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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던가!

욥기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29 추천 수 0 2012.07.03 23: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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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42: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11.28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던가!  
욥42:1-6

우리들이 사는 삶이란 우여곡절이 많게 마련입니다. 시냇물이 흐르듯이 순탄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갑자기 높은 낭떠러지기에 이르러 수 십 길 밑으로 곤두박질해서 떨어질 때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높은 산이 가로막혀서 물이 고이고 고여 깊은 호수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런 삶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란 가지각색입니다. 모든 일들이 무난하게 흘러갈 때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엄벙덤벙 살아갑니다. 그리다가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든지 사업이 크게 번창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서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그러다가 이외의 폭풍우가 불어와서 앞날이 캄캄해지면 우리는 하느님 옷자락에 매어 달려서 살려달라고 애걸을 합니다. 특히 우리들의 생명에 위험이 부닥치게 되면 우리들의 아우성은 더욱 처절해 집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이런 삶의 위기에 부닥칠 때 우리가 이에 어떻게 응하느냐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위의 모든 종교는 이 고난의 문제를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이에 대한 해답을 시도했습니다. 그 중에 적지 않은 종교는 땅 위 삶이란 허무한 것, 이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지 말고 내세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인들과 인도인들의 종교가 특히 그랬습니다. 기독교도 서구의 특권자들의 손에 들어갔을 때 꼭 같은 견해를 가졌습니다. 땅 위에 것은 다 허무한 것이기에 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말고 내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이런 신앙 이해란 저들이 땅 위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봤으나 결국 다 죽음에 직면하면서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종교는 이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좋다, 좋다, 참 좋다”고 감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룩되는 하늘나라가 땅 위에 이룩되게 하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땅 위의 삶에 대해서 놀랍게도 적극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고난이 판을 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참 좋다”고 감탄을 한 세상에 이렇게 환난 질고가 많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의문을 지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는 절규가 이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절규를 그 깊이에서 이해한다면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이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성서에 있어서 고난에 대한 대답이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고난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전설이 바로 그것이죠. 소돔과 고모라는 아주 오래 전에 화산이 터져서 멸절이 된 도시입니다. 그 주변에는 그 도시들이 왜 그렇게 멸절이 되었는지 하는 전설들이 있었습니다. 성서 기자는 그 전설이 고난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수용했습니다. 그 해석이란 소돔과 고모라는 죄가 극심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에 대한 해설은 이스라엘의 남북조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정당화되었습니다. 북방 조 이스라엘과 남방 조 유대가 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라는 선언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때때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지만 그 죄 된 행위가 계속될 때 그 결과란 비참한 패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실들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보아도 선하기만 한 자들이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그런 경우를 너무나 자주 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선하시다 면 어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성서는 이 물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답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대한 첫째 대답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아들 이삭을 제사 드리라고 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서는 곧 반문이 생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슨 시험을 한다는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극복했으니 다행이지 만일 그 시험에 넘어갔다면 하나님은 그로 실족하게 한 책임이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다시 하나님을 시험하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을 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후기 성서 기자는 이것을 사탄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믿는 자를 유혹하는 것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욥기는 그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천하에 가장 선한 자라고 칭찬을 하자 사탄은 이에 반문을 합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되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 그에게 고난이 부닥쳐 온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욥을 견딜 수 없는 고난의 골짜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란 정말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일생 이웃을 해친 일이 없는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오는 것인가?”라는 반문이 욥을 괴롭혔습니다. 욥의 부인은 욥 더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의인을 처벌하는 하나님이라면 그에게 반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반성하고 지은 죄를 고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고난이란 죄의 대가라고 확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뒤돌아 보아도 이런 무서운 형벌을 받을 죄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하나님에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왜 이런 고난을 받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겠다고 달라붙는 것이야말로 잘못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말에 욥은 무릎을 꿇고 말죠. 한계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감히 무한대 하신 하나님에게 따지고 든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철없게 행동하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주셨다는 것만으로 그는 만족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선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냥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냥 고난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퍽 겸손하고 성실한 신앙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우리 범인들이 받는 고난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가 받으신 고난이란 우리 인간을 완전히 절망으로 빠뜨리게 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의 삶이란 그냥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이란 인류를 악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헌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갖가지 법을 만들어 민중들을 못살게 한 기득권자들의 허위를 폭로했습니다. 동시에 민중들을 강자들의 사슬에서 해방을 시킬 뿐만 아니라 저들을 사랑으로 껴안아서 저들 사이에 서로 나누고 용서하는 인정공동체를 이룩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저들을 한 새로운 인류로 부활시켰습니다.

예수님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 새 공동체를 해치려는 악의 세력을 향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온 몸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위에서도 이룩되게 하려고 젖 먹은 힘까지 다 내어서 투쟁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한 전무후무한 투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민심을 소요케 하는 자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비참하게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고 오는 사람들이 그의 머리를 흔들면서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그리면 믿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이미 각오한 것이었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니까?”하고 비명을 올린 것에는 한 다른 뼈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쓰라린 고난을 받고 있는데 그가 그동안 삶과 말로 기르고 깨우친 제자들 중 한 사람도 그 주변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무리들 가운데 그는 홀로 외롭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도 외로움이지만 그가 그 동안 애써서 쌓아 올린 탑이 다 무너지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어두운 절망의 그림자가 그를 뒤덮었습니다.

이런 시련을 혼자의 힘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캄캄한 어둠이 천하를 뒤덮는 순간 그는 하나님마저 그를 버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는 체념하고 맙니다.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죽어가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포자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최후야말로 허무한 종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침묵 저편에 아버지와도 같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그는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절망의 순간에도 그는 그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 올립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외침이란 마지막까지 그를 믿는 예수님의 신앙고백이었다. 이런 신앙고백을 하고 그는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은 백인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한 데서 우리는 봅니다. 그 마지막 외침에서 백인대장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신앙을 느낀 것입니다.

이렇게 끝까지 하나님을 믿은 예수님의 믿음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흘이 지난 뒤 그는 한 새로운 몸으로 부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들을 통해서 하루에 3 천 명 씩 생명의 세계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승승장구할 때도 있지만 생각지 않은 고난에 부딪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신앙자세로 서느냐 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이런 난관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겨 나갈 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널리 전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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