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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다

사도행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786 추천 수 0 2012.06.11 19: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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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4:5-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4월29일 설교 http://dabia.net/xe/589504 

jys.jpg 정용섭 목사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다

사도행전 4:5-12, 부활절 넷째 주일, 2012년 4월29일

 

톨스토이의 대표작인 <부활>에는 재판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 카츄샤가 살인절도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네흘류도프 공작은 피의자가 누군지 모르는 가운데 그 재판의 배심원으로 나왔다가 카츄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네흘류도프 공작은 젊은 시절 객기로 카츄샤를 농락해서 임신하게 만듭니다. 결국 카츄샤는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에서 쫓겨나 창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카츄샤의 운명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네흘류도프 공작은 카츄샤가 실형을 선고 받아 유형을 떠난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뒷바라지를 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게 책 제목인 부활을 가리킵니다. 톨스토이는 당시 법정의 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카츄샤의 범죄 사실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동안에 판사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합니다. 어떤 판사는 자기 아내와의 싸움을 걱정하고, 어떤 판사는 빨리 재판을 끝내고 정부를 만나러 갈 일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카츄샤의 운명이 걸린 재판이 판사들에게는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잔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법조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그런 일들은 반복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부러진 화살>도 그걸 주제로 합니다.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억울하게 재임용에 탈락한 사건이 블랙 코미디와 같은 그 전체 이야기의 단초입니다. 정의의 보루여야 할 법정이 늘 정의로운 게 아닙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불의 편에 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도 당시의 판사이고 검사였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배경도 법정입니다. 행 4:5, 6절에 일련의 사람들이 열거됩니다. 관리,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대제사장의 문중이 그들입니다. 당시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입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내서 재판을 열었습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최고 엘리트들입니다. 지금의 대법관과 같습니다. 이들에 비해서 베드로와 요한의 위치는 초라합니다. 원래는 어부였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을 뿐입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앉았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권세와 이름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황제의 이름은 황제의 권위를, 총독의 이름은 총독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이들이 이렇게 물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베드로와 요한이 왜 감옥에 갇혔으며, 지금 왜 재판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재판 이야기는 행 3장1절 이하에 보도된 장애인 치유 사건과 직접 연관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에 따라서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성전의 미문에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을 내려서 그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소문이 산헤드린 당국자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 그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를 통해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거라는 내용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이 고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금지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권세와 이름을 내세운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장애인을 고친 행위가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의사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의료행위를 했다는 트집이었습니다.

 

    치유의 근원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기 죽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은 진리의 영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그의 대답은 아주 명백했습니다. 장애인의 치유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b절) 이 문장에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건강하게 하신다는 신앙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장애 치유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장애나 질병은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는 많은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기계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병도 안 걸리고, 늙지도 않고, 죽지 않는다고 해도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의미가 없고, 아프지 않으면 건강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러나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건강은 영적인 것입니다. 삶에 대한 총체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 장애를 지닌 채 건강한 사람도 있고 비장애이면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총체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부자이면서도 오히려 건강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돈도 많고,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실제로는 그게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지는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겁니다.

 

오늘 본문은 장애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런 치유의 근원이 누구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10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살렸다는 사실이 대비됩니다. 본문은 그것을 다시 시편 118:22절을 인용해서 강조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에서 반복된 무죄한 이들의 고통을 대표합니다. 이런 근원적인 죄성에 의한 삶의 왜곡은 사람의 손으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못 박은 사람들을 찾아내서 엄벌에 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서는 전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분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창조 사건입니다. 수명을 늘리거나 건강을 유지하거나 복지를 높이는 수준이 아니라 그런 것과 전혀 다른 궁극적인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치유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의 이런 삶의 형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소유를 통해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무소유를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이해하려면 지금의 생명 경험을 표면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심층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영생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며 세상입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세상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여기서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를 과소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처럼 ‘건강하게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궁극적 미래에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구원자 예수

 

치유의 근원이 예수라는 이 진술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 초기 기독교와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니즘에 대한 질문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을 받았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 모든 제국의 억압구조를 제압하고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되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유대인들이 대망하고 있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늘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수많은 정치와 전쟁의 영웅호걸들이 메시아를 자처했습니다. 인류를 자신들이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중들은 그들에게 열광했습니다. 그중에는 사이비도 많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은 이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또는 민족주의적 패권를 위해서 전쟁을 부추기는 영웅들은 모두 사이비입니다. 히틀러도 20세기 초반 독일 사람들에게 메시아였습니다. 그는 세계 전체를 죽음의 광기로 몰아넣습니다. 오늘날은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납니다. 작년에 죽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이들은 현대판 메시아입니다. 5년 전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 씨에게서 메시아 경험을 했겠지요. 오늘은 박근혜 씨나 안철수 씨가 어떤 이들에게 메시아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중이 메시아를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영웅들이 좋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궁극적인 생명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인류를 생명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유사 메시아들은 죄로 인해 죽었습니다. 역사에 크고 작은 이름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 이외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용감하게 선포했습니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고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타종교 및 세상의 학문 및 사상들과 메시아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베드로처럼 나사렛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지를 오늘 우리는 변증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그런 건 전문적인 신학자나 목사, 선교사의 몫이지 세상살이에 바쁜 일반 신자들에게는 어려운 일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각자 삶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변증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전도와 선교는 본문이 말하듯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없으신가요? 실수가 많아서 불안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실제로 알고 경험한다면 여러분은 모두 총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 것 자체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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