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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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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11.7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막1:1-8
김효승 전도사가 교회를 엽니다. 하루에 3개 세워지고 2개가 문을 닫는 다는 현실에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공히 부질없는 짓 같이 느껴집니다. 기대감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드는 게 사실입니다. 감리교 제도상 교회를 개척해야 목사 안수를 받는 수련 목사인데도, 지방의 어른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교회가 새로 세워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판이니, 환영은 아예 기대도 못합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미 자립 교회 하나 더 늘어나면 다른 교회들이 부담이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환영받을 일이 아니라 골칫거리입니다. 복음 전파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더 이상의 교회는 세워지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기존의 교회나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겁니까?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단순한 명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실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믿어지고 고백되는 한, 교회는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에 교회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교회를 꺼리는 까닭,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교회 생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서 중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그의 증언 첫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제호를 부쳤습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란 예수님의 삶이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왜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 또는 예수의 삶이 '기쁜 소식'이 되는 걸까요?
기쁜 소식이란, 오래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지게 됐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기쁨에 차서 부른 찬가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오래 기다린 것이 무엇인지, 예수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하느님이 그녀를 돌보신 것을 찬양한 다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자를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이 없는 이를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소민족으로 너무 오래 동인 열강 사이에서 고생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도 저들은 로마제국의 억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외식에 찬 유대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율법조목들을 수 없이 만들어서 백성들로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룩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죄인이라고 천대받는 자들을 높이셔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아 기쁨에 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가면을 벗기어 그들의 흉악함을 만 천하에 폭로하셨고, 하나님의 성전을 발판으로 횡포를 하는 대사제들을 강도의 무리들이라고 질책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을 들어 숙청하셨습니다. 그리면서 그는 선언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그들이 천대하는 세리와 창녀 같은 무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이 선언 앞에서 그동안 천대받으며 살아온 갈릴리의 민중들이 어찌 신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저들이 호산나를 높이 부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각성한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당황한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규정해서 십자가에 달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들은 안심을 했습니다. 두목을 죽였으니 따르던 무리들도 다 흩어지고 말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저들이 예상했던 대로 따르던 무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 운동이 박살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용감습니다. 그 예수가 곧 다시 오셔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증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날로 늘어났습니다. 아무도 그 기세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주후 66년부터 시작이 되었던 유다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동원이 된 로마 군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점령이 되고, 성전을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독립군들도 전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애국적인 유대인은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 역시 철퇴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 역시 메시아왕국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룩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를 중심으로 가졌던 저들의 기대가 다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신기루와도 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심정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서 자란, 그리고 그의 선교의 중심지였던 갈릴리의 사람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다윗 왕국을 이룩하려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언제나 고난 받는 사람들 속에 계신다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하나님나라의 기적을 맛볼 것이라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예수가 얼마 동안 그들 사이에 사시면서 새로운 삶을 창출하신 것은 기쁜 소식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저들은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그의 기록의 제호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시작'말입니다. 그리고 16장에 있는 부활기사에 보면 천사는 빈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모두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가서 눌린 자와 같이 계시는 예수를 만나면 다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운동이 피어오른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재연되었습니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지중해 연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 요원의 불처럼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연변에는 로마제국에 억눌려 신음하는 무리들로 깔려 있었습니다. 저들이 간절히 바란 것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를 통한 새로운 삶의 길이 확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간 곳마다 다시 하늘나라의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삶의 길”이라고 불린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족과 종족 사이의 담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바울을 이방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하나 바울이 가기 전에 벌서 예수의 도가 그들 사이에 확산이 돼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작이 된 복음을 재연시키려면 우리도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주변에 있는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독하고 외로운 갈릴리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날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가는 오늘날, 치열한 경쟁에 밀려나서 의지할 바를 모르는 무리들이 방황하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갈릴리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는 당위성이 현존하는 한, 마땅히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철저히 갈릴리 사람들이 듣고 신뢰할만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사는 기쁨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세워지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전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 본질을 회복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아무리 많은 교회가 세워진다 해도 피차 환영이 되고 기대가 되겠지요.
새로 교회를 시작하는 이든지, 50년이 된 우리던지 우리의 정체성들을 확인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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