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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은 사람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531 추천 수 0 2012.06.01 12: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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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2:10-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3.14 주일설교 
성령을 받은 사람
고전 2:10-16

오늘 아침 신문에 광고지 하나가 끼어 들어왔습니다. 새로 생긴 기도원에서 부흥 집회를 알리는 전단지였습니다. 대부분 광고지는 잘 읽지 않고 그대로 신문지 보관함에 넣었는데, 오늘은 어쩌자고 그게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바람에 자세히 그 내용을 읽었습니다. 광고지의 내용은, "성령의 폭포수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집회"였습니다. 뭐 새삼스러운 글귀는 아니죠?  부흥회라든지, 신유집회 광고 같은 데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낯익은 문구죠. 그런데 목사인 나도 그 문구를 보면 '성령이라는 게 많은 사람이 나눠서 마실 수 있는 무슨 약수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령 충만'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충만'이란 가득 채우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성령을 가득 채우려면 어떤 방법 같은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러면 그런 방법을 그들은 알고 있는데 나는 모르고 있다는 염려도 일어나곤 합니다. 물론 잠시지만요.
  
성서에도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그렇게 하는데, 그도 '성령이 채워진다' '성령을 부어준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누가의 이런 기록 언어들은 그 당시의 용어로 '성령의 활동을 표현'하려는 것이지, 성령이 어떤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대신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서만의 특수한 표현입니다. 이걸 신약성서 전체에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이 시대에도 보편타당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시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은 공기나 물처럼 어떤 용기에 가득 채우고 흘러넘치게 할 수 있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 속에 채워지고, 반대로 방심한다고 해서 우리 속에서 슬며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무슨 수련 센타에서 하는 '기'같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처럼, 성령을 마치 기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는 의미의 영 이해는 고대 그리스 종교와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영(靈)은 우주의 기(氣), 혹은 물질의 원소적인 본질로서의 영기(靈氣)같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를 가지고 치료도 하고 여러 가지에 이용을 하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영(靈)을 그렇게 이해하고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런 영을 받은 사람은 어떤 신비한 지혜나 건강을 얻으며, 음악의 영감이나 병 고치는 능력이나 특별한 재능을 얻기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영(靈)은 많이 가질수록 좋은 것이고, 많이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보다 더 신령한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영을 이용하여 각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데, 이를테면, 당시의 의사, 마술사, 철학자, 신전의 무당, 신전 예언자등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이 충만하여 신령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영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른바 '영의 전문가'집단 들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을 받긴 받았지만 더 많이 받으려고 '영의 전문가'들에게 자신을 맡겨야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령한 부흥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요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종교적인 처신중의 하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속적인 영의 이해가 오래된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은 않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광고지 문구처럼 성령을 더 많이 또는 가득 '받아야'한다고 믿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가르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 '성령 충만'집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게으른 신앙인'이거나 '나쁜 기독교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구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그게 이 세상에서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것을 구하는 욕심과 구별이 어렵다는 자기 함정에도 빠집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령을 받은 표시가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은 상태도 어떤 차이가 있어서 더욱 신령한 사람이 있고 덜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나 은사를 받는데도 전문가가 있어서 그들의 도움을 받거나 그들을 통해 성령이나 은사를 쉽게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옳은 것일까요?

성령은 '받거나' 아니면 '받지 못하거나' 이지, 많이 받거나 적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을 잴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얻는 은사(선물)는 그야말로 성령이 자유로이 주는 선물이지, 우리가 욕심을 내서 구하고 성취하여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신적 존재가 공간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사람의 몸속에 들어 왔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무속인들이 그들의 몸속으로 '이순신 신'이든지, '최영 장군 신'이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 몸속에 스며들 수 있는 어떤 영적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바울처럼 명쾌하게 설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우선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12). 그가 말하는 '세상의 영'이란 뭐겠어요? 당시에 횡행하던 그리스적인 영 이해가 아니었겠어요? 우리나라의 무속인들 속에 들어오고 나가는 그 어떤 영의 실체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영의 임재에 따라서 '더 세고' '조금은 약한'그런 우열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미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영'즉 '성령'을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세상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세상의 영'이 무엇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판이하게 사는 두 부류의 사람, 곧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을 대조합니다. 이 두부류의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지혜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1:23-24).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지혜와 관련하여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혜는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지혜가 있으면 여러모로 삶에 유익이 있다는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많을수록 더 좋은 지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그는 서로 대립하는 두 지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솔로몬의 지혜는 단순히 '재판을 잘하는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슬기로움, 사리에 밝게 또는 현명하게 처세함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지혜'들을 송두리째 부정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1:20).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는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요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령한 사람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특별한 것을 듣거나 본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런 무지랭이들로 교회를 시작했느냐? 이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일부러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는 것들을 택하셨다(1:26-27)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바울은 이렇게까지 이 세상의 지혜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는 누구나 추구하면 좋은 미덕으로서의 지혜를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는다'는 그의 말에서, '그리스 사람의 지혜'는 곧 이 세상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들의 지혜는 '더 많이' 또는 '더 세'지는 그 무엇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을 자기에게 유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갖추면 좋은 분별력이 아닙니다. 그들의 지혜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어리석음'으로 여깁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처럼 사는 것을 경멸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지혜는 이 세상을 남보다 잘나게 사는 처세술입니다. 그들은 자칭 지혜로운 자들이고, 많이 배운 자들이고,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지혜는, 멸망 할 자들인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지혜와 같다'고 말입니다(2:6).  

이 천 년 전의 사람들이 추구하던 지혜는 오늘날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의 정치계와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혜롭게 사고하고 말하고 처신하는 법을 배우려고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갖춘 지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된 다음부터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고상하게 여기고, 세상이 부러워하고 따라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덕을 끼치는 고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임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다스릴만한 고상한 지혜를 갖춘 사람들로 행세했지만, 사실 그런 지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오직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구하는 탐욕과 처세의 포장술이었습니다. 차이가 나는 사람을 차별하고 깔아뭉개는 사회적 장치였습니다. 누구나 갖추어야 할 지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욕망이나 욕심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 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는 자들과,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처럼 자기의 영달을 포기하며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어리석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만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자를 '이 세상의 지혜를 아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후자를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도를 해서 닦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10).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12:3). 성령을 받지 않고는 세상이 싫어하는 그 '어리석은 예수'를 믿거나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솔로몬의 부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시이저의 권력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갈릴리의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하다가, 정치 종교 권력자들의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를 따라 사는 일이 어찌 성령을 받지 않고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의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어리석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함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세상에서 '어리석게' 살고 있느냐 아니냐입니다. 이것 외에는 멸망할 '세상의 영'이며 '세상의 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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