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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모독하는 죄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490 추천 수 0 2012.07.08 00: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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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3:20-3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6월10일 

jys.jpg 정용섭 목사

 

성령을 모독하는 죄

마가복음 3:20-30, 성령강림절후 둘째 주일, 2012년 6월10일

 

오늘 설교 본문인 막 3:20-30절에 이어지는 막 3:31-35절을 먼저 읽는 게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두 이야기는 한 묶음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집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사람들을 시켜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예수님은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고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곳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바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족들이 들었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가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특별한 말씀을 하신 데에는 어떤 속사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밥을 먹을 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이들 틈에 끼어 있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머문 곳은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가버나움이고 예수님의 가족과 친족들이 살고 있는 곳은 나사렛입니다. 가버나움과 나사렛은 대략 30킬로미터 가까이 됩니다. 하루 종일 걸어야 할 거리입니다. 왕복 이틀은 걸립니다. 이들이 이 먼 거리를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친 예수를 빨리 고향으로 데리고 가서 더 이상 그런 소문이 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어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문은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근거가 있을 때도 있지만 전혀 없을 때도 일파만파로 퍼집니다. 거기에는 군중심리가 작용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알게 되었다는 쾌감이 작용해서 소문의 내용이 부풀려집니다. 근거가 없을 경우에는 대개 금방 잦아들지만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개입하면 확대 재생산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유대교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에 사로잡혔고, 귀신의 왕을 통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능력들은 선한 게 아니라 악한 거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마녀사냥처럼, 또는 인민재판처럼 예수님이 악령에 씌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 소문이 결국 고향 친족과 가족들에게까지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과 신학논쟁을 벌이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두 가지로 비판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막 3:24)라고 하셨습니다. 사탄끼리 싸울 수 없다는 겁니다. 다른 한 가지는 사탄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으로만 사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막 3:27)라는 말씀이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병과 축귀는 사탄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왜곡되어 있으면 실체적 진실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성령 모독

    

예수님은 율법 전문가들인 서기관들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비판한 뒤에 아주 놀랍고도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9) 마가복음 기자는 친절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이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1) 예수님을 귀신 운운 하면서 비방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2) 이런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운동이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에 배치되었다는 데에 근거합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에 부합했으면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의 종교적 기득권은 겉으로 드러난 종교 권력이기도 하고, 더 내면적으로는 율법주의이기도 합니다. 종교 권력은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덜 위험합니다. 어느 정도의 판단력만 있으면 문제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종교적 미덕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눈치 채기 어렵습니다. 겉으로 그럴듯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사건이 벌어지게 된 그 배경인 막 3:1절 이하 안식일 논쟁이 나옵니다. 안식일은 율법을 대표하는 규범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회당 안에 한쪽 손이 장애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는지 감시했습니다.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지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그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을 탄식하시면서 장애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 손이 치료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가 귀신 들린 사람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의 모의는 성공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재판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로마 총독 빌라도가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선택하라고 말했을 때 예루살렘 민중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민중은 경우에 따라서 실체적 진실보다는 뜬소문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민중은 군중심리의 약점을 보입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유대교 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낙인을 찍은 것일까요? 그래서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장애인을 치료했다면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루를 넘긴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란 듯이 바리새인들 앞에서 안식일에 치료했습니다.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저 친구는 고의적으로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 지상명령이었다면,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지상명령이었습니다. 원래 율법도 생명을 구하는 법이었습니다. 그게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절대화되면 생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율법 준수가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 모독은 결국 생명 모독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거꾸로 생명 모독은 곧 성령 모독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반복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인지 실질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는 종교와 생명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는 주로 율법, 종교법이라는 형태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종교 형태가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작동될 때가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힘은 서로 일치될 때도 있지만, 그래야 마땅하지만 충돌할 때도 많습니다. 종교를 권력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충돌이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성적 소수자인 동성 애자들을 교회가 거부한다면 그것은 종교 권력으로 생명을 억압, 파괴하는 것입니다.

 

     생명 모독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렵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그런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런 구절을 무기로 삼아 신자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잘 보십시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비롭다는 말과 충돌합니다. 자비로운 분에게도 용서 못할 죄가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이 사람처럼 앙심을 품고 화를 내는 분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폭군처럼 묘사됩니다. 이런 성경 표현은 징벌과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 또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정의를, 그 정의의 엄중성을, 하나님의 평화를, 그 평화의 엄중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는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역시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은총입니다.

    

이런 문제를 좀더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성령 모독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됩니다. 앞에서 성령 모독은 생명 모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때가 적지 않습니다. 재산 증식에만 자신의 인생을 모두 투자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생명에 대한 모독입니다. 남을 속이는 일에만 인생을 투자하면 그것도 생명 모독입니다. 이기적으로, 자폐적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그럴 때도 있고, 남의 잘못으로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인하는 방식으로만 삽니다. 돈과 지식과 명예도 역시 불의하게, 또는 교만하게 사용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생명을 모독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런 방식의 삶에 길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삶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 모독의 죄, 즉 생명 모독의 죄를 유지한 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마지막 심판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우리의 성령 모독, 생명 모독은 마치 추수 때 가라지가 불에 태워지는 것처럼 제거될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성령 모독, 생명 모독의 죄가 제거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완벽하지 못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부끄러운 부분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부담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마치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제거된 사람처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 성령을 모독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즉 생명을 모독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게 성령을 모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빈정대는 일들이 오늘도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볼 뿐만 아니라 그런 일에 대항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투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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