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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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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10.24 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출 16:1-3
지난주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으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믿음은 바로 이것이라고 했지요. 이런 '믿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의 내용과 방향성을 전환해야 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단을 하고 이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도록 우리가 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지'못하게 하려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믿고 실행하려는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새로운 평등 공동체를 이룩하려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한 출애굽 공동체를 시험한 것을 보십시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하려고 결단을 하고 세상으로 나오신 예수님도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면 이런 악마의 시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시험을 이기려면 우리는 이 시험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우리에게 오는 시험에는 두 가지 근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의 삶의 타성에서 오는 시험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주변의 문화에서 오는 시험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存命을 위해서 사회의 풍습에 따라서 적당히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습성이 됩니다. 물결에 따라 흘러가는 배처럼 우리는 생각 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 습성을 탈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결단을 한다는 것이란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단을 했다가도 이로 말미암아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옛날의 습성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습성에서 오는 시험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보십시오. 시내선 앞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겠다고 서약을 하고서도 삶의 문제에 부닥치자 다시 애굽의 고기 가마를 생각합니다. 주인의 눈을 피해 가면서 고기 조각을 훔쳐 먹던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새 내일을 위해서 출발을 한 계약 공동체는 거듭 거듭 이 시험에 넘어갑니다. 이 타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대부분의 히브리인들은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존명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속이고 속으면서, 비방과 이간질을 일삼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강자에게는 아첨을 하고, 약자들은 억누르면서 살아왔습니다. 눈앞의 이익에만 집념 하면서 그것이 우리 모두의 앞날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생각하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의 숙달을 삶의 지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이 하도 익숙해져서 사물에 접할 때마다 그 솜씨가 발휘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인간성은 퇴화되고 사회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모두 주검을 향해 달리고 있으나 아랑곳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나서 자란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타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혼란을 초래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겠다는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타성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겨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 형성에 있어서 주변 문화처럼 강한 영향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요즈음 교육학자들은 “문화가 교육한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불교 문화권에 사는 자는 대부분 불교도가 됩니다. 마호메트 문화권에 사는 자는 99%가 마호메트 교도가 됩니다. 여성들은 시집오면 대부분 시집문화권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실 종교들까지도 그것들이 처해있는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다윗 왕국이야말로 좋은 예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왕이 없는 공동체로 출발했습니다. 시내산 계약의 첫째 조목을 보십시오. 하나님 외에 아무도 그들 위에 두지 않겠다고 서약을 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밑에서 가진 고난을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 사람이 없는 평등 공동체를 이룩해서 살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한 것입니다. 그리면서 이방인들과도 화목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 사는 민족들의 문화가 문제였습니다. 저들은 다 왕 중심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 중심으로 훈련이 된 상비병을 가지고 약한 나라들을 처 부수고 영토를 확장하는 힘 중심의 문화를 가지고 있은 것입니다. 이런 종족들이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를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다가 긴급히 소집이 되어 싸우는 사사제도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도 왕 제도를 채택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저들처럼 왕 제도를 확립하고 강한 상비병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사사에게 강요해서 왕 제도를 채택한 것입니다. 주변 민족들의 문화를 채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후 다윗 왕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은 강력한 왕조가 됩니다. 다윗의 군대는 주변에 있는 종족들을 다 정복하고 강대한 왕국을 이룩했습니다. 정복된 종족들을 종으로 부려서 부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저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여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 감사 찬송을 올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고 싶어 하시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서로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를 이룩하고 이웃 종족들과도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이방을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씁니다. 왕들은 힘을 오용하여 자신의 영화만 누립니다. 다윗은 충성스런 부하를 전선에 내어보내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왕위 쟁탈전을 버려 서로 죽입니다. 솔론몬은 왕이 되자 왕위를 굳히기 위해서 자기 형제들 다 죽입니다. 그리고 후궁 천명 식이나 두고 향락을 누리면서 이방 신을 섬기기까지 합니다. 주변의 다른 나라와 꼭 같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왕 제도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불고하고 어용 예언자 나단은 다윗에게 와서 그의 자손이 세세에 왕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세습 제도를 만듭니다. 이것도 이방 문화를 본 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아서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당신의 후손들은 범죄 하더라도 왕위에서는 쫓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힘의 철학이 지배하는 왕 제도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그 후 모든 왕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해서 내린 심판의 경고를 보아서 압니다. 그리고 그 심판대로 남북조는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힘의 철학이 얼마나 강한 유혹이냐 하는 것을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더욱 명확해 집니다. 예수는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명확히 부정했습니다.(막 12:35-37) 그리고 한 자리 하겠다고 서로 승강이질을 하는 제자들을 보고 “그것은 이방 사람들이 하는 짓이야. 너희들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어야 한다”하고 가르쳤는데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저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다윗 왕국을 이룩하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열 두 지파를 다스릴 생각을 하고 배신한 유대의 자리에 맛디아를 선택하여 앉게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돈이 제일이다, 권력이 있어야 한다” 라는 이 사회의 풍습이 침투해서 자리다툼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세력경쟁에 열을 올립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갈가리 찢습니다.
바울은 한눈을 팔지 말고 “푯대를 향해서 달리라” 고 강하게 권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호소하고 있습니다. 전심전력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행해서 달리라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 사탄의 모든 유혹을 이기라는 것이죠.
그러나 말은 쉽지만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까? 저들은 어떻게 한눈을 팔지 않고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을 칠 수가 있은 것입니까?
첫째로 저들은 악의 세력 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있는 노력을 다 해 봤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죄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괴로움 사람이다”라고 비명을 올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를 이길 수 있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탈당하는 갈릴리 농민들의 비참함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습니다. 따라서 서로 돕고 용서하는 생명공동체 운동에 전부를 바칠 수가 있은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도 하나님을 떠난 삶의 비극을 경험했기에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당했던 고난을 생각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의 비참함을 몸으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죽음의 문화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잇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하고, 힘으로 무찌르고 권좌에 앉는 자를 지혜 있는 자라고 추앙하는 힘의 철학의 죄악성을 명확히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먹다가 필요 없으면 헌 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 공동체라 하는 공동체는 날로 더 파괴되고, 그 안에 있는 무리들은 날로 이리떼가 되고, 생태계까지 파괴되어 가는데 정치하는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산업문화를 죽음의 문화라고 목청을 높여서 배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문화의 실체를 직시하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까지 이 개인주의, 권력주의가 들어와서 돈으로 교회를 지배하려 하는가 하면 서로 패거리가 되어 권력 투쟁을 하는 것을 가슴 치면서 통곡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째로 하늘나라의 잔치를 맛보아야 합니다. 죽음의 문화에 대치되는 생명문화의 축복을 맛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나누고 용서하고 위하고 아끼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생명공동체의 맛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술 중독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서로 돕는 친교에서 얻는 새로운 삶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초래하는 이 산업문화의 행태를 벗어버립시다. 그것은 죽음으로 이끄는 넓은 길이라는 것을 명확히 고백합시다. 서로 격려하면서 생명의 길로 갑시다. 한 눈을 파는 일없이 서로 나누고 용서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용왕매진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시험을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울 믿음의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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