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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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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9.12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고향 가시기 전에 들어 보세요.
마태1:23
추석은 왜 기대되고 설레고 기쁜 겁니까? 왜 고향을 떠났던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까? 이걸 한 단어로 압축해 보라면 어떤 것이 될까요? 그렇습니다. [함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함께]의 개념은 우리의 삶에만 적용되는 키워드(keyword)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신학에 있어서도 이 [함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keyword)가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아 볼 것인데, 두 어 주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우리들 사이'즉 Among 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도 역시 [함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이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죠. 이것도 따지고 보면 큰 의미에서 [함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와 함께, 우주의 시작과 함께 내가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으로부터'도 '하나님과 함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마1:23은 뭐라고 합니까?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인용문으로서 이사야 7:14의 번역을 따른 것입니다. 핵심이 되는 용어 임마누엘은 임마(with) 누(us) 엘(God)을 말하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우리-함께의 거꾸로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도 맨 앞의 가장 중요한 단어 With에 영향을 받습니다.
창 1:26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모습을 본따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라는 복수 명사로 나타납니다.
아니 ‘하나’님 아니신가요? 유일하신, 하나이신 분 아니신가요? 그런데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라니요.
신학자들의 설명대로 이것은 삼위일체를 말한다고 하기도하고 고대 다신론의 흔적을 반영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합니다. 숫자의 놀음에서 벗어나 봅시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Elohim입니다. -im은 히브리어의 복수 명사를 표시하는 어미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수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로서는 존재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 일 때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존재)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인식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존재는 인식되려면 반드시 비존재가 있어야 되고 존재 아닌 것으로부터 조명 되어야 합니다. 존재가 존재 자체로 있을 때는 아무런 인식도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행동도 일어나지 않고 더더욱 사건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외적 존재(他)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홀로 완전하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과 관계의 세계 안에서 하나는 그것 자체가 고통이고 불가능성입니다. 하나님 안에 살아있는 관계의 역동성, 그 모양대로, 그 형상대로 우리가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를 홀로 있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역시 당신과 같은 관계 안의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고정된 실체에서 자신을 찾지 않으십니다. 역동적인 관계, 그 관계와 관계가 얽히고 섥혀 만들어내는 생명력과 역동성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주를 운영하시고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상대를 필요로 하십니다. 고독을 느낄 수 있고 고독 때문에 괴로워하는 하나님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창조하십니다. 피조된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고립된 체계가 아닙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한번 행사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자 완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홀로 계실 때 완전하신 하나님, 상호관계를 초월해서 독존하는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고 하나님께서 하셨듯이 홀로 완전하신 하나님이 결코 좋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사랑이니 관계니 하는 말들은 그의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단지 그의 장식물과 액세서리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란 것은 그분 홀로 존재하고 홀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그분 자신 안에 여러 인격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완전하시다는 말입니다. 혼자 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럿과의 관계가 시작될 때 그 완전성은 흔들리고 상대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상호관계에 의해 휘어지고 때로는 밀쳐지고 당겨질 것입니다. 그 모든 관계 안에서, 상호성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완벽하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완전성입니다.
둘째, 우리는 무엇입니까? 이것 역시 맨 앞의 가장 중요한 단어 With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고 자아는 무엇입니까?
데카르트 이후 서구사회는 자신의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존재라 일컫고 불변의 실체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이성 위에 합리성이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통하는 새로운 효율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서구의 근대문화를 구축했습니다. 이것이 이성을 근본으로 하는 근대, 모더니즘을 연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객관적 실체로서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분량이 되었을 때, 바울사도의 내가 유대사람을 만나면 유대사람 같아지고, 헬라인을 만나면 헬라인 같아지고, 이방인을 만나면 이방인처럼 대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저런 줏대가 없는 사람, 저 사람은 자아가 없구나! 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존재의 갭을 죄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본래 정형화된 존재가 없습니다. 고정된 자아가 없습니다. 자아니, 존재니 하는 것을 골방에서 확정판결 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 관철, 설득, 입증하려고 한다면 그는 일시적으로 설득력 있는 사람으로 통할지 모르나 그 사람이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그는 독재형이고, 고집스러운 인간형, 폭군적 인간형이기 때문입니다. 주체, 자아, 존재니 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성 안에서 형성되어야지 골방에서 홀로 형성되는 독단적 의지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주체니, 자아니, 존재니 하는 좋은 말로 입혀온 것이 근대문명, 서구문명입니다. 그래서 서구문화가 유달리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건축도 효율성을 중시하다 보니 요즈음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빌딩 형태의 건물로 통일 되었습니다. 사실 그 민족의 특성에 맞는 수천 년의 건축의 독특성들이 있는데 모두가 하나의 회색 콘크리트 빌딩으로 통일된 것이지요. 이렇듯이 서구 문화의 합리성, 효율성은 모든 문화 위에, 모든 정치, 경제적 제도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강력한 폭력성을 띄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아라는 것이 물과 같아서 이 사람을 만나면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저 사람을 만나면 또 그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와 만나 그를 알고 닮아가며 배워가는 과정에서 상호적인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지 어디서 독불장군 같은 자아가 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만나 그를 듣고 알고 이해해가며 서로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 삶의 과정입니다. 나의 입장을 설득하고 관철시키고 입증하려는 삶은 도둑놈의 삶이요, 폭군의 삶입니다.
자아가 있다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들을 향해 열려있는 수용성이 자아의 본질, 존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계의 완전성을 본받아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들과의 나눔과 사귐 안에서만 인간다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자아’니 ‘존재’니 하는 것들이 동떨어진 개별적 존재 안에 형성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혼자 차고 있는 주머니가 아니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역동적 관계 안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With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그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해 수렴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되길 원하고 하나이길 갈망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체로 나누어져 있는 한, 물론 각자의 개체는 우리 삶의 호기심 넘치는 다양성을 가져다주고 또 다른 개체들을 만날 수 있는 가슴 설레임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줍니다. 이 개체들은 서로 하나 되기를 갈망하고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져 있는 개체로 되어있는 한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라 하더라도, 혈육을 나눈 부모와 자식간이라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없고, 존재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be with) 할 수는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을 해서도 하나가 되지는 못하지만 함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있기 위해서 가정을 갖게 됩니다.
오늘 이 여기서는 본문의 특별한 구조를 따라 따른 의미 하나를 찾아보겠습니다. 영어에 능통하지도 않으면서 영어 문장을 내 놓는 까닭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 영어 문장이 잘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마1:23의 골격을 이루는 이사야 7:14을 문자대로 번역하면, “the young woman conceive(harah).....son...."입니다. 이것을 The Jerusalem Bible은 ”Look! the virgin is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whom they will call Immanuel a name Which means 'God is with u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harah(conceive, become pregnant)를 with chil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king James, New American Standard, 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사야의 명백한 임신한다는 단어 harah를 마태가 희랍어로 번역하면서 “will have in womb" 직역하면 ”자궁 안에 갖는다“는 뜻인데, 왜 임신한다는 한 단어를 풀어서 자궁 안에 갖게 된다고 촌스럽게 풀어서 표현했을까요? 이렇게 풀려져 있는 말을 영어 성경은 the virgin is with child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God (is) with us"와 문형을 맞추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위에 열거한 영어 성경은 그 문맥을 살려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마누엘'은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임신하셨다는 뜻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자신의 자궁 안에 품으시고 우리의 피와 혈통과 가계를 새롭게 하시어 위대한 구원자의 반열에 세우시며 당신의 친자인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존재를 전혀 새롭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추석에, 흩어졌던 식구들이 귀향하여 재회하려는 강렬한 인습적인 관성은 이런 원초적이고도 시원적인 신학의 함축성을 갖고 있습니다. [함께]는 그 대상이 신이던지, 사람이던지, 식물이던지, 동물이던지 '나와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의식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본은 나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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