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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5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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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6.6.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믿음의 방법을 바꿀 때 입니다.
요6:53-56
대학교 3학년인 어떤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의 청년부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갖는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해 교회는 믿음직스러운 답을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흡족해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은 대부분 영적인 허기를 갖고 있습니다. 허기만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죄의식과 자기 콤플렉스도 깊어집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죄를 씻어주고 벗겨 주어서 '자유'하게 해 주는 분이 아니라, 죄를 생산해내는 분이고, 부단히 죄책감을 만들어 짐을 지우는 분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늘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예수 때문에 욕망을 꺾어야 하고, 예수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서 산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원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방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믿음의 원칙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원칙을 실행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갈릴리 사람들에게 가르친 예수님의 방법은 이랬습니다.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천한 직업에 종사했고 그것을 대물림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직업상의 이유로 율법을 지킬 수 없었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굶주리며 사는 것도 힘든데 거기다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이나 귀신들림이 많았고 온갖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용서해주었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에서 예수는 치유의 말씀 대신에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율법학자들은 하나님 한 분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면서, 예수를 신성모독 죄로 걸고넘어졌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의식을 관장하는 주체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온갖 종류의 속죄제사와 제물들을 관장하면서 이권들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한 까다로운 규정에 따르면 죄책감을 갖지 않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서 부단히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속죄제물을 드려도, 돌아서면 다시 죄에 사로잡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수염이 깎아도 자라듯이, 죽순이 잘라도 자라나듯이, 그들의 죄의식은 매일의 회개나 속죄 제사로는 없앨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이 너무 마른데, 성전 제사장들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사죄의 물은 감질 나는 한 방울, 또는 한 숟가락의 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믿고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일회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 대신에 근원적인 해결을 시도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모금의 생수가 아니라, 아예 사람들의 배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37-38에서 예수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중물의 원리와 같습니다. 마중물은, 펌프로 땅 속의 물을 퍼 올릴 때, 먼저 펌프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입니다. 땅 속에는 물이 무진장하게 있지만 그 한 바가지 물이 없으면 그것을 퍼 올릴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생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기들 속에는 선한 것은 없고 죄만 가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철저히 그렇게 세뇌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속에 선함이 있는 것을 보셨고, 생수가 지하수처럼 무궁무진하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그것을 퍼 올릴 한 바가지의 물이 없어서 목마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친히 그들에게 한 바가지 마중물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였습니다. 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주시는 밥(빵)을 배부르게 먹었을 때, 이제 그들의 손에서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빵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거지처럼 누구에게 기대서만 밥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직접 자신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할 수 있다는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대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날 먹어라, 날 마셔라. 그래서 날 살아라. 나는 너의 속에서 살고 싶다. 네가 나를 대신 살아라." "나는 너의 빚을 한꺼번에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왜 너는 자꾸 내게 다시 와서 일수를 찍겠다고 하느냐. 난 너하고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 어린 시절이나 과거에 잘못 출발했다는 느낌에서 해방되어라. 나는 나 자신을 너에게 음식으로 내어 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예수님이 내 속에 와서 살 뿐 아니라, 내가 예수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즉 나를 대신해서 사는 예수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예수 안에 있도록 존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빛나는 전통이나 사명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나의 삶도 중요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강제로 하거나 억지로 하거나 부채감을 갖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배고픈 아이가 엄마 젖을 먹듯이, 허기진 우리가 예수를 실컷 먹으면 됩니다. 나의 허기가 무엇인지 발견하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또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면서 그게 '참된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감히 예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료란 우리가 목마를 때 마시는 것인데, 예수의 거룩한 피를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빵을 먹듯이 예수를 먹어야 하고, 목마를 때 음료수를 마시듯이 예수를 마셔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회성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목이 마릅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한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삶은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삶의 일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에 허기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부진해지면, 자신을 처음 가르친 선생에게 가서 '폼'을 교정받거나, 새로운 폼을 익혀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극도로 부진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런 때는 새로운 '폼'즉, 다른 믿음의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종교의 대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허기진 사람처럼 예수를 먹고 마시는 믿음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입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프랑소와즈 돌토는, 사람들이 먹은 빵과 물고기는 그들이 앞으로 먹게 될 또 다른 양식의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양식은 물론 예수의 몸입니다. 예수의 몸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죄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니 죄의식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갓난아기는 어머니 젖을 빨 때, 아이는 어머니를 먹는다고 상상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진짜 아기에게 먹힙니까? 아닙니다. 그 '먹고 먹힘'의 비유적인 일로 인하여 어머니와 아기는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먹힘으로 인해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또 먹음으로 인해 아기는 어머니의 말과, 눈이나 얼굴 표정들과, 어머니의 가슴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이 허기(虛飢)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님은 그렇게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먹으라고 내줌으로써 그들을 결핍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또 그들과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또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삶을 이어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다가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것이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젖을 떼려고 하면 아이는 자기가 뭔가 잘못을 해서 엄마가 그런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움이나 재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벌을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죄는 '분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내 준 것은 이런 죄책감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어머니의 젖을 먹듯이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신앙이 아니라 예수를 '먹는'신앙 말입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서 젖을 떼는 것은, 아이가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어서 그러는 겁니다.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삶에서 당하는 재난과 고통, 질병과 죽음 같은 것들은 그 자체의 이유가 있을 뿐 하나님의 벌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씻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태어나서 젖을 떼면서 가지게 되는 "원죄"를 씻어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내 피와 살을 먹고, 나를 먹어라. 다 나에게로 와서 나를 만나고,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하나님은 그와 같은 네 속에 살아계신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방식은 어때야 합니까? 오고가면서 물 한 바가지 얻어 목을 축이듯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든 나그네쯤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희생당한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됩니다. 허기진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방법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도신경이나 어떤 교리를 외우고 설렁설렁 교회를 다니는 신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갈릴리 사람들처럼 예수를 '먹는'믿음으로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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