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2:4-9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7.18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드디어 [사람]을 만들다
창2:4-9
“인간은 흙과 하나님의 생령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이죠. 만약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떠나게 되면 인간은 한줌의 흙(티끌)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인간이 존엄한 까닭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은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존엄성은 자신이 그 주인을 인식을 하던 못하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표현 방식은 고대바벨론의 창조신화인 에뉴마 엘리쉬(Enuma Elish:주전1900-1700년)에서 빌려 온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둑(남신)이 티아맛(여신)을 죽여서 세계를 창조하는데, 마르둑은 적군의 총사령관인 킹구를 제압한 후, 그의 피와 흙을 섞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고된 노동의 의무를 부과합니다. 즉, "인간〓흙+반란자의 피"인 셈입니다. 성서는 수세기전 신화인 이 양식을 그대로 차용하지만 반란자의 피 대신 하나님의 영을 말함으로 전혀 다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고된 노동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반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나누어 갖고 그에게 영광 돌리는 존재로 보는 새로운 인간관이 생겨난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창조신화인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주전1700-1600 년)역시 인간창조에 대해서 말하는데, 여기서 신들은 두 가지 계급이 있습니다. 높은 계급의 신은 놀고 쉬며 낮은 계급의 신은 일을 해야 했는데, 이로 인해 낮은 계급의 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신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신을 대신해서 노동을 전담하게 할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신화에서 휴식은 신들과 관련되어 있고, 노동은 인간에게 한정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일하는 것과 휴식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는 인간사회의 계급을 반영합니다. 이 신화들은 노동을 특정한 계급에 부과된 의무로 이해하며, 그의 대가로 휴식을 전담하는 또 다른 유한계급의 존재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의 노동은 소외되어 있습니다. 노동은 고통과 강제된 의무로 이해 될 뿐입니다. 또한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관계에 의해서 철저하게 소외되어지고 이지러져 있습니다.
이에 비해 성서의 노동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일하셨으며, 인간의 안식의 근거는 하나님의 안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앞에 있었던 이야기들로서는 대단한 반전입니다. 이와 같은 안식의 의무는 집안의 식객은 물론, 종들과 가축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하며 땅까지도 쉬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출애 20,8-11).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의 이유를 자신들이 땅을 혹사시켜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 땅에 안식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레위 26,34-35). 여기에는 노동이 소외되어 있지 않지요?. 모두가 함께 일하며 모두가 함께 쉬며 복되고 창조적인 것이 바로 [노동]입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했을까요? 창 2,15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을 돌보게 하셨다(Abad: 돌보다, 일하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은 놀고먹는 곳이 아닙니다. 노동은 삶을 풍요케 하는 적극적인 기쁨이며 자기를 실현해 가는 도구로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인간다움의 표현이죠. 만약 인간에게 노동이 없다면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겠습니까? 음악가에게 연주를 못하게 하고, 건축자에게 집을 짓지 못하게 한다면 그 것이야 말로 바로 지옥일 것입니다. 문제는 노동이 소외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놀고먹고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해야 살기도 힘들고, 누구는 평생 알아주지도 않는 단순 가사 일에 일생을 묻어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이란, 우리가 사는 일터입니다. 그 일터에서 창조적인 자기 발현의 장이 됨으로, 저마다 기쁨으로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가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만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주변 환경(동산), 그의 양식(동산의 과일), 그의 일(창2:15), 그의 공동체(18절 이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등을 만드셨는데, 이 모든 것을 '인간창조의 과정'으로 보았고, 이것의 총체성(totality)으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 자체뿐만이 아니고, 그가 속해있는 주변 환경, 양식, 주거, 직업,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가 갖추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인간의 창조가 완료되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대에 인권을 말할 때, 상당히 소극적인 방법으로 '인권'을 말해왔습니다. 누가 갇혔다든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든가, 고문이나 부당 해고를 당했을 때 인권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즉 인권이 침해당했을 때 그것을 지켜내는 개념으로 인권을 말해왔어요. 이것은 지극히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인권입니다.
창조이야기는 적극적인 의미로 인간을 말하며, 적극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돈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배고픈 사람이면 먹을 수 있는 권리(신 23:24-25), 누구나 먹고, 잠자고,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주거권, 자기가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권리, 자기의 건강을 누릴 권리,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나고 사귈 수 있는 권리, 그 위에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권리 …… 등이 인간창조의 완성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총체성이 복구되지 않고 동떨어진 인권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랑 '사람'이라는 형체만 만드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사람을 만들다'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딤전 2:11-15)
여러분은 이 말에 ‘아멘’하지요? 그러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된 사람 아니고는 적어도 이 말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가 우월한 이유를 두 가지 듭니다. 순서로 먼저 지음 받았고, 여자에게 속임을 당해 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자의 우월성은 일종의 '손해배상'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창조되었습니다. 먼저 지음 받은 '아담'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인류'라는 뜻입니다. 남자는 이쉬(ish)이고, 여자는 이샤(isha)입니다. 이 구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입니다. 번역에서는 그 맛이 깨집니다. 원어로는 "ish에서 나왔으니 isha라 하리라" 예를 들면, "곰에서 나왔으니 곰탱이라 하리라"와 같이, 말의 맛을 살린 언어유희적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처음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나타납니다. 하긴, 여자가 없는데 어찌 남자가 있겠어요. 아담은 남녀의 구분전에 사람, 인류를 말할 뿐입니다. 여자가 생기니까 동시에 남자도 생겨났습니다.
또 영어의 Man을 사람 또는 남자로 보듯이 아담을 남자로 본다고 하면, 창2:17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여자는 생겨나기도 전에 남자에게 주신 명령이 아닙니까? 그때 여자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여자에게 뒤집어씌워도 되나요? 적어도 둘 중에 하나를 말해야지 둘을 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 2:18에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개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존재'로 지음 받았으니, 남자 시중이나 드는 것이 여성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에첼(ezer)인데, 이것의 동사형인 아찰(azar)은 주어가 하나님일 때만 쓰는 동사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는 존재'란 뜻으로 봐야 됩니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그(남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돕는 짝을 주셨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배필이란 말 크네그도(kenegdo)역시 '대등한 위치의 상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남녀관계는 사랑과 존경으로 이루어지는 남녀결합을 말합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 2:23) 이보다 더 한 사랑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어요? 남녀는 구원의 동반자로 서로 보완, 성숙해 가면서 완성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 알몸으로 어울려 살되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완벽한 조화와 완전한 개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꾸며대지 않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에 자기를 꾸며대고 치장하며 삽니까? 주변의 사람들과 말할 수 없는 벽을 쌓고 그 담 안에 스스로 갇혀 답답해하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래 에덴에서의 이상적인 관계는 남녀, 빈부, 신분, 학력, 나이 등등의 모든 차이가 갖는 배타성을 극복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회였습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누구를 부끄러워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