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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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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10.6.8 http://www.nosuchjesus.com |
Preview와 Main Feature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8:5-7) 영화의 예고편(豫告篇)을 영어로 Preview라고 합니다. 우리말과 동일하게 미리 맛보기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럼 영화 전편(全篇)은 Full-view라고 해야 말이 맞을 것 같은데, Main Feature라고 표현합니다. 전편보다는 본편(本篇)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왕,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영화로 치면 일종의 preview인 셈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이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구약 선지자의 이적과 짝을 이루는 이적을 예수님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은 구약의 이적을 확장 발전시킨 것이었습니다. 이적에 드러난 예수님의 능력이 그 규모면에서 훨씬 엄청났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에겐 어떤 큰 이적도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적은 전편의 일부를 잘라서 보여주는 영화 예고편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미리 보이긴 했어도 본편과 같지 않고 단지 비슷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는 표식(signal)이었습니다. 요컨대 선지자들이 아무리 큰 이적을 일으켰어도 예수님과 똑같을 수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적이 의미하는 내용이 서로 달랐습니다. 구체적 예를 들어서 살펴봅시다. 엘리야가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엘리사와 함께 선지자 생도 오십 인이 멀리 서서 바라보는 가운데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왕하2:8) 예수님이 밤중에 물 위를 걸어오시자 수제자격인 베드로도 잠시이긴 해도 주를 영접하기 위해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이 두 이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이적의 본을 보이며 영감을 전수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오직 성령의 인도에 따르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엘리사도 엘리야와 똑 같은, 아니 자기가 구한대로 갑절의 능력을 하나님께로 받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본체였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오순절 이후에 큰 이적을 일으켰어도 반드시 예수님께 간구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물 위를 걸을 때도 주님에 대한 믿음에 의심과 염려가 파고들자 곧바로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주님만 온전히 바라보고 믿는 믿음이 무식한 베드로라도 이적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또 엘리야의 경우는, 구약의 홍해나 요단강이 갈라지는 이적을 포함하여, 마른 땅 위를 건넜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물 위를 걸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능력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물러가고 마른 땅이 되어야만 건넜기에 그 이적에는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이 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도 험한 물은 그대로 두고 그 위를 걸었지만 베드로더러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고난이 끝나지 않아도, 아니 고난의 와중에서도 얼마든지 주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고난 중에 주의 영광이 더 들어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적은 단순히 신자를 보호해주는 능력보다는 신자가 믿음으로 자라 주님의 일에 동역자로 참여토록 하는데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구원보다 신자가 자라서 신자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이와 짝이 되는 구약의 이적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서 문둥병을 치유 받은 사건입니다. 어떤 면에서 짝이 됩니까? 둘 다 환자 본인보다 주위 사람의 주선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나아만은 유대인 하녀가 선지자 엘리사를 추천했고, 본문은 로마인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치유를 알선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두 이적의 차이가 무엇인지 금방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하녀가 주인을 위해 섬기기는 아주 쉽습니다. 아니 섬기는 것 자체가 종이 해야 할 본업입니다. 또 잘만 섬기면 보상이 따르기에 더욱 열심을 내며 섬기게 됩니다. 반면에 주인이 하인을 섬기기는 결코 쉽기 않습니다. 그것도 로마군 장교가 유대인 시골 랍비에게 찾아와서 손수 부탁하기는 더 그러합니다. 나아가 백부장은 예수님이 구태여 환자를 직접 만나주지 않고 말씀만 선포해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안수도 안 해주고 요단 물에 씻기만 하라는 엘리사에게 불만을 품고 화를 내었던 나아만의 태도와 완전히 대조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적은 높은 자가 먼저 낮아지는 데서, 또 그렇게 되게끔 바꾸려는 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윗사람이 죽어서 아랫사람이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비천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은혜를 믿는 이에게 새 생명을 부어주셨듯이 말입니다. 나아만의 치유에는 이방신에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주로 드러났습니다. 백부장 하인의 치유에는 이방신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높은 자가 먼저 기꺼이 낮아져 낮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신자가 먼저 그분을 닮아 낮아지고 자신을 죽여서까지 자기보다 더 불쌍한 자를 살리려 할 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따라왔습니다. 바꿔 말해 복음 안에서 신자의 믿음이 굳건해지고 품성이 거룩하게 바뀌어서 자신도 주님 가신 골고다 언덕길을 온전하고도 기꺼이 따를 때에 주님께서 하신 일을, 아니 당신의 약속대로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적은 여호와의 큰 능력을 드러내었다면 신약의 이적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빛난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이 가장 큰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며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단지 프리뷰입니다. 그것도 본편과 비슷하긴 해도 다른 장면을 보여준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성경만이 본 영화라는 뜻도 아닙니다. 신구약성경을 합쳐야만 본편이자 전편이 됩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을 본 것이 아니라 본 영화를 다 본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화 전편을 다 본 사람은 예고편만 본 자와 달라야 합니다. 스토리 전체를 꿰뚫어 알고서 남에게 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능력의 하나님만, 그것도 지금 당장 대박이 터지는 모습으로 구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예수님의 이적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또 소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분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높은 자가 자신을 낮추고 깨트려서 자기 주위의 낮은 자에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자기를 통해 전해지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주님의 거룩한 생명력이 풍성하게 실현되는 일에 자기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다른 이들이 신자에게서 예수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즉, 예수라는 영화를 단순히 관람객으로 보는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실제 등장인물이 되어서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예수 영화 본편은커녕 예고편도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6/8/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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