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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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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년 6월24일 http://dabia.net/xe/598199 |
정용섭 목사
거룩한 두려움
마가복음 4:35-41, 성령강림절후 4째 주일, 2012년 6월24일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 당시의 가나안 땅을 머리로 그려보십시오. 북쪽에는 갈릴리 호수가 있습니다. 호수물이 남쪽으로 흐릅니다. 그게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은 110킬로미터 정도 흘러서 사해라는 이름의 호수로 들어갑니다. 사해는 소금 농도가 높아서 사람이 물위에 누우면 그냥 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해(死海)라고 합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호박처럼 생겼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사해에 비해서 작고 둥그렇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활동하던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자주 머무셨던 마을인 가버나움도 갈릴리 호수에 붙어 있는 어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와 연관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가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인 막 4:35-41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말씀을 가르치던 예수님은 날이 저물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몰려든 민중들을 피해서 휴식을 취하고 싶으셨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찾아가시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피하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자 사람들이 다른 배를 준비해서 함께 따라왔습니다. 그 광경이 분명하게 들어옵니다. 갈릴리 호수 서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선두로 몇 척의 배가 저녁노을을 등지고 동편을 향해서 갑니다. 갑자기 큰 광풍이 불고 파도가 높아졌습니다. 원래 갈릴리 호수에는 그런 돌풍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물이 들어와 배가 침수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은 배의 고물(뒷쪽)에서 주무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풍랑이 장난이 아닌 상황에서 주무시고 있었다는 건 심하게 피곤하셨다는 뜻이겠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급히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장면은 약간 과장된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은 어부들이 주축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도의 풍랑은 일상적으로 경험했을 겁니다. 어쨌든지 제자들은 어부답지 않게 당황해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로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나요? 각자 생각이 서로 다를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냉소적으로 취급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전지전능한 슈퍼맨으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이런 부분들은 빼버리고 실제적인 교훈이 되는 가르침만 보자고 말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든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만을 받아들이자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을 휴머니즘으로 폄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이야기에서 바람과 바다까지 말 한 마디로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초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런 능력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증명해준다는 겁니다. 이런 믿음은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일치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그대로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예수님을 생각하면 신앙의 중심을 놓치는 겁니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지만 참된 인간이십니다. 여기서 참된 인간이라는 부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마음대로 행사한 분이었다고 한다면 참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의 무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왜 초자연적인 능력처럼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어떤 속사정이 숨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비롯해서 신약성경은 모두 초기 기독교가 처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속사정을 배경으로 놓고 읽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상황 초기 기독교는 오늘 우리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었습니다. 특히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기독교의 지배적인 문화로 자리 잡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당시 주변 세계로부터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해체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실제로 로마로부터 순교의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상황은 풍랑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러나 믿음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는 질문은 믿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전제한다면 믿음이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게 가능한가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의 대상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으로도 떳떳하지 못하고, 로마의 정치적 전통으로도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이를 믿으라는 말은 언어도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가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습니다. 풍랑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시 기독교인들과 달리 예수님을 잘 믿고 있으니 걱정이 없을까요? 대다수 신자들이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을 메시아로 믿는 게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실제로 인생살이의 실패입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저주합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만 지고 우리는 그분 덕분으로 편히 살고 싶어 합니다. 이를 위해서 평생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기독교 안에 성공주의가 믿음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게 과연 믿음일까요? 이런 신앙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을 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성공했다고 해서 참된 자유와 평화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인생살이에서 실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살이는 여러분들이 노력한 것만큼, 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연결되어서 여러분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대로,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대로, 그 중간쯤 되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벌어진 사건에 영적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기초이고 목표입니다. 거기에서만 우리는 풍랑과 같은 세상살이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믿음으로 풍랑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인가 본문 41절은 제자들의 이런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단순히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예수님에게 놀란 것입니다. 초능력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는 누군가’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알기만 하면 충격을 받아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을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친근함으로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랑이 크신 아버지, 어머니, 또는 따뜻한 친구, 요즘 식으로 말해서 인생의 친절한 멘토처럼 느낄 겁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아버지나 친구나 멘토는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인생 상담자일 뿐입니다.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면서 ‘그가 누군가’ 하고 질문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생 상담자 수준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닌다 해도 믿음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고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고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그들은 두려워서 서로 저 분이 누군가 하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질적으로 변화된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생명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명 경험은 아주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곧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실질적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관계하고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십시오. 집과 돈과 가족과 친구들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지금 한국에서 제일 큰 부자와 그의 재산이 5백년 후에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세상에서 자기 소유를 완벽하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간과 더불어 다 없어집니다. 아름다운 예술과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잠정적입니다. 궁극적이지 못합니다.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의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의 본질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성서시대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풍랑처럼 요동치는 세상살이가 잔잔해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굴 안에서 횃불만 켜놓고 살던 사람이 동굴 밖에 나와서 태양을 본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똑같이,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오늘도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 가지 모습의 풍랑을 만날 것입니다. 그 풍랑이 무서울 겁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에게 일어난 궁극적인 생명을 통해서 거룩한 두려움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그 풍랑 현상이 미미해진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묘사하듯이 잔잔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놀라운 일에 더 마음을 집중하고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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