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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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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6.8.28 http://www.nosuchjesus.com |
예수가 왕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역사가 토마스 리브스는 ‘텅 빈 교회’라는 저서에서 현재의 기독교는 ‘소비자 기독교 (Consumer Christianity)’로 전락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현대 미국의 기독교는 수월하고 낙관적이며 편리하고 모순이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희생이나 훈련, 겸손, 내세를 보는 눈, 영혼을 위한 열정,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죄책감은 거의 없고 형벌도 없으면서 하늘나라에서 보상 받는 것만 실제로 확실하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것을 ‘소비자 기독교 신앙’이라고 부르면 제일 좋을 것이다. 값은 싸면서 소비자 만족은 보증되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작금의 미국 교회의 정확한 실정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이 가져다주는 보상만 선전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Can Do Spirit”(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신)을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단어만 적당히 첨가 또는 포장해 놓았을 따름입니다. 어떤 평신도가 미국 최대교회의 목사 죠엘 오스틴이 지은 “긍정의 힘”이라는 최근의 베스트셀러를 두고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법은 없으며 예수님의 복음이 그렇게 값싼 것도 아니다”라고 평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리브스의 책 제목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미국만큼 대형 교회(Mega Church)들이 많은 나라는 한국 빼고는 없습니다. 예의 오스틴 목사의 교회도 텍사스의 휴스턴 프로 농구팀 체육관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주일마다 그 많은 좌석이 완전히 미워집니다. “텅 빈 교회”가 아니라 “꽉 찬 교회”입니다. 저자는 틀림없이 겉으로는 꽉 찬 교회이지만 복음은 들을 수 없고 제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교인도 드물다는 의미로 말했을 것입니다.
소비자 철학의 첫째 원칙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구하는 경제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교회 안에 참여시키려는 부담을 주거나 강요하는 기분을 주는 것은 절대 금기입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면 복과 은혜가 덩굴처럼 굴러 들어온다고 보장하는 교회만 성장합니다. 목사들은 만능 탤런트 내지 쇼맨이 된지 오래입니다.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은커녕 그런 인식조차 없습니다. 인생살이의 처세술 내지는 손상된 감정의 치유책만 배우러 옵니다.
소비자 원칙의 더 근본적인 뜻은 뭣입니까? “소비자가 왕”입니다. 모든 선택권은 소비자만 가지며 또 왕처럼 대접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싫은 것은 거부할 수 있고 또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반품하고 다른 가게에서 사면 그만입니다. 교회 안에 머리되시는 예수님과 실제 사역을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은 눈을 닦고 찾아볼래야 없습니다. 신자들의 요구와 구색에 맞추어주지 않으면 바로 발을 끊어버립니다. 교인도 문제지만 일부러 그렇게 유도하는 목회자와 교회는 더 문제입니다.
신자가 주도권을 지고 그것도 경제 원칙대로 신앙을 조절하는 법은 기독교에선 절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경제 원칙으로는 도저히 설명조차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전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 지금껏 인간에게 베푸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경제원칙과는 정반대로 인간을 다루셨습니다. 당신의 최대한도 아니 전부를 주셨는데도 인간에게선 최소한 아니 아무 것도 되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은 소비자 원칙이 아니라 십자가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부터 벌써 다릅니다.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도 이 말씀을 단지 자신의 추한 욕망이나 죄성을 억제하여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치웁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 자기 죄를 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전부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것을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은 후에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실제로 올라가야 합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에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갔듯이 말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부인해야 합니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나 소망까지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 살펴서 그렇지 못하면 없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는 것 딱 하나만 빼고 다른 모든 것은 다 버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소명을 이뤄나가는 데에도 자기의 긍정적 의지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일에 긍정적,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올바르고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향해서는 적극적이 됩니다. 그분의 소명을 정말 이루고 싶고 또 그 소명을 이뤄나가기 위해 그분께만 의탁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적극적 열정적으로 변화됩니다.
신앙의 절대적인 원칙은 “예수님이 왕이다”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또 우리 입술로 수도 없이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실제 신앙에선 자꾸 자기가 왕이 되려 합니다. 내 속의 추한 욕망과 죄성을 죽이는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거나, 틀어지거나, 약해졌을 때에 생기는 결과적 현상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가 왕이 되는 부분이 약해지고 자기가 왕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소명과는 다른 세상을 향한 자기의 욕심과 계획이 앞장서게 되고 또 그것을 꼭 이루려고 하니까 도덕적 죄를 범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도덕적 죄를 억제하는 것뿐이라면 마치 잡초의 뿌리는 그대로 두고 그 잎만 잘라낸 것과 같습니다. 잡초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랍니다. 오히려 잎만 자르면 번식력이 더 왕성해집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신자의 속에 남은 자기를 긍정하는 힘입니다. 자기는 부정하되 예수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긍정이라는 것도 단순히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세상의 어떤 것도 내 앞을 가로 막을 수는 없어”라고 자꾸 긍정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독단적인 판단과 분석으로 무엇이든지 하려는 모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를 긍정하여서 자신의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선행과 구제로 자기 죄를 갚거나 감추어 보려는 노력과 종교적인 회개행위로 그 죄를 조금이라도 감해 보려는 것도 자기 긍정입니다. 신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완전히 발가벗겨 내어 드리는 일 말고는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나아가 기도하거나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등 종교적 형식은 갖추었더라도 자기 영향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고치고 변화시켜 보려는 시도도 자기 긍정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신자가 정말 성령님이 역사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으면 자기 긍정 쪽으로 너무나 손쉽게 흘러버립니다.
반면에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해서 신자가 꼭 현실적으로 고생스런 일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아가 앞서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편견, 선입관을 내세우고 자존심, 체면, 위신, 의를 생각하고, 나아가 지성, 교양, 매너, 도덕성, 종교성, 심지어 영성으로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들을 죽여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관계나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방해되는 자기 속에 남아 있는 모든 것과 세상적으로 묶인 것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를 따르는 동작을 “따라오려거든”과 “좇을”의 두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틀린 두 단어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따라오려거든”은 단순히 그냥 가는 것이지만, “좇을”은 분명하게 “같은 길에 있다”는 것과 “제자로서 따르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누구라도 예수를 따르고 싶을 수 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은 길에 있지 않고 다른 길로 가고 있기에 그분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인들마다 말로는 또는 생각으로는 예수를 따르려고 하지만 예수를 따르려면 오직 골고다 언덕의 외길을 가고 있어야만 합니다. 소비자 원칙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만이 나의 왕이다”라는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 후, 전존재와 인생과 생명을 바치고 주위의 모든 핍박과 멸시를 감수하면서 현실에서 궁핍에 빠지든 풍요에 처하든 절대로 그 원칙이 바뀌지 않은 것만이 예수를 좇는 것입니다.
소비자 원칙의 신앙을 아주 쉽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 뭔가 손해 본 것 같고 지금도 하나님에게 그런 비슷한 마음이 들면 아직도 그 원칙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를 긍정 내지 인정하고 있어서 십자가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과 다른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반대는 당연히 내가 예수를 믿어 진짜로 왕창 수지맞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 드릴 것은 찬양과 경배뿐이며 받을 것은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에 쓰임 받는 것 말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과부가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는 것 같은 고행과 수련을 하는 것을 두고 자기 부인이라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기독교 신앙과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나아가 스스로 자기의 의를 증명해 보이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비자 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짜로 예수가 왕입니까? 혹시 말로만 그러면서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현재 가고 있는 길이 골고다 언덕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뿐입니다.
8/28/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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