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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렘3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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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교수 |
참고 : | 2012.5.6 주일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모태공간, 어머니 교회
(예레미야 31:15-17, 21-22
2012년 5월 6 주일예배
최만자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등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중요한 만남을 한 가족과 스승에 대한 감사와 깊은 사랑을 재확인하고 더 진정한 관계를 다지는 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체로 이 시기에는 모성이 가장 고양되고 미화됩니다. ‘자기모두를 다 바쳐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고향이요 내 생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평생 자신을 희생하고 사신 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제가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현실은 그런 희생적 모성을 고양하기엔 생활구조가 옛날과는 너무나 달라졌고 또 그런 모성찬양은 자칫 여성들을 계속 희생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여성억압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전통적 모성상을 넘어선 새로운 모성상이 모색되고 있고 또한 모성의 사회적 확대도 어느 정도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현실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직업을 가진 많은 어머니들이 희생적 어머니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죄의식을 가진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그러하거니와 사회의 시선도 희생적 모성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즈음 자녀들이 좋은 고등학교나 좋은 대학에 가는 조건 중의 하나가 ‘엄마의 정보력’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희생적 모성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 우리사회는 왜곡되고 변형된 희생적 모성이 판을 치면서 우리의 아이들을 더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되지요. 따라서 건강한 새로운 모성상이 재정립될 필요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근래 2-3년 동안에 어머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많은 관심을 촉발시킨 신경숙님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이런 실정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자식들 위해 자신을 모두 내어주고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전형적인 희생적 모성으로서의 어머니 모습을 가슴 저리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가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보살핌은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의 삶에 걸림돌이 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고 결국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과거 어느 지점에서 인지 강렬히 남아있는 아들이 있던 곳을 배회하며 걸인이 되어 떠돌고 엄마를 잃은 자녀들이 우왕좌왕 어머니를 찾아 헤매지만 도저히 만나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해외여행을 가게 된 둘째 딸이 여행지에서 들리게 된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엄마를 부탁해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합니다. 이 소설이 많은 나라 말들로 번역이 될 정도로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고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보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희생적 모성이 강조되고 미화되는 전통적 어머니상에 머물러 있다는 혹독한 비판적 평가도 나왔습니다. 저는 이 평가의 양면이 모두 일리 있다고 생각됩니다. 작가는 성모 마리아에게 엄마와 함께 모성에 대한 결론도 부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극히 짧은 동안이지만 계단을 오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돌아보는 약간의 엄숙함이 생길 수 있는 계단이 주는 의미도 좋았습니다. 교회 내부는 창문이 거의 없이 오직 제단위로 뚫려있는 하늘의 빛 자연광을 받으며 약간 어두움에 쌓여있어 잔잔하고 엄숙하며 신비한 분위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독특하게도 김수근 선생은 교회의 내부공간을 ‘모태공간’으로 상징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확실하게 그런 상상을 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분은 교회를 어머니의 자궁으로 상징화하였고 그 안에 태아가 편안함과 충분한 양육을 받고 있는 상태를 상상하여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공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1970년대 이 교회를 건축하면서 어떻게 이러한 모태공간 개념을 가질 수 있었을까? 저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가 어머니의 자궁이라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모성적 가치들은 무한히 생성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교부들은 흔히 성령을 어머니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전통은 초대만 아니라 중세의 신비사상가들에서는 매우 흔한 상징으로 나타났습니다.(힐데가르트, 줄리앙, 에카르트 등)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간됨을 그의 모성성과 동일시하는 것이지요. ‘구세주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태어나고, 그를 떠나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 어머니는 첫째, 사랑하고 먹여준다. 둘째 출산을 통해 창조하고 구원한다.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의 구속적 역할이다‘ 이러한 해석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내가 살고 존재하며 내 영혼이 양육된다는 데에까지 이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양육하는 어머니로 이해하게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여성신학은 어머니 하나님을 성서로부터 찾게 됩니다. 호세아서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너를 양육하고, 품에 안고, 걸음마를 시키며 키웠다‘라고 하며, 이사야서에는 ’나는 너를 내 태에서 조성한 자‘라고 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넘어 하나님의 속성이 속속들이 어머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니온 신학대학의 은퇴교수 필리스 트리블은 그의 수사학적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여성의 신체기관인 자궁과의 언어적 일체성을 탁월하게 밝혔습니다. 제가 오래전 말씀증거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자비 히브리어 ‘라하밈’은 복수 단어인데 그 어원인 단수형 ‘레헴’은 자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어원에 줄을 대고 있으면서 구체적인 명사 자궁은 추상명사인 하나님의 자비로 표현되어지는 것이지요. 트리블 교수는 ‘자궁은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무한으로 수용하며 양육하고 자원을 한없이 제공하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한 받아들임과 풍요한 생명력으로 양육함과 한없는 은총의 제공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만물은 양육되며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는 바로 어머니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신대 은퇴교수(우리교회에도 많이 오셨던) 김이곤 교수는 하나님이 애굽 파라오의 학정아래 신음하는 히브리 민족의 고통을 보고 듣고 ‘하나님의 자비’, (김이곤 교수는 이를 수사학적으로 풀어) ‘하나님의 자궁’이 떨려 고통속의 노예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때도 역시 ‘레헴’ 어원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궁의 생명력이 비단 한 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민족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되며 하나님의 역사의 영역이 개인과 역사의 차원 모두에서 전개됨을 시사해 주고 있지요.
김수근 선생이 이런 신학적 내용들을 다 알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 공간을 모태공간으로 상징화한 것은 교회라는 곳이 생명의 탯줄, 젖줄이 되며 생명을 잉태시키고, 양육하고 살려내는 곳이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평안과 위로와 힘을 받게 된다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 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자궁은 한 생명체를 잉태하고 양육하고 완성시키는 곳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하는 공간이지요. 곧 교회 안에서는 힘없고 죽어가는 생명들이 새 힘을 얻고 건강하게 양육되며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며 그러한 말씀과 사귐이 넘쳐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곳 곧 모든 억압과 고통과 죽임의 세력이 위협하는 곳에서 생명력을 회복시키고 살림의 역사를 이루는 일들이 발생하는 모든 공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림’은 ‘죽임’의 반대 말입니다. 죽임은 자연적인 죽음(Death) 혹은 죽은 상태를 뜻하는 정적인 의미로서의 죽음과는 달리 강제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동적인 행동과 상황이지요. 교회 공간, 곧 모태공간은 이런 죽임의 세력들을 거부하고 살림을 이루어야 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주변 상황을 둘러보면 말할 수 없이 많은 죽임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속의 일들을 일일이 들추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죽임의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탐욕과 거짓에 얽혀지는 부도덕으로 진실된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생명력들을 죽여 버리는 사회지도급들의 죽임의 행진들이 매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절박하게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로 인해 특히 교육현실의 심각한 왜곡으로 인해 우리의 귀한 아이들이 연달아 자살을 하는 이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참 우리는 뻔뻔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OECD 국가 중 어린이 행복지수에 있어 우리나라는 하위급이랍니다. 100점 만점에 69점이랍니다. 자살충동을 느낀 아이들이 12%, 불만족하다는 아이들이 50%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불행해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 어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까? 광우병의 위험에 휩싸인 소고기를 대책 없이 수입하면서 국민의 건강은 안전하게 지킨다는 기만된 논리를 철면피하게 공포하는 정치인들의 소행은 우리 늙은이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의 미래가 되는 후손들을 죽임으로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밖을 나서거나 밤길을 걷는 여자아이거나 여성들은 공포감으로 가득차야 하고 성폭행, 강간,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는 죽임의 세상을, 무능하게 당하고만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요? 그 뿐입니까? 오래전 체르노빌의 엄청난 사건을 잊고 있다가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보면서 그 참혹한 재난과 고통을 보면서 그 가운데 아직도 많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참혹하고 불행한 미래를 뻔히 보면서도 원전은 더 세워져야 한다든가 가장 안전한 에너지 방식이라든가 국익을 위해 여전히 홍보해야할 재정 자원이다라는 등등의 기막힌 이론들을 내세우는 용서할 수 없는 어른들인 우리들이지요.
저는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우리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핵관련 책들을 읽는 중 한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구드룬 파우제방의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이란 책이었어요. 그것은 독일의 한 지역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핵폭발 사건을 가상적으로 쓴 소설이지만 거기서 그려진 것은 결코 가상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 책 내용 중 제일 충격 받은 것은 핵폭발에 노출된 임산부가 눈이 없는 아이를 출산한 장면보다도, 핵폭발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소설의 주인공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 부모님들과 만나 행복하거라"라고 하는 말에 이 죽어가는 아이들이 한 말입니다. "뭐 그 부모님들, 그 어른들은 천벌 받을 사람들이야" 라고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너무 충격을 받은 저는 아! 우리 어른들이 무슨 일을 저질러 놓은 거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잔혹한 미래를 넘겨주다니? 잔혹한 죽임의 미래를 넘겨준 사람들 속에 나는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한 범인이구나 라고 깨달았지요.
저는 제 손자들을 보살피면서 자주 우명미 자매님 생각을 합니다. 자매님은 오랜 투병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나도 아쉬울 것 없는데 단 한 가지 당신의 손자 정민이의 자라는 모습을 못 본다는 것만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가끔 정민이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명미 자매님 대신 그 아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가지는 것이 한 공동체 식구로서 정을 함께하는 일인 듯해서이지요. 요즈음 저도 자매님과 같은 심정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손자 손녀 세대를 그리워하면서 여생을 지내고 있지요. 요즈음 우리 새길 안에서도 3세대들이 많이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싱글벙글 하시는 모습 많이 봅니다. 이렇게 소중한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죽임의 문화를 물려준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린이날 좋은 선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살림의 세상을 물려줄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라헬의 통곡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헬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조상 야곱이 가장 사랑한 부인입니다. 라헬은 오래 아기를 갖지 못하다가 늦게야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애지중지한 요셉이 형들의 간계로 애굽으로 팔려갔고 형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말했지요. 아들을 잃은 라헬이 간장이 녹아나는 통곡을 합니다. 자식 잃은 어미의 통곡입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서에 라헬은 자식 잃은 모든 부모들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무덤을 배회하면서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의 침략당시 포로로 잡혀간 아들들을 위해 통곡하는 어머니들을 라헬의 통곡하는 영혼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슬픔 중에서도 자식 잃은 슬픔이 제일 클 것입니다. 성서는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고 표현하는데 자식 잃은 슬픔은 그 아무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려 말에 원나라에 공녀로 잡혀가는 수많은 딸들을 보내면서 소리친 어머니들의 통곡이 천지를 뒤흔들었다는 기록이며 일제 정신대로 잡혀 간 딸들 때문에 혹은 일제에 징병으로 끌려간 아들들을 보내며 소리친 어머니들의 통곡은 역사의 바닥에 아직도 그대로 고여 있는 듯 하지요. 마치 성서 라헬의 통곡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이대 박경미교수는 이 어머니들의 통곡과 비명은 억울함과 악마적 상황에 대한 고발이며 동시에 이 죽임의 절망 앞에서 다시는 이런 죽임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갈망의 울부짖음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죽임의 절망 앞에서는 통곡 밖에는 방법이 없지요. 그러나 그 통곡으로 인하여 새로운 역사가 동트게 됨은 인간사의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수도 이 통곡의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납니다. 이는 예수의 생애가 인류 역사의 깊은 고통과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의 태어남이 권력자와 가진 자와의 충돌과 갈등을 불가피하게 일으킬 것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권력자들의 방식이 죽임이라면 예수의 방식은 살림의 그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의 출생에 대한 헤로데의 대응은 2살 이하의 영아학살이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라헬의 통곡소리가 온 베들레헴을 흔들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지요. 더 소급하면 이는 모세의 탄생이야기와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히브리민족 말살을 위해 파라오는 두 살 이하의 영아를 모두 학살하라는 죽임의 정책을 엄포하지요. 하여 라헬의 통곡이 역사 안에 다시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인들 히브리 산파, 미리암, 애굽공주 등 에 의해 모세는 갈대상자 속에 생명을 보존했고 히브리민족 해방의 인도자로 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히브리민족 해방 사건은 천년을 지나 예수의 인류 해방사건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의 통곡으로 인해 죽임의 세상이 살림의 세상으로 반전되었다고 예언자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새 역사를 열기 시작하였고 그 새 세상은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완전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정말 낯설지요. 21세기도 아닌데 여성신학도 모르면서 예레미야는 어떻게 새 세상을 이런 표현으로 상징하였을까 상상과 해석이 어려워집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는 흑암 같던 암울한 시대는 끝이 난다는 것이며,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의 아들들이 살아 돌아오고, 흩어졌던 자들이 다시 돌아와 모이게 되고, 국가의 명예가 회복되고 우는 자를 기쁘게 하며 춤추고 새날을 축하하는 그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돌아오는 길에 푯말을 세워 길을 찾게 하고 어린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어린아이는 새 생명으로 살아 태어남을 노래하자는 것입니다. 삶의 환경은 완전히 반전되어 전쟁, 테러, 잔학성은 없어지고 상처 받은 자, 약자를 보살피는 공동체 안에서 생명의 풍요를 느끼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새 질서는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학자들은 ‘여자가 용사를 안으리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튼 미래 세계의 질서, 남녀관계의 새로움, 회복된 사회의 모습은 놀라운 여성의 새로운 역할로 재건되고 기쁨이 넘치는 세상으로 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세상의 생명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힘으로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것은 어머니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하나님에게서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우는 하나님, 위로하는 하나님, 보살피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죽임의 현실들을 보면서 이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명의 세상으로 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죽임이 물러가도록 라헬처럼 우리도 통곡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악의 세상을 드러내어야 하며 생명의 새 세상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록 개인차원에서는 내새끼 위해 내 모든 것 희생한다는 전통적 모성상을 가진다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는 그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모성성을 이루어 나가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공동체적 사회안전망을 넓히는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새로운 질서의 한 단면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아이들을 죽이는 이 경쟁세상에서 김용택 시인의 ‘좋은 엄마’를 떠올립니다. 좋은 엄마는 나를 강가에 데려다 줍니다. 좋은 엄마는 나를 나무에 기대게 해 줍니다. 좋은 엄마는 나를 흙과 바람과 풀잎에게 데려다 줍니다. 좋은 엄마는 나를 친구에게 데려다 줍니다. 좋은 엄마는 해가지면 나를 부르러 강가에 옵니다. 이슬아 밥 먹어라 달빛아 밥 먹어라 나를 부르러 강가에 옵니다. 시인은 생태학적 감수성에 젖은 새 세상의 질서를 노래하고 있지요.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광우병들지 않게 소를 기르고 원전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좋은 세상 새 세상 말입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의 은총의 경험은 교회의 협동적 성격을 통해서 현현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형성되는 협동적 삶이 곧 기독교적 삶이다 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치유하고 양육하며 교육하면서 ‘예수안에서’라는 당시 세상과 다른 질서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교회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모태공간인 이 교회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살려내고 온 지구를 살리는 살림의 일들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고 계시고 우리가 함께 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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