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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콩 한 되가 주는 교훈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677 추천 수 0 2012.06.16 23: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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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4:1-9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5.9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흰 콩 한 되가 주는 교훈
마4:1-9

얼마 전에 <모새골>이라는 신앙 공동체에서 3박4일을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목사'다운 존재의 격을 갖춘 임영수 목사님이 서울의 영락교회를 간단하게 사임하고 시작한 신앙공동체입니다. 삶을 예배처럼, 예배를 삶처럼 살아가는 그들은 작은 농토와 과수원과 바람과 새소리들을 심고 키우며 살아갑니다.

단촐 하고 정갈한 아침 식사를 목사님과 함께 하다가 금년엔 콩을 좀 심어 보시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냉큼 '제가 그 콩 씨앗을 얼마쯤 구해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은구 장로님이 제게 흰 콩 씨앗 한 되를 가지고 오셔서는 한 구덩이에 두 알씩, 5월 10~15일 경에 파종을 하면 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이해를 니고데모를 통해 접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봄에 씨를 뿌리는 일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는 게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 할 때 씨의 비유를 들곤 하셨습니다. 막4:3-8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26-29에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30-32)'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봄살이를 신앙적인 눈으로 하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봅시다(3-8).

이 비유는 농사짓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농사짓는 사람, 소작농, 그리고 날품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씨 뿌리는 이야기'를 달리 들을 필요도 없고, 달리 해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말씀을 읽을 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하고 추측과 해석이 많아지지만, 당시의 무리들에겐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씨를 뿌리는 중에,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 짝 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있는 그들에겐 그저 흔한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그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가시덤불이 뭔지, 돌 짝 밭은 뭘 의미하는지 묻지 않아도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서 이 말씀에 대한 접근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도 하나 둘 죽은 다음부터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우의적(allegorical)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의적인 해석이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씨'는 무엇인지, '돌 짝 밭'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살아 계실 때는 그런 걸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로 하게 되다보니 당연히 그 의미를 풀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현장의 말씀이 그만 '교훈'과 '예화'를 통해서 이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예수님이 하셨던 현장의 생생한 가르침은 사라지고 엉뚱한 곳을 더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예화'나 '비유'나 '교훈'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그저 단순하게 농사짓는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농사짓는 마음으로, 콩 씨를 심는 농부의 장면으로 돌아가 볼까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서두에는 이야기의 주체가 '농부'가 아니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농부'라는 표현을 써도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 의미의 농사짓는 일이 아니라 특별히 '씨를 뿌리는 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씨 뿌리는 일의 중요성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씨 뿌린 다음에 나오는 이러저러한 상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자라는 과정의 이야기는 극적인 효과는 주지만 실제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요지가 아닙니다. 오로지 '씨를 뿌리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걸 거꾸로 읽은 것입니다. '씨 뿌리는 일'은 서론쯤으로 여겨 금 새 건너뛰고, 그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이 본론이며, 그 다음으로 나오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결론이줄 압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들으면 무조건 30배, 60배, 100배만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해석을 할 만한 성서적인 근거는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같은 장에 나오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를 보더라도, 이들 비유 속에서는 '씨 뿌리는 일'과 그리고 '거두는 일'이 나올 뿐이지 그 과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충분히 알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뿌리다'와 '심다'가 혼돈을 가져올 수 있는데, 이들은 밀을 심을 때 우리가 메밀 심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니 그건 심는 것도 되지만 정확하게는 '뿌리는'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씨를 뿌릴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한 줌씩 집어서 휘이휘이 던지듯이 뿌릴 때(심을 때), 그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 씨앗들이 어디에 떨어지는지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오로지 농부는 씨가 뿌려진다는 것만으로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 오로지 '씨를 뿌리는 기쁨에 취해 있는 것이지, 그게 얼마나 결실을 맺을지 또는 그렇지 못할지를 미리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간과하고 다른 것을 본다는 것은 그릇된 성서 해석이 되는 것이고, 그 일면이 바로 '성공주의'인 것입니다. 결과, 즉 열매에 이야기를 집중하고 생각을 몰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결과에 관심하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그 일'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농사 지어본 분들은 아시잖아요?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결과주의로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한다고 합시다. 단지 씨를 뿌리는 일이 열매만을 기대하고서 하는 일이라면, 형편없이 여기저기 뿌려지는 씨앗 뿌리기를 계속할 농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저 씨를 뿌리는 기쁨에 취해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천국의 씨앗을 얼마나 많이 뿌렸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배신하고 돌아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씨를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별반 소득을 보지 못 하시면서도 자신을 한 톨의 밀알처럼 세상에 심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런 세상 사람들 속에서도 씨 뿌리는 사람이 기뻐하며 씨를 뿌리듯이 그렇게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 3자의 이야기로 들어서 교훈이나 의미만 찾을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일로 재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저기 떨어진 씨들의 삶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같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 애를 쓰지만 그렇게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소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린 것처럼, 우리네 삶도 결국은 여기저기 흩어진 씨처럼 험한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실패만 거듭합니다. 씨앗들의 운명은 바로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며, 지금 우리네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교훈'이 아니라 생존의 실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인생도 마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 일과 같구나! 열심히 해도 뜻한 대로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 그래 인생도 그런 거야!'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위로를 얻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데 예수님이 다시 이러시는 겁니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었다."

이 말씀이 무슨 뻥튀기 같은 말씀이 아닌 줄 이제 아시겠지요? 단지 씨를 뿌리는 기쁨으로 씨를 뿌리는 농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는 기쁨으로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렇게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여 인생을 포기 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러 발생하는 뜻밖의 기쁨이 씨 뿌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기뻐하며 씨를 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농사를 망쳤다고 다시는 농사짓지 않으려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다시 씨를 뿌리는 기쁨을 맛보며 농사를 짓는 것은 그 뜻밖의 일들, 더러 발생하는 기쁨 때문에 농사를 계속 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 일이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30배, 100배, 60배는 우리가 써먹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뜻대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기뻐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밭에 씨 뿌리는 사람처럼 기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더러 발생하는 결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뜻밖의 기쁨을 얻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군중들이 들으면서 자신들의 험악한 인생살이에 대해서 희망과 위로를 가졌을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분발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졌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해서 이루어져 가는구나!'하고 알게 되지 않았겠어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처럼'그렇게 부지런히 씨 뿌리는 즐거움으로 일하는 중에 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성공주의적인 시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그리 사셨듯이, 우리 생의 전부를 바쳐서 끈질기게, 낙심하지 말고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으로 해야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혹 30배, 60배, 100배의 예기치 못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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