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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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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년 5월13일 설교 http://dabia.net/xe/591762 |
정용섭 목사
사랑과 믿음
요한일서 5:1-6,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2년 5월13일
서양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합니다. 이에 비해서 한국을 비롯해서 동양 사람들은 그런 말을 어색하게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영화나 티브이 영향 때문인지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를 치료하는 모임 등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라고 권면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 집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 에게’라고 하긴 했지만 직접 볼 때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설교에서 공식적인 문구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신자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런 말을 하기가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사실의 무게를 제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일까요?
신약성서 언어인 헬라어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아가페, 필로스, 에로스입니다.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을, 필로스는 우정에 근거한 사랑을, 에로스는 연인 사이의 사랑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로스를 본능적인 차원으로, 필로스를 인격적인 것으로, 아가페를 이타적인 것으로 봅니다. 기독교인들은 아가페를 수준 높은 것으로, 에로스를 천한 것으로 여깁니다. 과연 사랑이 이렇게 나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헬라인들은 사랑의 특징을 구별한 것뿐이지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이 따로 있다고 말한 게 아닙니다. 에로스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에 두 사람이 주요 인물로 나옵니다. 나르찌스와 골드문트입니다. 나르찌스는 지(知)를 가리키고 골드문트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골드문트의 사랑은 에로스입니다. 에로스는 삶의 미학입니다. 예술가, 시인, 과학자들의 열정이 다 에로스입니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에로스가 인간 문명의 원초적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남녀가 만나서 격정적인 몰입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도 에로스의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에 의해서 그들은 아기를 낳고 인류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렇다면 에로스 역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사랑은 무엇일까요?
개정개역 우리말 성경 요한일서 4:7-21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사랑예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울의 고전 13장에 버금갈 정도로 사랑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7,8절만 인용해도 그 아름다운 표현들에 감동을 느낄 겁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표현이 요일 4:16절에도 반복됩니다. 전체 단락은 이렇게 끝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런 구절 외에도 성경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지천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 6:5절을 인용해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22:34-40) 구약과 신약을 총괄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으라고 하면 사랑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일까요? 손에 잡힙니까? 성경으로부터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 그런 일들이 있긴 합니다.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경우가 그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네 자신과 같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역지사지도 쉽지 않습니다. 경쟁하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서 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처럼 서로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런 경쟁을 토대로 삼고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대신 극한의 휴머니즘에 근거한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인은 성서로부터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억지로라도 사랑하려는 시늉을 합니다. 형제 님, 자매 님, 사랑합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결식자에게 밥을 주고, 시설을 찾아다닙니다. 귀한 일입니다. 이 세상을 밝게 하는 데는 그런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그것과는 상관없이 삽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인 훈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철저하게 세상 논리로 살아갑니다. 완전히 세속적인 삶에 기울어집니다. 양쪽 모두 건강한 신앙은 아닙니다. 양쪽 모두 영혼의 자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요? 우선 여러분은 스스로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면 병이 됩니다. 위선이 됩니다.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이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두 속성을 지닌 인간에게 사랑은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그런데 왜 성서는 사랑하라고 반복해서 명령하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을 누구에게 했는지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바리새인 율법학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따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을 얹어놓지 말고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언급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명입니다. 즉 인간에게 부과된 사랑의 보편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독론적 진술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요한일서의 대명제를 보십시오. 이런 명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읽는다면 정확한 게 아닙니다. 이 명제는 하나님만이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성품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이지 봉사의 은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행하시는 생명 창조의 능력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개발하거나 확산시킬 수 있는 인간적인 소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바로 앞에서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파 율법학자에 대한 경고라고 말씀드린 데서 어느 정도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영지주의에 기울어진 교회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신적인 사랑만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사람의 육체는 악합니다. 그렇게 악한 것들은 무시하면 됩니다. 오직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도 육체가 없는 영적인 존재였다는 겁니다. 예수의 육체는 실체가 아니라 가짜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정통 교부들은 이들과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온 겁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영지주의의 신앙적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지 휴머니즘을 실현하라는 일반적인 훈계가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휴머니즘을 실천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상식입니다. 그 상식을 기독교 신앙으로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5월은 한국교회에서 주로 가정을 주제로 행사들이 벌어집니다. 설교도 대개 그렇습니다.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심지어는 부부 주일도 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라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교양강좌라고 생각합니다. 교양강좌는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복음의 진수, 복음의 중심은 아닙니다. 그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일 4:7-21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말한 뒤에 이어서 요일 5:1 이하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데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더 나가서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형제 사랑의 토대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토대입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삶을 규정하는 중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잘 믿으라는 말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실을 믿고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부터 그게 오해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크게 오해된 신앙은 앞에서 언급된 영지주의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은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영지주의를 염두에 둔 진술입니다. 물은 예수의 공생애 일반이고, 피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십자가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그러나 정통 교부들은 그것마저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역사적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공중에서 내려온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모든 한계를 그대로 지닌 채 역사에서 목수로 살았던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는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그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킨 어떤 영웅이나 위인이 아니라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살았던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혹시 그게 왜 중요한지, 왜 본질적인지 대답이 필요하신가요? 기독교 신앙은 아주 구체적인 인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상이나 종교체계나 감동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물이 중요합니다. 그 인물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 구원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라고 했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한편으로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열심히 살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조금 더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주신 선교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걱정 아닌 걱정을 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일들을 다 신앙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보수적인 분도 있고 진보적인 분도 있습니다. 각자 다른 입장으로 삽니다. 다 좋습니다. 그 모든 것의 신앙적인 토대는 놓치지 마십시오. 그 토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과 세상을 살립니다. 그 사랑에 참여하고 싶으신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바르게, 굳게 믿으십시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에 집중하십시오. 사랑의 능력이 여러분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사랑의 존재론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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