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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다시 보라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10 추천 수 0 2012.06.01 1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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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38-4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4.11 주일설교 
마리아를 다시 보라
눅10:38-42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우리의 삶에 완전한 모범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과 씨름한 의지의 인물 야곱, 나라를 적으로부터 지키고 부강하게 한 다윗 왕, 복음을 이방세계까지 전한 바울, 등은 본받고 따라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런 인물들의 면면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요? 신화의 옷을 입혀 놓고 우리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잘못 배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위대한 신앙인으로 추켜세워서 이상형으로 삼기에만 바빴지, 그들이 얼마나 약하며, 우리와 똑 같은 못난 사람들인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너무 추켜세웠습니다. 그들이 완벽에 가깝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그들을 쓰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들처럼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들을 조금 깎아 내려 우리의 눈높이와 맞춰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늦게 얻은 외동아들까지 하나님께 바친 믿음의 위인으로 배웁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사람 누구만큼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하면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장자의 복을 가로채려고 형과 아버지를 속이기도 하였고, 여자 때문에 14년을 종살이를 했던 위인입니다. 다윗은 비겁하게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간 사람입니다. 그 벌로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었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그 자신의 말대로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생을 양면으로 보게 되면 조금 당혹스러워 집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이런 변명하나를 지어 냈는데, '보라, 성서가 저들의 모자라는 구석까지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그 위대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들에겐 '이런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성서의 본의는 '이런 면도 있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이것이 진면목이다'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배웠던 그들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결코 경제적으로 성공했거나 하나님 때문에 날로 신분이 상승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큰 죄에 빠지기도 하고, 엄청난 시련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흔히,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처럼 나중에 잘 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노후에도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타향에서 죽었으며,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완벽한 인생을 살지도 않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잘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또는 왜 함께 하셨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보통사람들이었는데, 뭘 보고 그들 속에 하나님이 역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잘해야 우등상을 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도 못한 사람이 우등상을 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또는 뭣 때문에 우등상을 타게 되었는지 그게 궁금하지 않겠어요?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관심해야 하는 것은, 무조건 잘난 그 사람들을 닮자가 아니라, 너는 왜 그들처럼 살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그들도 나처럼 허점투성이 인생을 살았는데도 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했느냐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삶에 간섭하고 임재 하시려는 하나님을 내게로 청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성서속의 그들처럼 내 삶에도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성공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삶에 빈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허점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허점'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하는 공부입니다. 그들의 그 허점이 바로 하나님이 '깃드실 만 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그 사람들은 너무 허점이 많아서 하나님이 깃들 자리가 있었던 사람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부족한 게 많은 사람, 별로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은 존재들, 이런 저런 열등감과 실패 감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꾸 감추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던 대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거나,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뻔 한 답은 잠시 미뤄두고, 눅10:38-42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은 제자들과 함께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의 집에 들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이고, 여러 가지로 접대를 하기 위해 분주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러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야 내 신변이 보장을 받는다고 믿는 게 오늘날의 세상이치 아닙니까? 세상의 이치로 하자면 아주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언니 마르다와는 반대로 그렇게 현실에 밝지 않습니다. 그녀는 남들이 다 그렇게 하는, 나보다 잘 난 사람을 잘 대접해야만 내게도 이로움이 생기는 그 분주한 수고를 모른 체합니다. 그러니 약간 현실에 뒤떨어 진거죠. 마리아는 바쁘거나 말거나 예수님의 발밑에 앉아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보고 '눈치 없다'고 핀잔을 합니다. 그걸 보다 못한 언니 마르다가 예수에게 가서 "내 동생이 언니 혼자 일하는 것을 그냥 보게만 하실 겁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말해 주시지요." 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언니를 거들어서 대접을 다 하고난 다음에 말씀을 들어도 되는 일 아니겠어요? 뿐만 아니라 지금이나 그때나 이런 여자는 '살림'에는 관심이 없거나 할 줄 모르는 게으른 여자란 소릴 듣기 안성맞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마르다의 이야기는 들은 척 마는 척 하고는 되레 마리아의 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처신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마르다는 잘못했고, 마리아는 잘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고, 마르다는 말씀 대신 허접한 일에 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은연중에 '말씀'이 최고 가치이며 우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까닭입니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도 이런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두 사람의 처신에 대해서 '옳다' 또는 '그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은 덜 중요하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다가 너무 많은 음식을 장만했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 삼았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억측입니다. 예수님이 그 때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41).

이 말이야말로 마리아의 상태를 잘 설명한 게 아닐까요? 예수님이 그 집에 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 위해서였을까요? 예수님이 원했던 것은 진수성찬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음식점이 아니고 어떤 집을 방문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만나서 마음이나 가슴을 열어놓고 중요한 뭔가를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마르다에게는 그걸 기대하기 어려워 졌습니다. 접대하는 것과 같은 사람 외적인 일에 분주하다보니 정작 그 '마음'이 들떠 버린 것입니다. '접대'란 실상 상대방을 위해 하는 일 같지만 아닙니다. 접대는 그 자신을 위해 하는 수고인 것입니다. 바쁘다는 한자 '忙'을 보면, 마음이 망가진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망가진 상태가 바쁜 것입니다. '나 바빠요'그러는 사람이 있으면, '난 마음이 망가져 있어요'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바쁘시죠?'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은 '요즘 당신의 마음이 망가져 있죠?'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과 마음을 나눌 수 없는 망가진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겁니다.  
    
"필요한 일은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4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필요한 한 가지'을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일'이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마르다가 한 '부엌일'은 허접한 것이고, 마리아가 했던 '말씀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42절은 41절의 말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저런 일로 바쁜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이런 유의 이야기들이 몇몇 있지 않습니까?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빼놓고 허둥대는 경우에 사용하는 격언들 말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일 한 가지'를 '말씀 듣는 일'이라거나 '영적인 일'이라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다나 마리아의 처신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다'일까요?  그러면 우리가 다 마리아처럼 해야 되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설교 듣는 일에만 몰두하면 소위 '영적인'일이 되는가요? 사실 세상의 생존 방식대로라면 마리아보다는 마르다가 하는 행동이 더 옳습니다. 어디 가서 마리아처럼 처신해 보세요. 금 새 눈 밖에 납니다. 삶에 손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의 처신은 현실적인 삶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목사가 방문을 하거나 하면 차분히 앉아서 대화를 하고 경청을 하는 대신에 뭔가 안절부절 하면서 주방을 들락거리지 않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자장면 한 그릇을 대접하면서도 연신 대접이 시원찮아서 죄송하다고 말하시잖아요? 그것은 우리가 나의 유무형의 유익을 위해 남을 대접하는 세속의 생존 방식에 익숙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마르다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처신은 사회 부적응자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잘했다는 것일까요?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언니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걸 무시하고 태평하게 예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그녀를 왜 칭찬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대는 마르다 같은 처신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하늘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도를 따라서 살려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만한 어리숙함, 여유 또는 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에 좀 한가해 지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살이에 좀 어수룩하라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행동은 세상의 이치대로 하자면 반듯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살면 세상을 잃겠지만, 그거에 목매달고 살지 말고 좀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치면 손해나는 짓이지만, 손해나는 일을 좀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한 사람들은 마르다처럼 세상이치에 틈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틈이 없는 똑똑한 사람들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등과 같은 위인들은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바보처럼 자신을 열어놓고 예수님과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틈이 많은 사람들, 세상의 이치 밖에서 사는 불쌍한 사람들, 세리, 죄인, 창기,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은 턱을 괴고 예수님의 말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들의 가치관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님과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의 교훈은 '세상의 이득을 쫓아 바쁘게 살지 말고 어수룩한 틈을 갖고 살아라' 그 말입니다. 마리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칭찬하는 '잘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와 같은 처신을 칭찬한 다음에 '그녀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녀가 제대로 움켜잡았다는 말 인가요? 그래서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계속 말씀을 붙잡고 있으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마리아의 그런 삶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싫어 한다기 보다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피죽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합니다. 그렇게 어수룩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아무도 그런 그녀의 삶의 방식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밀쳐내고 그 방식을 빼앗아서 그렇게 살겠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빼앗아 가래도 빼앗아 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걸 '빼앗기지 않는다'는 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그녀의 그와 같은 어수룩한 처신을 따라 살아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세상에서 바보가 되기를 작정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의 언니도 그걸 모르지 않았습니까? 그걸 알았다면 예수님에게 동생을 일러바치는 대신 마르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냉큼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겠지요. 그렇게 언니도 하지 않을 마리아의 일을 누가 빼앗는단 말입니까? 빼앗을 거면 언니가 가장 먼저 빼앗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낌새는 어디에도 없잖아요.

구약에 나타난 위인들과 마리아의 닮은 점은 무엇입니까? 마르다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리숙한 구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허점이 많은, 그래서 남들이 하지 않는, 입신양명 할 수 있는 경우를 택하는 대신에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세상 사람의 눈으로나 가치관으로 볼 때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시간과 마음을 쓸 여유가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틈새로 하나님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승리자들은 모두 이렇게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완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을 하신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길 만한 그런 틈을 가졌더니 그 사이로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이 일을 누가 빼앗으려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 세상의 이치로는 어리석어서 아무도 그를 부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처럼 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바울 그리고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는 미련한 사람 같아 보이나 하늘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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