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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이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679 추천 수 0 2012.06.16 23: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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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14-1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7.4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이
막10:14-15

우리교회 '영혼의 약국'에서 하는 일 중에 '신학강좌'라는 게 있습니다. 주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동부연회와 다른 연회의 젊은 목회자들을 섬기려는 뜻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강사료, 식사대, 강사의 저서를 구입하여 참가자들에게 선물로 줍니다. 이 모든 비용을 '영혼의 약국'이 부담을 합니다. 격월로 모이는데, 그 때마다 익명의 후원자들이 돕곤 했습니다. 본래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것은 '목회자들의 인문학적 사유를 넓혀보자'는 것이 그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이란 게 본래 방대하고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강좌가 별반 진보 없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어느 날부터, 서울의 100주년 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이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라야 21세기의 교회와 교우들의 영적진화를 도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영혼의 약국 신학강좌'도 본래는 이걸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난 가을에는 2박3일의 프로그램을 짜기는 했지만, 막대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만 계획만 하고 멈추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저로서는 이재철 목사님이 하시는 '인문학 강좌'가 부럽기도 하고, 형편의 한계에 마음 아프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지녔던 의식과 사고를 펼쳐 놓기엔 우리의 여건이 맞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번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작은 책 한 권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잠 안 올 때 읽겠다고 가져갔던 니체의 철학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다른 인문학 선생들을 불러다 들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나라도 '인문학과 신학의 다리'를 놓아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이른바 '인문학적 설교'로 시험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성서]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성서의 표현으로 하자면 '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모든 사람들은 '보통 사람'을 극복하고 '초인'즉, '참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거나, '십자가의 사람'이 되라거나,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초인'이라고 하니까 '슈퍼맨'같은 '초능력자'를 말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초인'은 주체적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극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자유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인'의 반대는 뭘까요? 성서로 말하자면 '육의 사람'이고,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빌리면 '인간 말종'입니다. 이는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기존의 질서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그는 '인간 말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초인'즉, '참 사람', '자유인', '새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신이 변화 되어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1) '낙타의 정신'입니다.

얼마 전에 '낙타 무릎'이라는 신앙서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낙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꼭 닮아야 되는 상징적인 동물입니다. '무릎'은 신앙인들이 겸비해야 할 필수 덕목으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니체는 아닙니다. 사실 저는 그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금욕과 복종'입니다. 낙타는 전통과 명령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져야만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가장 무거운 게 뭔가?' 낙타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걸 생각한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노예의 근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낙타처럼 노예의 근성을 쫓아 무거운 짐을 지고 들어가는 길은 '사막'입니다. 낙타처럼 살면 삶이 사막화된다는 것입니다. 겁이 많은 낙타는 두려움 때문에 복종한답니다. 이렇게 낙타처럼 맨 날 무릎을 꿇고 살면 스로의 욕망이 좌절되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어서 그만 그 정신이 '르상띠망'이 된다는 겁니다. '르상띠망 Ressentiment'이 뭔가 하면 '원한'의 감정입니다. 무서움 때문에 무릎을 꿇고는 살지만 그 속에는 원한의 감정이 쌓여 간다는 것입니다. 이 '르상띠망 Ressentiment'이 자신에게는 '죄의식'을 가져오고, 타인을 향해서는 공격적인 분노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낙타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억압을 타인에게 분노로 표출하면서 원한을 풀려고 합니다. 이런 단계의 정신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덮어씌웁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 방어를 삼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억지로 '낙타무릎'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니체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정신단계에 머물러 있으니까 말입니다.

2) '사자의 정신' 단계입니다.

사자 아시죠? 사자의 정신은 용감하고 자유로운 정신 단계입니다. 그것은 인습을 비판하고 불의에 저항합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두 번 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전통의 질서에 저항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옛 주인 되는 용과 대결하기를 서슴치 않습니다. 사자는 자유를 창조하고 부과된 관성을 신성하게 거부합니다. 사자는 말합니다. "사물의 모든 가치는 나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고 말입니다. 사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무엇을 획득하려고 결코 무릎을 꿇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자가 자유를 쟁취해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부정의 정신이 긍정의 정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다음의 존재가 할 수 있습니다.

3) '아이의 정신' 단계입니다.

어린아이 말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어린아이가 되라'하신 그 아이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악수하게 됩니다. 낙타 같은 사람들만 많으면 비겁한 세상이 됩니다. 세상은 정신병동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자의 정신 단계로 변화되어 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자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자유와 창의적인 존재들은 있지만 조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 째 정신 단계인 아이가 되면 인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저항하고 투쟁에 주력하는 인생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아직 사회 진화의 단계가 '사자'의 사회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투쟁과 정의를 외치고 있으니까요. 사자는 비판하고 부정하지만 아이는 자기와 세계를 긍정합니다. '자기와 세계의 긍정' 이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아이의 정신은 순수이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입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말합니다. "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거룩한 긍정이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을 그대로 봅니다. 아이는 '르상띠망 Ressentiment', 원한이나 분노를 망각합니다. 아이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발명합니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좇아서 자발적으로 놉니다. 아이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합니다. 이렇게 아이의 정신 단계를 지닐 때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고,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는 니체의 생각을 성서로 옮겨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 할 때도 여전히 '믿음'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각자의 정신 단계 또는 믿음의 단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단계를 믿음에 견주어 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렇습니다.

1)전통적인 믿음의 단계입니다.

마가복음 7장은 유대교의 특성으로 전통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하고 이어지는 말씀들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믿음에 대한 것들입니다. 자주 드린 말씀이지만, 서기 70년 이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망하고 나서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제2 성전 시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의와 율법 준수를 통해 붕괴된 민족과 신앙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전통과 제의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명만 남고 삶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만날 수 없고, 인간관계는 왜곡이 됩니다. 이런 율법주의의 폐단은 또 있었습니다. 복종을 내면화 시키게 되고, 그로 인하여 분노를 축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마음에는 나쁜 감정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한 번 문제가 터지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악폐스러운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위선적이게 합니다. 원한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배타적으로 대함으로써 결속력을 강화합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증오심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반대로 그들 지도자들은 민중에게 무자비했습니다. 율법은 죄인들을 대량 생산했습니다. 이게 낙타와 같은 믿음의 단계입니다. 전통적인 믿음 말입니다.

2)사자와 같은 정신 단계를 믿음으로 보자면 무엇에 해당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자는 바로 '십자가의 믿음'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낙타 같은 믿음'인 율법적인 믿음 대신에 '사자 같은 믿음'즉, '십자가의 믿음'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8:34-35, '예수께서 제자들과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십자가는 부정의 정신입니다. 노예처럼 복종하는 정신이 아닙니다, 낙타가 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곡된 진리에 구속되어 있는 자기를 부정하고, 헛된 욕망에 집착하는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비판과 저항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은 전통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것입니다. 저항은 고난과 희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고난이며, 희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하나님으로 숭배하지 않고, 정통 유대교를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게 아닙니까? 십자가는 저항과 반역의 중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믿음입니다. 초기 복음시대의 순교자들은 모두 이 '십자가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도 십자가의 믿음을 강조했습니다(고전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바울이 왜 십자가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정통 유대교를 비판하고, 로마제국에 저항하려면 '십자가의 믿음'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십자가' '십자가'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툭 하면 '십자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아니라 이렇듯, 저항과 희생의 자기 정신 속에서 삶으로 고난이나, 희생, 죽음을 각오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지녀야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무슨 덕이나 볼 줄 알고 '십자가의 믿음'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또한 거부해야할 전통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자가 가득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단계'로 나아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3) 니체가 말하는 '어린 아이 정신단계'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낙타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믿음도 아니고, 십자가의 믿음도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믿음이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되라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낙타도 아니고, 사자도 아닙니다. 전통도 모르고 분노나 비판이나 저항도 모릅니다. 보잘 것도 없습니다. 헤롯 대왕에 대비되는 아이가 이래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왕궁이 아니라 동굴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동굴 속에 있다는 왕궁과의 비교의식을 모르는 존재가 어린아이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믿음인 것입니다.

낙타와 사자와 어린이 가운데,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어느 단계일까요? 우리는 낙타의 현실을 거부하고, 사자의 부정을 넘어서, 어린아이의 절대긍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것은 낙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장로들의 전통에 매인 믿음을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낡은 법'이라고 했습니다.

내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댓글 '2'

아휴

2013.08.21 21:16:29

님 좀 난독을 하셨어요 제대로 읽으셨으면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시 읽어보기를 바라며 차라투스투라를 욕되게 하지 마세요

학생

2013.12.09 00:41:52

철학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만 윗분 의견과는 다르네요. 많은 중세 신학자들이 고대 철학을 사용한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해석은 '자유롭다'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의 '신앙'이 없던 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다른 신학자들이 '신앙'의 철학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이 분은 니체의 철학속에서 신학의 근거를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모든 철학을 정독한 것이 아니라 다소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읽고 이런 해석도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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