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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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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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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4.4. 주일설교 |
불의한 청지기 & 예수의 부활
눅16:1-9
어떤 부자가 자기의 재산과 일을 직원 한 사람에게 모두 맡겨서 관리하게 했습니다. 성서는 그를 '청지기'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그를 '직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주인의 재산을 축낸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당장 그만 둘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직원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지자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몰래 만나서 그들이 주인에게 진 빚을 깎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그가 '해직'이 되더라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를 돌보아 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뇌물이고, 공문서 위조에다가 직권남용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칭찬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이 그 불의한 직원의 행위를 칭찬하였다."(8).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끼쳤기 때문에 내 보내려던 직원이 다시 의도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냈는데도, 주인은 직원을 감옥에 쳐 넣은 게 아니라 반대로 칭찬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무엇을 말 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설교가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궁리들을 했습니다.
어떤 설교가는 주인이 칭찬한 것은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주인은 그를 해고하려고 했습니다.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 주인이 더 많은 재산을 탕진한 직원의 행동을 칭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어떤 설교가는 이 나쁜 직원이 깎아준 돈들은 원금이 아니라 이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이자 받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그 주인은 그때까지 이런 율법을 어기고서 비싼 이자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불법 이자를 탕감해 줌으로 주인에게 돌아갈 욕을 면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걸 뒤 늦게 알고 그를 칭찬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주인이 그런 위인이라면 원금 못지않게 이자에도 애착을 갖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 주인이 돌변하여 잘했다고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가는 그 이자가 주인의 몫이 아니라 본래부터 직원의 몫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원금을 내어주고 직원은 그 이자로만 사는, 이자를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직원의 연봉이 달라지는 그런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원은 왜 주인 몰래 빚진 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런 결단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해석들은 이 비유가 갖고 있는 파격적인 이해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는 파격성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8절에 나오는 [주인]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래 성서에는 [큐리오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것을 '주인'즉 'master' 라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Lord]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단어를 '주인'으로 읽지 않고 '주님'으로 읽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즉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7절에서 끝납니다. 이것을 연극으로 표현하면 1~7절까지는 제1막입니다. 여러분이 연극이나 드라마를 볼 때 1편이나, 1막이 끝나고 제2막이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막의 등장인물은 누구입니까? 부자, 직원(청지기), 빚쟁이1, 빚쟁이2입니다. 이들은 7절이 끝나면서 모두 퇴장해 버린 것입니다. 8절에서 다시 2막이 올랐을 때는 등장인물이 바뀌었습니다. 1막에서 퇴장한 '주인'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해설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주님'입니다. 해설자가(주님) 비유를 하나 말하고서는 바로 그 비유 속에 등장하는 직원(청지기)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직원이 불법으로 빚을 탕감해 주고 난 다음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그가 꾀를 짜내어 그렇게 했다면 금 새 들통이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서야 어떤 처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뒤이어서 나오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주님은 범죄자를 칭찬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요?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8).
'슬기롭다'라는 말은 '현명하다'는 뜻도 있지만, '약삭빠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직원은 위기의 상황에 약삭빠르게 대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 직원의 약삭빠른 처신을 배우라는 것인가요? 나아가서, 실정법을 어겨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살 궁리를 하라든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 주는 데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는 것인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면 이 직원에게 '슬기롭게 처신했다'고 칭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이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를 알려면, 이 청지기와는 정 반대로 살았던 '어리석은 부자'(12:13-20)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이미 은혜를 받았지요? 어리석은 부자는, 그저 소출을 더 끌어 모을 궁리, 곳간을 넓히고 더 많은 곡식과 물건을 쌓아 놓을 궁리만 하면서,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먹고 마시자"했지요? 하나님은 그 때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하고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자, 이 부자와 나쁜 직원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 부자는 세상의 법으로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법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원(청지기)은 세상의 법을 어긴 범법자입니다. 부자는 감옥에 갈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원은 감옥에 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세상의 법과는 달리,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될 부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을 하고, 정작 세상의 잣대로는 감옥에 가야 할 직원에게는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왜 이렇게 되었나요? 예수님이 이렇게 부자와 직원을 세상의 눈과 법과는 상반되게 심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세상의 법이나 이치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자기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또는 종말적인 관점에서 심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잣대와 달랐던 것입니다. 부자는 세상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면서 그 많은 재산을 모으고, 늘려서, 창고에 가득 쌓아 두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종말과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종말 의식이 없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끝을 생각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산이 자기를 지켜 줄 줄 아는 것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직원은 실정법은 어기고 있지만, 이제 곧 자신이 누리던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 위기가 발생했고, 그래서 세상과 다르고 부자와 다른 방식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덜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법으로는 불법이지만, 하나님의 법 즉 종말적인 관점에서는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법을 넘어 '종말의 법'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청지기는 그것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모든 인생들이 과연 '종말의 법을 갖고 사는가'하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 누가 나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세상의 이분법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가! 그렇다면 너의 삶은 지금 어떤가?'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자와 청지기를 통하여 '종말의 삶'을 비유로 끝낸 예수님이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9).
여기서 '불의하다'는 말은 '나쁜 방법'이나 '부정하게 얻은'이라는 의미보다는 '세상의'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살 때'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은 종말에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 세상 재물에 자기의 영혼까지 담보하려고 하지 말고, 그 재물로 '영원한 처소'가 될 친구, 사람을 사귀라고 합니다.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다시 '불의한 청지기'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그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빚진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가를 알면, 그 청지기의 그러한 행동이 어찌하여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친구를 사귀는 일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빚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기름 백 말을, 다른 한 사람은 밀 백 섬을 빚졌다는 것입니다(6-7). 기름 백 말은 약 1천 데나리온이고, 밀 백 섬은 약 2천 5백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라고 했으니, 이 사람들이 진 기름 백말은 3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것이고, 또 한 사람이 졌다는 밀 백 섬은 7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이들이 진 빚은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진 빚입니다. 부자들은 춘궁기에 장려 쌀을 주고 최고 16배로 되돌려 받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위해 쌀을 얻어다 먹는 순간 이미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부자는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의 주체였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는 어떻습니까? 그가 한 짓이 세상 법으로는 위법이지만 그는 왜곡된 삶의 구조를 깨뜨리는, 그래서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청지기가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종말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그런 종말 의식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종말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독교인을 가름하는 기준이라면, 내게 과연 종말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걸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불의한 재물)로 부자처럼 인색하게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고, 비록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나쁜(어리석은)사람 이지만 종말을 기억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이 사람의 생활 방식이 종말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나쁜)청지기는 누구를 닮았는가 하면, 어리석게도 만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감히 이 바보 같은 또는 나쁜 청지기를 오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부활 즉, 영원한 삶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혹은 나쁜 청지기의 '영원한 처소'와는 어떻게 다르거나 같은 것일까요? 불의(어리석은)한 재물로 얻게 된 '영원한 처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니 청지기가 쫓겨났을 때 맞아 들일 집이라고 하면 좋겠지만, 본래 이 비유 자체가 그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해석하기엔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집을 '영원한 처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처소'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종말의 의식으로 사는 현실의 삶이 어때야 하는 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이 그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을 때, 그 일을 집행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3인칭 복수인 '그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것들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심판은 '사회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이 세상 친구들'이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는 천사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삶이 가장 종말론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대의 유대인의 종말론, 심판 론과 상이했던 예수님의 종말과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삶속에서 이러한 위기의식과 종말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종말과 심판이라는 게 일상생활과는 따로 떨어져 있어서, 어느 날 특별한 방식으로 종말도 시작되고 심판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종말도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고, 심판도 현재의 삶이 곧 심판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서 영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바로 이 비유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삶을 통해 이미 '영원한 처소'를 획득했던 것입니다. 죽기 이전에는 영원하지 않았던 분이, 죽고 난 다음에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처소'를 획득한 게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용서하며 사는 그 삶을 통해 이미 예수님은 '영원한 처소'로 인도 된 존재였던 것입니다.
불의한 제자가 삶에서 종말과 심판, 영원한 처소를 획득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이전의 그 자신의 따뜻한 삶을 통해 종말, 심판, 영원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 부활의 아침에, 믿는 거 따로, 사는 거 따로 나누어서 특별한 때에 특별한 방식으로 심판과 부활을 기다리지 말고, 내 삶에서 '현재의 심판'과 '영원한 처소'를 도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 심판, 영생인 것입니다.
눅16:1-9
어떤 부자가 자기의 재산과 일을 직원 한 사람에게 모두 맡겨서 관리하게 했습니다. 성서는 그를 '청지기'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그를 '직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주인의 재산을 축낸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당장 그만 둘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직원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지자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몰래 만나서 그들이 주인에게 진 빚을 깎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그가 '해직'이 되더라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를 돌보아 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뇌물이고, 공문서 위조에다가 직권남용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칭찬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이 그 불의한 직원의 행위를 칭찬하였다."(8).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끼쳤기 때문에 내 보내려던 직원이 다시 의도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냈는데도, 주인은 직원을 감옥에 쳐 넣은 게 아니라 반대로 칭찬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무엇을 말 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설교가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궁리들을 했습니다.
어떤 설교가는 주인이 칭찬한 것은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주인은 그를 해고하려고 했습니다.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 주인이 더 많은 재산을 탕진한 직원의 행동을 칭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어떤 설교가는 이 나쁜 직원이 깎아준 돈들은 원금이 아니라 이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이자 받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그 주인은 그때까지 이런 율법을 어기고서 비싼 이자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불법 이자를 탕감해 줌으로 주인에게 돌아갈 욕을 면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걸 뒤 늦게 알고 그를 칭찬을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주인이 그런 위인이라면 원금 못지않게 이자에도 애착을 갖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 주인이 돌변하여 잘했다고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가는 그 이자가 주인의 몫이 아니라 본래부터 직원의 몫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원금을 내어주고 직원은 그 이자로만 사는, 이자를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직원의 연봉이 달라지는 그런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원은 왜 주인 몰래 빚진 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런 결단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해석들은 이 비유가 갖고 있는 파격적인 이해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는 파격성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8절에 나오는 [주인]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래 성서에는 [큐리오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것을 '주인'즉 'master' 라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Lord]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단어를 '주인'으로 읽지 않고 '주님'으로 읽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즉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7절에서 끝납니다. 이것을 연극으로 표현하면 1~7절까지는 제1막입니다. 여러분이 연극이나 드라마를 볼 때 1편이나, 1막이 끝나고 제2막이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막의 등장인물은 누구입니까? 부자, 직원(청지기), 빚쟁이1, 빚쟁이2입니다. 이들은 7절이 끝나면서 모두 퇴장해 버린 것입니다. 8절에서 다시 2막이 올랐을 때는 등장인물이 바뀌었습니다. 1막에서 퇴장한 '주인'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해설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주님'입니다. 해설자가(주님) 비유를 하나 말하고서는 바로 그 비유 속에 등장하는 직원(청지기)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직원이 불법으로 빚을 탕감해 주고 난 다음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그가 꾀를 짜내어 그렇게 했다면 금 새 들통이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서야 어떤 처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뒤이어서 나오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주님은 범죄자를 칭찬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요?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8).
'슬기롭다'라는 말은 '현명하다'는 뜻도 있지만, '약삭빠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직원은 위기의 상황에 약삭빠르게 대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 직원의 약삭빠른 처신을 배우라는 것인가요? 나아가서, 실정법을 어겨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살 궁리를 하라든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 주는 데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는 것인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면 이 직원에게 '슬기롭게 처신했다'고 칭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이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를 알려면, 이 청지기와는 정 반대로 살았던 '어리석은 부자'(12:13-20)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이미 은혜를 받았지요? 어리석은 부자는, 그저 소출을 더 끌어 모을 궁리, 곳간을 넓히고 더 많은 곡식과 물건을 쌓아 놓을 궁리만 하면서,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먹고 마시자"했지요? 하나님은 그 때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하고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자, 이 부자와 나쁜 직원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 부자는 세상의 법으로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법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원(청지기)은 세상의 법을 어긴 범법자입니다. 부자는 감옥에 갈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원은 감옥에 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세상의 법과는 달리,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될 부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을 하고, 정작 세상의 잣대로는 감옥에 가야 할 직원에게는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왜 이렇게 되었나요? 예수님이 이렇게 부자와 직원을 세상의 눈과 법과는 상반되게 심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세상의 법이나 이치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자기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또는 종말적인 관점에서 심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잣대와 달랐던 것입니다. 부자는 세상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면서 그 많은 재산을 모으고, 늘려서, 창고에 가득 쌓아 두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종말과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종말 의식이 없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끝을 생각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산이 자기를 지켜 줄 줄 아는 것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직원은 실정법은 어기고 있지만, 이제 곧 자신이 누리던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 위기가 발생했고, 그래서 세상과 다르고 부자와 다른 방식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덜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법으로는 불법이지만, 하나님의 법 즉 종말적인 관점에서는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법을 넘어 '종말의 법'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청지기는 그것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모든 인생들이 과연 '종말의 법을 갖고 사는가'하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 누가 나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세상의 이분법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가! 그렇다면 너의 삶은 지금 어떤가?'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자와 청지기를 통하여 '종말의 삶'을 비유로 끝낸 예수님이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9).
여기서 '불의하다'는 말은 '나쁜 방법'이나 '부정하게 얻은'이라는 의미보다는 '세상의'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살 때'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은 종말에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 세상 재물에 자기의 영혼까지 담보하려고 하지 말고, 그 재물로 '영원한 처소'가 될 친구, 사람을 사귀라고 합니다.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다시 '불의한 청지기'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그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빚진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가를 알면, 그 청지기의 그러한 행동이 어찌하여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친구를 사귀는 일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빚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기름 백 말을, 다른 한 사람은 밀 백 섬을 빚졌다는 것입니다(6-7). 기름 백 말은 약 1천 데나리온이고, 밀 백 섬은 약 2천 5백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라고 했으니, 이 사람들이 진 기름 백말은 3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것이고, 또 한 사람이 졌다는 밀 백 섬은 7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이들이 진 빚은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진 빚입니다. 부자들은 춘궁기에 장려 쌀을 주고 최고 16배로 되돌려 받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위해 쌀을 얻어다 먹는 순간 이미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부자는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의 주체였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는 어떻습니까? 그가 한 짓이 세상 법으로는 위법이지만 그는 왜곡된 삶의 구조를 깨뜨리는, 그래서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청지기가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종말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그런 종말 의식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종말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독교인을 가름하는 기준이라면, 내게 과연 종말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걸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불의한 재물)로 부자처럼 인색하게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고, 비록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나쁜(어리석은)사람 이지만 종말을 기억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이 사람의 생활 방식이 종말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나쁜)청지기는 누구를 닮았는가 하면, 어리석게도 만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감히 이 바보 같은 또는 나쁜 청지기를 오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부활 즉, 영원한 삶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혹은 나쁜 청지기의 '영원한 처소'와는 어떻게 다르거나 같은 것일까요? 불의(어리석은)한 재물로 얻게 된 '영원한 처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니 청지기가 쫓겨났을 때 맞아 들일 집이라고 하면 좋겠지만, 본래 이 비유 자체가 그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해석하기엔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집을 '영원한 처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처소'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종말의 의식으로 사는 현실의 삶이 어때야 하는 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이 그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을 때, 그 일을 집행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3인칭 복수인 '그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것들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심판은 '사회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이 세상 친구들'이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는 천사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삶이 가장 종말론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대의 유대인의 종말론, 심판 론과 상이했던 예수님의 종말과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삶속에서 이러한 위기의식과 종말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종말과 심판이라는 게 일상생활과는 따로 떨어져 있어서, 어느 날 특별한 방식으로 종말도 시작되고 심판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종말도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고, 심판도 현재의 삶이 곧 심판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서 영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바로 이 비유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삶을 통해 이미 '영원한 처소'를 획득했던 것입니다. 죽기 이전에는 영원하지 않았던 분이, 죽고 난 다음에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처소'를 획득한 게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용서하며 사는 그 삶을 통해 이미 예수님은 '영원한 처소'로 인도 된 존재였던 것입니다.
불의한 제자가 삶에서 종말과 심판, 영원한 처소를 획득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이전의 그 자신의 따뜻한 삶을 통해 종말, 심판, 영원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 부활의 아침에, 믿는 거 따로, 사는 거 따로 나누어서 특별한 때에 특별한 방식으로 심판과 부활을 기다리지 말고, 내 삶에서 '현재의 심판'과 '영원한 처소'를 도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 심판, 영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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