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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87 추천 수 0 2012.06.16 23: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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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5:21-2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5.23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막5:21-24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도 그랬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이후 이스라엘은 회당을 중심으로 민족을 재건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의 장이라고 하는 직책은 당시로서는 아주 중요한 종교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예수공동체와 회당공동체의 사이가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런 회당장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하는 것이니,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예수를 모시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끼어들게 됩니다. 야이로 로서는 여간 애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시가 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고 떠나려 하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모셔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식을 가지고 온 이들이 하인인지 어쩐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보아 하인은 아닌 것 같지만, 여하튼 그 소식은 아버지를 절망하게 하고 더 이상 예수님의 행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라" 누구를 ,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직 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인지, '내가 죽은 딸을 살려 줄 것을 믿으라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과, 야이로와는 달리 부정성을 넘어서 보고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주저앉은 아버지, 회당장을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갔을 때 그의 집은 이미 초상집이었습니다. 예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아이의 부모까지를 포함하여, 그들은 모두 '죽음'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합당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들, 다수의 상식이 갖는 관례를 깨고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게 아니라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관성과 다수의 상식에 의지해서 사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죽은 게 아니라는 말에 당연히 반가워 하야 하건만, 그들은 오히려 비웃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야이로에게 '믿어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앞의 내용과 연관지어 본다면, '믿음'이란, 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말고 믿어라'했던 그 '믿음'은, 예수님이 죽은 자기 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 그 말들을 믿지 말고, 살아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나, 야이로의 믿음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말입니다.

자라보고 놀라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별 거 아닌 것을 갖고 겁부터 집어먹고 문제를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모여서 울면서 통곡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예수님을 데리러 왔던 야이로에게 전갈을 왔던 이들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과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설명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가족들이나 이웃들이 우는 것은 당연한 사실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당연한 사실을 나무란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상식조차 거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일반의 사람들에게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는 식으로 나무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상을 과장하여 판단할 때, 예수님은 그 너머를 보고 있습니다. '죽은 게 아니라 잔다'는 말씀은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눈에는 아이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달리다굼'했습니다. 그러자 죽었다고 모두들 말하는 아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즉시 걸으며 음식까지 먹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으니, 예수님은 그저 자는 아이를 일으킨 것입니까? 그게 전부입니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그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에게 가는 동안에도 아이는 사람들 눈에 죽은 것 같은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녀가 일어나 밥을 먹고 걸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꼭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해석이 아니더라도, 죽어가는 아이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중에 일어난 신비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신비는 다들 죽었다고 하는 어떤 현상을 그렇게 보지 않는 눈인 것입니다. 불행에 가려서 볼 수 없었던 가능성을 보고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 능력이야 말로 진정한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부정성을 넘어서 가능성을 보고 움직이는 밝은 눈인 것입니다.

그 아이 주위에서 그저 구경꾼으로 둘러선 사람들은 그 아이가 불쌍하게 죽었다고만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는 이제 있으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 반하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 아이는 그대로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야기의 전체에서 보면,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저 '어린 딸'이라거나 '아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러나 '달리다굼'하면서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킨 이후로는 그녀를 '아이'라고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소녀'가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12살면 되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녀'라는 말은, 단지 어린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인으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죽은 자를 살렸다'라기보다는 '아이'를 '소녀'로 바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버려질 '아이'를, 당당한 구성원의 한 사람인 '소녀'로 바꾸어 놓는 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놀라움이 있는 것입니다.

영국 버밍험대학에 있는 '인스티튜트'라고 하는 작은 미술관에는 세 개의 화판으로 된 중세풍의 그림이 있습니다. 왼쪽 화판에는 아벨의 주검을 안고 통곡하는 아담과 이브가 그려져 있습니다. 중간 화판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을 보며 통곡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의 화판에는 야곱이, 죽은 줄로만 아는 요셉의 화려한 옷을 쥐고 통곡하는 그림입니다. 세 종류의 그림 모두는 자녀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부모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특히 요셉의 옷을 붙들고 우는 야곱의 그림은 더욱 비통합니다. 창 37:34-35은 이렇게 그 장면을 전합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해 애통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롤 했지만 듣지 않고 말하길, '내가 너무 슬퍼 지옥으로  내려가 오셉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야곱이 통곡할 때 실제로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들을 구해 주지 않았습니까? 요셉의 옷을 쥐고 통곡하는 야곱의 실상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통곡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 야곱은 인간의 통곡 너머에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버밍험대학교의 세 그림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교훈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식적인 눈이기도 합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바로 그 야곱의 통곡에 매몰되지 않고 그 통곡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더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도 그것에 휩 쓸려 가지 않고, 그것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행복을 볼 줄 아는 눈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눈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 더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맞닥뜨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하여 앞이 캄캄해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모습은 바로 야곱의 모습이 되는 것이고, 회당장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아이와 죽은 아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이 우리 삶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은 줄 알고 호들갑을 떨면서, 그들 말만 듣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회당장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표면적인 허상에 사로잡혀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 슬픔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를 보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게 '달리다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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