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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2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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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4.18 주일설교 |
보는 계절에
마6:25-34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 없는, 일부러라도 봐야 하는 계절이 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게 봄입니다. 평소엔 '보고 싶다'그러면 그 대상이 사람이 되지만 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죠. 하늘과 땅, 꽃과 바람, 어둠과 밝음을 모두 봐야만 하는 그런 때입니다. 이런 계절에 우리가 묵상할 안성맞춤의 말씀이 있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시작이 조금 생뚱스럽습니다. 봄날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버거운 사람들과, 병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 내일이 보장되지 않아 불안한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배부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의 문맥을 보면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과 무리들입니다(5:1, 7:28). 여기서 무리란 항상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갖가지 질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4:24), 사흘씩이나 먹을 것이 없이 지낸 사람들입니다(15:32). 그리고 목자 없는 양같이 의탁할 곳이 없어서 지쳐 죽어가는 사람들(9:36)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통 보다 몇 배나 심한 처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이 말씀이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전체 문단(25-34)을 흐르면서 거듭 반복되는,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25,31,34). 이것은 마치 생업을 돌보지 말고 낙관주의자가 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현실을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서, 좀 고상하게 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사는 이들에게 가당한 말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의복보다 소중하지 않느냐?"(25).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려고 음식 걱정을 하는 게 아닙니까? 몸이 얼지 않게 하려고 옷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이쯤에서는 앞에서 하신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실제로는 이 구절 때문에 바로 앞에 나온,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 집니다. 여기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얻으려는 수고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본적인 정도를 지나서, 자신을 헤치기까지 하는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은 결국 몸을 건강하게 하고, 살리자는 것인데, 그것이 지나쳐서 오히려 몸을 헤치고 목숨을 죽이잖아요. 예를 들면, 살이 찐다고 다이어트 하다가, 수술 하다가, 음식을 먹지 않다가 되레 그것 때문에 자신을 망치지 경우와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거, 입는 거, 질병, 그런 걸 해결하려고 애쓰고 수고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를 너무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한 발 물러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시는 겁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26).
여기서 '보아라'는 그저 머릿속으로 한 번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실제로 눈 여겨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무 일상에 몰입되어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거기서 눈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새를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도 허점투성이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새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삽니까? 동물 다큐멘타리를 보면 사람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런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새들도 사람마냥 그렇게 수고해야 먹고 잡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새들도 사람처럼 수고하고 고생하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머리 싸매고 앉아서 걱정하거나 해서 자신을 축 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수고는 같지만 새들은 사람처럼 그 일로 인해 걱정하고 근심하다가 생명을 단축하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러십니다. "너희는 새들보다 귀하지 않느냐?"(26).
엊그제 T.V에서 새들의 알을 낳기 위해 짓는 집을 장면들이 방영되었어요. 그저 부리만 가지고 지어 내는 그들의 집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요즘은 자주 들 고양이들을 봅니다. 예전에는 쥐를 잡아 먹거나 사람들이 밥을 먹여 길렀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살아요. 어떤 때는 고양이들이 얄밉다가도 '예전보단 살기 어려워졌구나'싶은 생각이 들면 측은해요. 그런데도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살기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거나 그것 때문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근심을 하나요? 아니에요. 그냥 살아요. 그 때 적용 되는 말씀이 "너는 고양이 보다 귀하지 않은가?"하는 거예요.
식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고, 뿌리로는 물을 올려야 하고, 상처에는 진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생물학적인 용어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진리까지 무시 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저 그 식물들이 사람들처럼 그렇게 먹고 입는 것을 위해 걱정하며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찮은 들풀도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그들은 솔로몬의 옷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화려함이란, 바로 솔로몬이었고, 솔로몬 이상의 화려함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솔로몬의 영광도 들풀 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거창하게 여겨서, 예수님은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예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백합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백합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과 솔로몬 사이에 있는 매개물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백합꽃 과 솔로몬을 비교하여, 솔로몬도 백합꽃만큼은 차려 입지 못했다(29)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백합꽃 과 듣는 사람들을 비교하여, 하나님은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백합꽃)보다는 '너희들(듣는 사람들)'을 더 잘 입힐 것이라고 합니다(30). 결국 하나님은 그런 것들보다 사람들을 훨씬 더 잘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삼단 논법입니다.
어째서 솔로몬이 백합꽃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않은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인공적인 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 주관에 의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화려함은, 그가 권모술수로 권력을 쟁탈하고,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고, 강제 부역, 군 징집 등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화려함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백합꽃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소박하지만, 다소 초라하지만 자연스럽게 지어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그래서 솔로몬의 영광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현재의 처지가 어떻든지 솔로몬의 화려함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몰입하며 자책하다가 화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 화려함을 지향하면서 걱정하고 몰입함으로 생기는 패악을 지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들 꽃 한 송이를 보면서 "우리는 들꽃보다 귀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이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봄 새 한 마리, 백합 꽃 한 송이를 두고 그 화려한 솔로몬을 천하에 천박함으로 떨어뜨리고, 열등감과 불안에 젖어 있던 무리들을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주제로 일으켜 세운, 예수님의 그 배짱과 통찰력, 그리고 그 큰 사랑은 왜 우리의 것, 나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마6:25-34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 없는, 일부러라도 봐야 하는 계절이 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게 봄입니다. 평소엔 '보고 싶다'그러면 그 대상이 사람이 되지만 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죠. 하늘과 땅, 꽃과 바람, 어둠과 밝음을 모두 봐야만 하는 그런 때입니다. 이런 계절에 우리가 묵상할 안성맞춤의 말씀이 있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시작이 조금 생뚱스럽습니다. 봄날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버거운 사람들과, 병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 내일이 보장되지 않아 불안한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배부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의 문맥을 보면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과 무리들입니다(5:1, 7:28). 여기서 무리란 항상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갖가지 질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4:24), 사흘씩이나 먹을 것이 없이 지낸 사람들입니다(15:32). 그리고 목자 없는 양같이 의탁할 곳이 없어서 지쳐 죽어가는 사람들(9:36)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통 보다 몇 배나 심한 처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면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이 말씀이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전체 문단(25-34)을 흐르면서 거듭 반복되는,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25,31,34). 이것은 마치 생업을 돌보지 말고 낙관주의자가 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현실을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서, 좀 고상하게 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사는 이들에게 가당한 말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의복보다 소중하지 않느냐?"(25).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려고 음식 걱정을 하는 게 아닙니까? 몸이 얼지 않게 하려고 옷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이쯤에서는 앞에서 하신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실제로는 이 구절 때문에 바로 앞에 나온,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 집니다. 여기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얻으려는 수고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본적인 정도를 지나서, 자신을 헤치기까지 하는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은 결국 몸을 건강하게 하고, 살리자는 것인데, 그것이 지나쳐서 오히려 몸을 헤치고 목숨을 죽이잖아요. 예를 들면, 살이 찐다고 다이어트 하다가, 수술 하다가, 음식을 먹지 않다가 되레 그것 때문에 자신을 망치지 경우와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거, 입는 거, 질병, 그런 걸 해결하려고 애쓰고 수고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를 너무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한 발 물러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시는 겁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26).
여기서 '보아라'는 그저 머릿속으로 한 번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실제로 눈 여겨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무 일상에 몰입되어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거기서 눈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새를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도 허점투성이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새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삽니까? 동물 다큐멘타리를 보면 사람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런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새들도 사람마냥 그렇게 수고해야 먹고 잡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새들도 사람처럼 수고하고 고생하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머리 싸매고 앉아서 걱정하거나 해서 자신을 축 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수고는 같지만 새들은 사람처럼 그 일로 인해 걱정하고 근심하다가 생명을 단축하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러십니다. "너희는 새들보다 귀하지 않느냐?"(26).
엊그제 T.V에서 새들의 알을 낳기 위해 짓는 집을 장면들이 방영되었어요. 그저 부리만 가지고 지어 내는 그들의 집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요즘은 자주 들 고양이들을 봅니다. 예전에는 쥐를 잡아 먹거나 사람들이 밥을 먹여 길렀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살아요. 어떤 때는 고양이들이 얄밉다가도 '예전보단 살기 어려워졌구나'싶은 생각이 들면 측은해요. 그런데도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살기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거나 그것 때문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근심을 하나요? 아니에요. 그냥 살아요. 그 때 적용 되는 말씀이 "너는 고양이 보다 귀하지 않은가?"하는 거예요.
식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고, 뿌리로는 물을 올려야 하고, 상처에는 진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생물학적인 용어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진리까지 무시 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저 그 식물들이 사람들처럼 그렇게 먹고 입는 것을 위해 걱정하며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찮은 들풀도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그들은 솔로몬의 옷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화려함이란, 바로 솔로몬이었고, 솔로몬 이상의 화려함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솔로몬의 영광도 들풀 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거창하게 여겨서, 예수님은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예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백합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백합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과 솔로몬 사이에 있는 매개물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백합꽃 과 솔로몬을 비교하여, 솔로몬도 백합꽃만큼은 차려 입지 못했다(29)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백합꽃 과 듣는 사람들을 비교하여, 하나님은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백합꽃)보다는 '너희들(듣는 사람들)'을 더 잘 입힐 것이라고 합니다(30). 결국 하나님은 그런 것들보다 사람들을 훨씬 더 잘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삼단 논법입니다.
어째서 솔로몬이 백합꽃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않은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인공적인 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 주관에 의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화려함은, 그가 권모술수로 권력을 쟁탈하고,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고, 강제 부역, 군 징집 등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화려함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백합꽃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소박하지만, 다소 초라하지만 자연스럽게 지어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그래서 솔로몬의 영광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현재의 처지가 어떻든지 솔로몬의 화려함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몰입하며 자책하다가 화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 화려함을 지향하면서 걱정하고 몰입함으로 생기는 패악을 지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들 꽃 한 송이를 보면서 "우리는 들꽃보다 귀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이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봄 새 한 마리, 백합 꽃 한 송이를 두고 그 화려한 솔로몬을 천하에 천박함으로 떨어뜨리고, 열등감과 불안에 젖어 있던 무리들을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주제로 일으켜 세운, 예수님의 그 배짱과 통찰력, 그리고 그 큰 사랑은 왜 우리의 것, 나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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