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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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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21,22,3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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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6.11.5 http://www.nosuchjesus.com |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21,22절)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5절)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절)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 노예의 몸값에 해당하는 은 30냥을 받고 팔아넘긴, 그것도 바로 그날 저녁 식사 때에 당사자인 예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아 회개를 할 수 있었는데도 사단을 따라 간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악독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그것도 예수님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예언을 바로 전에 분명히 듣고도 배반한 사건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자의 예로 꼽힙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마치 자기는 그렇게 치사하고 더러운 죄와는 거리가 멀며 심지어 그들과는 수준이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건은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설교하여 하루에 삼천 명을 결신(決信) 시키기도 했고 주를 위해 능욕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순전히 가정으로 만약 유다가 오순절까지 남아 있었다면 베드로의 자리에 대신 섰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것은 비범한 자들이라서 그랬습니다. 그들의 품성과 인격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악하고 비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뛰어났을 수 있습니다. 둘 다 열정이 넘치는 적극적인 기질이라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했고 또 하나님 나라보다는 인간적인 공의만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지혜의 영이신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기 전이라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선 유다는 단순히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 아닙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3,4)라고 실토하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이 유대와 로마 당국에서 죄인 취급하면 그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분명히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가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확신하고 고발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돈에 욕심을 내었거나 스승의 능력 발휘, 즉 인간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기대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실현되는 것을 싫어한 사단이 유다가 인간적 공의에 사로잡히도록 스승을 미워하고 배반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입니다.
또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아주 비겁한 자가 되었지만 그 혼자서 스승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염려가 되어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큰 소리 친 것을 지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예수를 취조하는 분위기를 보고는 주눅이 든 것입니다.
성경에는 대제사장의 하속(下屬)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단순히 시중드는 하인이 아니라 실제 무기를 갖고 투옥, 취조, 형벌을 내리는 경호군인들이었습니다. 한 시골의 어부가 요즘으로 치면 정보부 고문실 곁에서 구경하고 있는 셈인데 성령의 힘을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배반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또한 처음에는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해 주시면 칼을 들고 끝까지 싸울 작정이었는데 오히려 야단맞았고 그 스승이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는 판에 혼자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으며 그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저를 비롯한 우리 중 대부분은 사실 베드로에게는 훨씬 못 미치고 유다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과 방불합니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다 도망갔습니다.(56절) 그래도 유다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이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하니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모두가 자기인 줄 찔끔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22절)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 알게 모르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인자를 따르면 머리 둘 곳이 없는 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 주겠다고 해서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3년간이나 따라 다녔지만 도무지 뭔가 나아지는 모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자기들 돈 써가며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스승이 심심하면 자기들을 놓아두고 먼저 죽겠다고 합니다. 차츰 지난 3년이 허송 세월이었던가 후회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 뭔가 화끈한 일을 벌일 줄 기대했는데 여전히 똑 같았습니다.
그런 판국에 스승을 배반할 자가 있다고 하니까 전부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나마 자기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든지 요한더러 스승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시켰습니다.(요13:24) 다른 제자들은 제 풀에 놀랐다가 아무래도 예수님이 자기를 지목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안도했고 잠시나마 스승을 미워하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 양심에 찔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또다시 섣부른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모두들 덩달아서 같은 다짐을 한 것뿐입니다.(35절)
배반할지 모른다는 마음을 이미 품고 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도망간 열 제자들이 유다보다 낫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유다나, 베드로나, 나머지 열 제자 모두가 연약한 죄인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는 사단에 미혹되어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죄를 범했고,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의로운 생각을 했지만 끝까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죄를 지었고, 열 제자들은 생각으로 이미 여러 번 죄를 지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사실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더 낫고 못하고 따질 것 하나 없습니다. 이렇게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 뿔뿔이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과연 어떤 얼굴을 했을까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도저히 계면쩍고 부끄러워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속으로 정말 나같이 비겁하고 치사한 죄인도 없구나라고 가슴을 치는 가운데 오직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누가 높니 낮니, 아니 지난 하루 동안에 누가 잘하고 못하고조차 따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요20:19)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그나마 베드로가 강하게 먼저 나서주면 못 이긴 척하고 따르기라도 했지만 이제는 그부터 가장 주눅이 들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베드로의 눈치만 바라보고 있는데 베드로가 갈릴리로 다시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얼씨구나 잘 됐다하고 또 따라 나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존경받는 사람이라도 하늘을 우러러 죄가 없다고 절대 큰소리 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러는데 사단에 미혹되어 똑 같이 미혹된 세상 사람들 앞에서나 큰소리 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소리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아예 그들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나 유다 같은 자들이 매사에 미지근해 어떤 행동으로도 옮기지 못하는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 같은 사람 앞에서 나는 너희보다는 의롭다라고 큰소리친 꼴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나 그런 말을 듣고 괜히 주눅이 드는 자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선 똑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도 그 사실조차 모르니 여전히 사단에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크신 긍휼과 사랑 안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면서 그 수많은 이적을 보고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마저 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후까지도 그랬는데 성령의 거듭나심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역사하지 않고 과연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인간에게 삿대질과 돌팔매질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배경에 있는 사단에게는 진노를 퍼붓고 예수님의 권세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만 다 같은 죄인끼리는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죄악의 구덩이에서 매일 서로 찌지고 볶고 사는 자들끼리 누가 더 죄가 많으냐 적느냐 따지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두 가지 구분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끼리는 서로 정죄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 의이신 하나님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열의 다툼은 그 세계 안에서만 통하지 하나님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사단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꼴에 불과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끼리는 완전히 정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서로 긍휼이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처음 모였던 곳에선 서로간의 정죄라고는 없었지 않습니까? 더구나 신자는 그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 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그런 계면쩍음과 부끄러움마저 용서 받았지 않습니까? 다 같이 사형수였고 몽땅 왕의 사면을 받아 놓고는 서로 잘 낫다고 다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이 예수 안에 있는 자를 볼 때는 외식하는 자로 밖에 보지 못합니다. 다 같은 죄인임을 모르니까 예수 믿고도 호박씨 깐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도 사실은 매순간 십자가의 사랑 없이는 똑 같이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저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예수 밖에 있는 자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오직 왕의 특권으로 이제 막 사형의 형벌만 사면 받은 죄인이 아직 받지 못한 자를 향해 정죄할 수 있습니까? 우열의 다툼과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긍휼이 그들에게도 미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일 말고는 따로 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자기 가족이요, 친구요, 친지인데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기에 인간끼리는 정죄 대신에 서로 사랑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상상해 볼 일이 하나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 이 땅에서 알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날 때의 분위기가 과연 어떨까요? 세상에서 제대로 서로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도 천국에는 분명히 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서로 계면쩍고 부끄러워 쳐다보지도 아무 말도 못하고 무거운 침묵만 감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지긋이 쳐다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모습을 바라보신 예수님과 같이 말입니다.
11/5/200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21,22절)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5절)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절)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 노예의 몸값에 해당하는 은 30냥을 받고 팔아넘긴, 그것도 바로 그날 저녁 식사 때에 당사자인 예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아 회개를 할 수 있었는데도 사단을 따라 간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악독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그것도 예수님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예언을 바로 전에 분명히 듣고도 배반한 사건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자의 예로 꼽힙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마치 자기는 그렇게 치사하고 더러운 죄와는 거리가 멀며 심지어 그들과는 수준이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건은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설교하여 하루에 삼천 명을 결신(決信) 시키기도 했고 주를 위해 능욕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순전히 가정으로 만약 유다가 오순절까지 남아 있었다면 베드로의 자리에 대신 섰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것은 비범한 자들이라서 그랬습니다. 그들의 품성과 인격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악하고 비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뛰어났을 수 있습니다. 둘 다 열정이 넘치는 적극적인 기질이라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했고 또 하나님 나라보다는 인간적인 공의만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지혜의 영이신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기 전이라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선 유다는 단순히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 아닙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3,4)라고 실토하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이 유대와 로마 당국에서 죄인 취급하면 그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분명히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가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확신하고 고발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돈에 욕심을 내었거나 스승의 능력 발휘, 즉 인간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기대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실현되는 것을 싫어한 사단이 유다가 인간적 공의에 사로잡히도록 스승을 미워하고 배반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입니다.
또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아주 비겁한 자가 되었지만 그 혼자서 스승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염려가 되어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큰 소리 친 것을 지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예수를 취조하는 분위기를 보고는 주눅이 든 것입니다.
성경에는 대제사장의 하속(下屬)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단순히 시중드는 하인이 아니라 실제 무기를 갖고 투옥, 취조, 형벌을 내리는 경호군인들이었습니다. 한 시골의 어부가 요즘으로 치면 정보부 고문실 곁에서 구경하고 있는 셈인데 성령의 힘을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배반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또한 처음에는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해 주시면 칼을 들고 끝까지 싸울 작정이었는데 오히려 야단맞았고 그 스승이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는 판에 혼자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으며 그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저를 비롯한 우리 중 대부분은 사실 베드로에게는 훨씬 못 미치고 유다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과 방불합니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다 도망갔습니다.(56절) 그래도 유다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이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고 하니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모두가 자기인 줄 찔끔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22절)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 알게 모르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인자를 따르면 머리 둘 곳이 없는 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 주겠다고 해서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3년간이나 따라 다녔지만 도무지 뭔가 나아지는 모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자기들 돈 써가며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스승이 심심하면 자기들을 놓아두고 먼저 죽겠다고 합니다. 차츰 지난 3년이 허송 세월이었던가 후회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 뭔가 화끈한 일을 벌일 줄 기대했는데 여전히 똑 같았습니다.
그런 판국에 스승을 배반할 자가 있다고 하니까 전부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나마 자기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든지 요한더러 스승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시켰습니다.(요13:24) 다른 제자들은 제 풀에 놀랐다가 아무래도 예수님이 자기를 지목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안도했고 잠시나마 스승을 미워하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 양심에 찔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또다시 섣부른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모두들 덩달아서 같은 다짐을 한 것뿐입니다.(35절)
배반할지 모른다는 마음을 이미 품고 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도망간 열 제자들이 유다보다 낫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유다나, 베드로나, 나머지 열 제자 모두가 연약한 죄인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는 사단에 미혹되어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죄를 범했고,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의로운 생각을 했지만 끝까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죄를 지었고, 열 제자들은 생각으로 이미 여러 번 죄를 지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사실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더 낫고 못하고 따질 것 하나 없습니다. 이렇게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 뿔뿔이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과연 어떤 얼굴을 했을까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도저히 계면쩍고 부끄러워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속으로 정말 나같이 비겁하고 치사한 죄인도 없구나라고 가슴을 치는 가운데 오직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누가 높니 낮니, 아니 지난 하루 동안에 누가 잘하고 못하고조차 따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요20:19)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그나마 베드로가 강하게 먼저 나서주면 못 이긴 척하고 따르기라도 했지만 이제는 그부터 가장 주눅이 들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베드로의 눈치만 바라보고 있는데 베드로가 갈릴리로 다시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얼씨구나 잘 됐다하고 또 따라 나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존경받는 사람이라도 하늘을 우러러 죄가 없다고 절대 큰소리 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러는데 사단에 미혹되어 똑 같이 미혹된 세상 사람들 앞에서나 큰소리 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소리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아예 그들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나 유다 같은 자들이 매사에 미지근해 어떤 행동으로도 옮기지 못하는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 같은 사람 앞에서 나는 너희보다는 의롭다라고 큰소리친 꼴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나 그런 말을 듣고 괜히 주눅이 드는 자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선 똑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도 그 사실조차 모르니 여전히 사단에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크신 긍휼과 사랑 안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면서 그 수많은 이적을 보고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마저 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후까지도 그랬는데 성령의 거듭나심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역사하지 않고 과연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인간에게 삿대질과 돌팔매질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배경에 있는 사단에게는 진노를 퍼붓고 예수님의 권세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만 다 같은 죄인끼리는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죄악의 구덩이에서 매일 서로 찌지고 볶고 사는 자들끼리 누가 더 죄가 많으냐 적느냐 따지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두 가지 구분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끼리는 서로 정죄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 의이신 하나님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열의 다툼은 그 세계 안에서만 통하지 하나님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사단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꼴에 불과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끼리는 완전히 정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서로 긍휼이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처음 모였던 곳에선 서로간의 정죄라고는 없었지 않습니까? 더구나 신자는 그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 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그런 계면쩍음과 부끄러움마저 용서 받았지 않습니까? 다 같이 사형수였고 몽땅 왕의 사면을 받아 놓고는 서로 잘 낫다고 다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이 예수 안에 있는 자를 볼 때는 외식하는 자로 밖에 보지 못합니다. 다 같은 죄인임을 모르니까 예수 믿고도 호박씨 깐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도 사실은 매순간 십자가의 사랑 없이는 똑 같이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저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예수 밖에 있는 자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오직 왕의 특권으로 이제 막 사형의 형벌만 사면 받은 죄인이 아직 받지 못한 자를 향해 정죄할 수 있습니까? 우열의 다툼과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긍휼이 그들에게도 미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일 말고는 따로 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자기 가족이요, 친구요, 친지인데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기에 인간끼리는 정죄 대신에 서로 사랑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상상해 볼 일이 하나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 이 땅에서 알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날 때의 분위기가 과연 어떨까요? 세상에서 제대로 서로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도 천국에는 분명히 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서로 계면쩍고 부끄러워 쳐다보지도 아무 말도 못하고 무거운 침묵만 감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지긋이 쳐다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모습을 바라보신 예수님과 같이 말입니다.
11/5/2006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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