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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7: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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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5.16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인생 그리고 야곱의 삶
창47:1-12
'제가 누린 햇수는 짧고 그저 험악하게 떠돌며 살다가 세월을 다 보냈습니다.'(47:9)
이 말은 야곱이 이집트 왕 바로에게 한 말입니다. 그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서 이집트 총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집트로 내려 온 것이고, 요셉의 안내로 바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자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백년 하고도 삼십년'이라고 하면서 한 말입니다. 야곱은 고대 근동의 관례를 따라 축복을 빌었을 것이고, 왕은 그저 예의 삼아 물었을 것인데, 자못 야곱의 대답은 진지하기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나이만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것, 그가 평탄치 못한 세월을 살아온 것까지 고백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바로왕과 야곱의 모습은 극히 대조적입니다. 바로는 한 나라의 왕이고, 야곱은 떠돌이 난민의 족장입니다. 바로는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지만, 야곱은 먹을 게 없어서 쌀을 꾸러 가족을 데리고 남의 나라까지 온 처지입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왕 앞에선 초라한 나그네 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적어도 바로 왕 앞에서 풀죽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그런 야곱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가 묻지도 않은 것까지 밝히는 당당함이 엿보입니다. 바로와는 정 반대의 처지인데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가 야곱을 통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근본적인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 대답을 할 당시 야곱의 나이는 130살이었습니다. 야곱의 대답들은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요약할 때, 특히 나이 들어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남에게 하고자 할 때는, 잘 살았든지 못 살았든지, 못한 것, 실수 한 것, 누추한 것은 빼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랑이 될 만한 것만 요약하게 됩니다. 야곱도 그런 경력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라는 것은 그가 자랑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상 대대로 떠돌이로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도 떠돌이 생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볼 때도 분명히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 고생만 하는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그걸 '성공 이데올로기'로만 읽으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책이 나오고 나서 출판사 사장과 서울의 큰 책방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종교서적만 있는 코너를 오랫동안 보다가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성공한 이야기'가 주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망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성공주의'를 지향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야곱을 '성공한 인생의 모델'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설교하고 믿는다고 복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시대적인 문제는 허황된 성공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할 일인 것입니다. 야곱은 그 많은 시련 속에서, 무수히 많은 도전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의 뜻대로 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는 가장노릇도 훌륭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당당한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의 초라함, 궁색한 변명, 처량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실 배가 고프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이끌고 이집트까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을 찾아가는 일도 만만치 않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런 일상의 체면 따위를 개의치 않습니다.
"주께서 분명이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28:16).
야곱이 에서와 아버지를 속인 다음에 그들을 피해서 도망을 가다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게 됩니다. 그 때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한 말이 28:16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낱 꿈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 권을 받긴 받았 지만, 그의 앞날은 온통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의 일로 인해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지니게 됩니다. '어디에도 하나님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출이후의 야곱의 인생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좌표였습니다. '어디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늘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이리 잘되게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사고는 '좋은 일'의 경우만이 아니라 '나쁜 일'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돌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기를 '벧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17-19). 야곱의 인생관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의 삶의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그 형편으로 인해 사람이 변할 일은 없습니다.
얍복 나루터에서의 이른바 '거룩한 싸움'이란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적인 서술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면 반드시 죽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밤 새 싸운 그 존재가 축복을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름을 물어 보았지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에게 일어난 간밤의 사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하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입니다. 지금 당장 야곱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도망자이고, 얼마나 그렇게 떠돌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곱은 말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그리고는 그가 선 자리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야곱이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정황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그 이후 자신의 삶의 처지에 대해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삼촌 집에서 지낸 굴욕의 수 십 년도 그에겐 대수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성공'아니면 '실패'라는 두 경우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얼굴'을 그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한 번도 생애 중에 복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부모로부터 멀어지고, 형제와 불화했으며, 아내를 얻기 위해 남들이 하지 않는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렇게 얻은 아내는 아들을 낳다가 죽고, 배고프게 지내다가 타향에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복의 사람입니다. 현재가 복된 사람이 아니고, 그 존재가 복된 사람입니다. 뭔 일을 당해도,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31:40을 보세요. 야곱은 이리 말합니다.
""낮에는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것, 이것이 바로 저의 형편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잡으러 쫓아온 사촌 라반에게, 외삼촌 집에서의 20년을 되돌아보며 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야곱의 삶은 처절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의 삶을 복 받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32:10절에 보면, 형과 화해를 하고 요단강을 다시 건널 때도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35:18에 보면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던 라헬이 아이를 낳고 죽습니다. 라엘은 죽어 가면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었습니다. 자기의 현실이 슬퍼서 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부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가능하면, 사랑하는 아내의 유언과도 같은 아들을 그냥 '베노니'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는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이 어떤 형편에 처해도 그 처지를 처참하게 생각하거나, 부끄럽게 여기거나, 두려워하거나, 감추려하지 않습니다. 순순히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 삶을 긍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생애 일절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틀림없이 언젠가는 하나님이 복을 주실 거라는, 이미 복을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갑니다.
춘천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위암 의심'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이 꼭 죽는 병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우리들의 이해가 극한 상황을 설정하는 병이라서, 저도 그 관례를 따라 질병의 결과에 대해서 그런 설정을 했습니다. <위암>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야곱처럼은 못해도 '태수처럼', <암>일기를 써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자랑거리처럼 질병의 상황을 중계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기를 쓰는 동안에 내 인생을 여과 없이 뒤돌아보고, 질병이후의 시간 속에서 내 의지나, 감정, 신앙과 삶의 변화와 갈등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동안 내가 목사로 살았는데, 수없는 설교와 책을 냈는데, '아는 말'들을 꽤 많이 했는데, 이 시점에서 과연 그것이 내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암>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싫다는 게 아닙니다. 야곱의 삶의 동선을 좇아가다보니까 저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선 나이도 야곱에 비해 1/3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곱만큼 겪어야 할 인간사의 고통을 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것은 경험의 횟수나 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 야곱의 나이보다 턱없이 모자라더라도 괜찮습니다. 중요 한 것은, 하루하루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작고 큰 배신과 분노, 절망과 혼돈,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토해내는 고백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예수 안에서 우리 삶이란, 이 한 가지 사실에 우리 자신이 명백해 지는 것입니다. 처지가 무엇이든, 형편이 어떻든,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복중에 가장 큰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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