니다.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은 보복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 시키면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1:4).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그 자신이나, 예수를 적대시하는 세력보다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십자가의 말씀'이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복음으로 위장하는 자들, 곧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장 경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의 적대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을 선동하여 할례 받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으로 삼으려고 할 때, 그것은 그가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1:6). 바울은 실제로 다른 복음은 없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 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1:7). 그리그 그가 누구든지, 비록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두 번이나 거듭해서 말합니다(1:8-9). 복음을 왜곡 시키는 것이 바울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그러면 바울이 그토록 서슬이 시퍼렇게 경계하는 '다른 복음'이란 뭡니까? 그걸 알면 바울이 목숨을 걸고 주장하는 참 '복음'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내용입니다. 복음이 뭐냐,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 어떤 표적을 행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걸림돌로 여긴다면 그들은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헬레니즘적인 성령 이해에 빠져서 교회 안에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헬레니즘'적인 성령이해라는 게 뭐냐? 성령을, 성도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신령한 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신령한 사람으로 믿으면서, 신령한 것에 참여하는데 몰두하여 현실의 삶을 가치 없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하기를 '몸은 음행을 위해 있다' '음식도 몸을 위해 있으니 뭐든지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기도할 때 외에는 떨어지지 말라고(7:1-7)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과 같이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을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주 지적이고 그리고 개인주의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이 있다'(8:1)는 말이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슨 일이든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거리낌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에게 절한 고기를 잘난 척 하면서 먹었습니다.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바울은 지적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약한 사람들'을 망하게 하고, 형제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8:9-12)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개인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의 은사처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 들 만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방언은 덕이 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잘난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14장에서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 예언을 하라고 하느냐? 그것은 남에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12:28). 그리고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각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잘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12:7). 그들은, 이미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하고 있으며,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에서, 종말적인 소망도, 죽은 자의 부활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15:12).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이고도 관념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헬레니즘적 사고의 특성입니다. 헬레니즘적 사고에서는, 성령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이러한 성령 이해는 2세기 들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선교 목적이 바로 이 성령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그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은 구원 자체가 되며, 예수는 영적인 것을 나누어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안에 있었던 문제의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지식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성령'을 개인 소유화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령한 지식으로 인간을 천상의 세계로 이끄는 구세주를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단지 그들의 신비한 지식과, 자유, 방종, 지적 교만을 만족시켜주는 어떤 원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행동이나 삶을 살지 않아도, 신령한 지식 또는 지혜를 소유하기만 하면 천상에서 구세주와 합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현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의미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어리석다'고 했던 것입니다(23).

  
  
바울이 이런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근거는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신비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도, 아무리 큰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내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어리석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는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사람이나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은 분명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입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상을 섬기고 있다는 점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유별난 존재로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이 세상' 또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나란히 둠으로써 이러한 자들이 이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1:21, 2:6).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전하려고 했을 때, 두려워하고, 떨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했다는 증언은 이런 점에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2:1-5).

적어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야 맞습니다. 여러 추측 가능한, 해석한 가능한 '어떤 예수'를 믿는 것은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믿음일 뿐입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울은 그들을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1:24).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구분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람을 구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로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만 이 세상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교회'의 어원입니다(1:1, 24-26).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단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자, 이제 본문 26-28의 말씀을 찬찬히 읽어 읽어봅시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결론을 갖게 됩니다. 깨달음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시작할 당시에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밝히고 있지요(26). 그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들을 '멸시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냥 '것'입니다. 물건입니다. 그 단어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사물을 나타내는 중성복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교회의 주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그들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내셨다'고 밖에는 달리 말 할 게 없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와 같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뭔 뜻이 있었기에 그런 사람들이 뽑혀 교회를 이뤘던 것일까요? 27-28에 보면, 세상의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 한 것,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신 것은, 그토록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그들을 통하여 잘난 사람들을 없애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차별지우며 사는 세상의 법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일이었으며,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그 역할에서 뿐만 아니라, 신분에서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세상과는 다른 신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이룩된 구원의 현실이었습니다. 사람을 가진 것과, 배운 것과, 출신을 따라 차별하고 무시하는 이 세상과는 달리 오히려 세상을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가장 결정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이해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그 법,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만들어진 그 '십자가의 법'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울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 조금 더 확장 해석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기 어려운 세상의 관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부르심을 입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인간 일반의 내면적인 속죄를 위한 어떤 사건으로만 한정짓고 추상화 시켜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사건에서, 인간 일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격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것들, 사람 취급도 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여 믿고, 우리도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늘 '십자가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출신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세상 기준에 따라서 넌지시 갈라놓고, 그런 기준 앞에다가 '십자가의 말씀'을 적당히 적용시키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왜곡하는 다른 복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유대 사람이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더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교회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그저 추상적인 속죄론의 의미로 간소화해버리고, 표적과 기적을 경험하거나 일으키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인양 여긴다면, 그것은 '다름 복음'으로 가는 중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성령의 은사를 수단화해서 특정 기도원이나 특정 부흥사한테 가야만 이런저런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믿음의 증표인양 하고, 구원받은 증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십자가의 복음'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교회가, 교우들이, 그것도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교회가, 칭찬이 자자한 그리스도인이 더 앞장서서 저지르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와 기적,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따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적인 욕심에서 구할 어떤 대상이 아닙니다.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이 오늘날에도 교회에 있습니다. 복음을 자꾸만 현실의 삶으로부터 유리시켜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내세적, 천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쏟게 하고 현실의 문제에 소극적이게 하거나 무책임하게 하는 것, 또한 역사의식을 갖고 살지 않게 하는 것은, 현대판 영지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는 사람을 개인주의로 만들거나 관념론적인 내세주의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자 지혜이므로, 이 세상 속에서, 용기 있게 살고,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서 사는 것은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심령적인 게 아닙니다. 내면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 곧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불러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나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자격도 없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어 신분이 달라진 것처럼, 나도 이 세상을 변화 시키고 사랑하는 일에 참여하며 사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고, 거룩하다 여김을 받는 것이 곧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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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5 마태복음 경배하는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마2:1-12  김남준 목사  2012-05-20 2795
6854 이사야 교회, 그 평화를 누리는 곳 사66:10-14  김남준 목사  2012-05-20 2191
6853 호세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호2:5-7  김남준 목사  2012-05-20 2349
6852 히브리서 인내로 얻는 영혼 히12:1-3  한태완 목사  2012-05-19 3029
6851 요한계시 지옥은 있습니다. [1] 계20:15  한태완 목사  2012-05-19 3091
» 고린도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 고전1:18-31  허태수 목사  2012-05-18 2397
6849 고린도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 고전12:12-27  허태수 목사  2012-05-18 3137
6848 마태복음 마23:37  허태수 목사  2012-05-18 2052
6847 마가복음 봄바람 같은 예수 막2:18-22  허태수 목사  2012-05-18 1889
6846 마태복음 이게, 오늘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마11:28-30  허태수 목사  2012-05-18 2252
6845 마태복음 진정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가? 마16:15-16  박신 목사  2012-05-17 2172
6844 마태복음 믿음을 키우는 유일한 비결 마14:28-31  박신 목사  2012-05-17 2517
6843 마태복음 바보 같은 신자들 마13:44-46  박신 목사  2012-05-17 2303
6842 창세기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창2:4-7  김동호 목사  2012-05-1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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