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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욥14: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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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다시 일어서십시오 (욥기 14장 7-17절)
< 실패를 딛고 일어서십시오 >
어느 날, 한 장군이 전투에서 패해 목을 매려고 산에 올라가 한 나무 앞에 섰습니다. 그때 나무 밑의 한 작은 굴로 개미가 먹이를 물고 가는데 굴 입구에서 먹이를 계속 떨어뜨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살도 잊고 떨어뜨린 횟수를 세어보자 69번을 떨어뜨리고 70번째 만에 간신히 개미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좌절하면 저 개미만도 못하게 된다! 나는 겨우 한번 실패했다. 다시 일어서자!”
깊이 생각하면 실패를 포함한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에게는 실패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잘 믿어도 실패합니다. 그처럼 누구나 실패하지만 누구나 실패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그 실패를 어떻게든 감추려고 합니다. 스탈린은 집권 직후 제일 먼저 어릴 때의 지인을 다 죽였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실패를 감추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제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실패를 감추고 없애는 것입니다. 성공만 부각시키고 실패를 감추면 또 다른 비극적인 역사를 낳습니다. 그것이 바로 김일성 왕조의 비극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실패 앞에 정직합니다. 그래서 위인들의 생애를 얘기할 때도 그들의 부끄럽고 치사한 약점까지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성공 모델만큼 실패 모델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처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는데 어느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느낌상으로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해서 디베랴 바닷가로 갔지만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실패했다고 사명에서 도피하면 더 실패합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와주셔서 3번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받고 그를 다시 일으켜주셨습니다.
이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점검해보십시오. 그처럼 사랑의 교감이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일으키실 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은 사명을 선도합니다. 결국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실 때 직접 개명해주신 이름대로 “베드로야!”라고 부르지 않고 원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을까요? 다시 원점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혹시 느낌상으로 실패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성공적인 삶의 작품이 나올 것입니다.
<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길 >
욥기 14장은 욥기의 가장 중요한 장 중의 하나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친구들과 계속 논쟁하면서 더 깊은 상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을 보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몇 가지 길을 교훈 받습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욥은 나무가 잘려도 그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싹과 가지가 돋아난다고 고백합니다(7절). 왜 성도에게 늘 희망이 있습니까? 찍혀도 그 밑동에서 다시 싹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찍히는 일을 당해도 너무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불필요한 부분은 스스로 찍어내십시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등에서 오래된 나뭇가지를 자르고 건강한 새 가지 싹이 나오게 하는 농법을 써서 수확률을 높였습니다. 그처럼 찍힌 상황을 승화시키면 더 많은 열매를 얻습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나무가 고목이 되면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지만 고목에도 물만 제대로 공급되면 새싹이 나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탄식이 생깁니다. “이제 나는 너무 늙었다! 이제 끝났다! 10년만 젊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탄식이 나올 때 낙심하지 말고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그때 생명수와 같은 말씀만 제대로 공급되면 오히려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나중에는 그로부터 더 많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늘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외치며 다시 일어서십시오.
2.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사람은 연약하고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10-12절).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늘 넘치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역경과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도구입니다. 기도하면 가야 할 길이 생각나고, 해야 할 일이 보이고, 앞날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마음에 평안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욥은 고통 중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히브리인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과 스올(땅 밑)의 3부분으로 이뤄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스올은 지옥과는 달리 죄인들이 죽은 후 최후의 심판 전까지 거하는 사후의 중간기 처소로 여깁니다. 욥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스올에 감추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없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하고 필요 유무를 떠나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 시간을 결코 소홀히 마십시오. 외롭고 고독하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고독도 참을 수 있고 상처도 견딜 수 있습니다. 고난이 극심하면 더욱 기도하십시오. 극심한 고난을 그냥은 참기 힘들어도 기도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기도하면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고 반드시 반전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3. 축복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욥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함을 알고 삶을 소중히 여기며 현재의 모든 고난에서 벗어날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고 다짐합니다(14절). 그처럼 기다릴 줄 알아야 결국 승리합니다. 가끔 보면 인간관계나 공동체 생활에서 처음에는 잘하다가 기다리지 못해 나중에는 홱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사랑과 기다림을 쉽게 포기하면 대개 집니다.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잘못과 실패에 대한 극복 능력도 커집니다.
욥은 심한 고난과 정죄를 당하는 중에도 자신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있고 하나님은 자신을 찾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조치를 기다렸습니다(15절).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살피시며 자신의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을 고백합니다(16-17절).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하고 어떤 고난 중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본문 7절, 12절, 14절 말씀을 보면 ‘다시“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기회를 주시기에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상의 실패가 있었어도 하나님을 붙잡고 또 일어나 도전하십시오. 그래야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잡채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잡채를 먹고 심하게 체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무슨 영문인지 이상하게 잡채만 먹으면 계속 체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잡채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졸업할 때쯤 신앙이 깊어지면서 과거의 상처와 불행과 고통의 기억들을 잘 지우는 생활훈련을 하다가 어느 날 다시 잔칫상에서 잡채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먹기만 하면 체했던 옛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제 잡채를 먹으면 체한다는 미신을 버리자!” 그리고 편하게 잡채를 먹었습니다. 그때 참된 믿음으로 헛된 미신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잡채를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믿음은 불안을 이기게 해서 평안도 주고 결국 소화도 잘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 때문에 선한 도전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 다시 일어서십시오 >
1996년 여름, 하나님은 기도 중에 <네트영어>를 저의 머리에 쑥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때 감탄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선교를 잘하기 위한 재정 통로로 네트영어를 주신 줄 믿습니다!” 그때 저 자신이 보름 만에 영어실력이 3배는 늘어난 체험을 하면서 바로 물질이 물밀 듯이 밀려올 줄 알았습니다. 그 후 몇몇 네트영어 프로그램을 했지만 얼마 후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큰 실패는 아니었지만 내면의 감탄사를 외부로 확산시키지 못한 일종의 실패였습니다. 그것이 느낌상의 첫 번째 실패였습니다.
그 후 2000년부터 인터넷 말씀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엄청난 독서를 통해 축적했던 자료들과 1992년부터 5년 동안 4군데 신학교 강의를 하면서 24과목을 가르쳤을 때 준비했던 방대한 신학과 설교 자료들을 인터넷에 하나씩 게시했습니다. 그러자 매주 4-5천 명의 목사님들이 저의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설교 자료를 얻어가셨습니다.
현재 홈페이지는 4번째 개편된 홈페이지로 과거에 게시한 자료들은 거의 없습니다. 홈페이지가 개편되고 호스팅 회사가 바뀔 때마다 몇 천 개의 글들을 다 옮겨 게시하기가 힘들어 요새는 홈페이지보다 매일 말씀을 메일로 보내는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 온새기 회원이 6천 명이 넘고 목사님 회원만 2천 명이 넘으니까 사역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특히 다수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님 회원이 많아 영향력도 큰 편입니다.
지난주에는 대형 교회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일주일 내내 두 가지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하나는 그 설교를 대형교회를 시기 질투해서 한 비판적인 설교로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였습니다. 또 하나는 온새기 회원 중에 교인 천 명이 넘는 교회 목사님들이 꽤 많고 그 중에 5천 명이 넘는 교회 목사님도 몇 명 있는데 혹시 그분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용기를 주셔서 그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처럼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보기에 주의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한번은 제 잘못으로 큰 낭패를 겪었습니다. 2003년에 미국에서 선교연맹 총회를 참석하고 금요일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몸이 너무 피곤하고 말씀 준비가 잘 안 되어서 청년 때 담임목사로 계셨던 분의 설교를 서론을 비롯해서 총 3개의 대지 중 2개 대지를 거의 통째로 언어 표현만 조금 바꿔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비록 언어 표현은 바꿨지만 거의 70% 정도를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날따라 성도들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인용했으면 은혜가 넘쳤어도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눈치 없게도 홈페이지에 설교 전문을 그대로 게시했습니다. 저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광주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님이 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이번 주 설교를 봤는데 아무개 목사님 설교를 거의 따라했네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4-5천 명의 목사님들이 꼼꼼히 설교를 살펴본다는 사실이 그처럼 무서운 일인지를 그때 실감했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잠을 설치고 수치감에 떨며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최대한 한국어 설교는 듣거나 보지 않겠다!” 편히 설교를 준비하는 유혹을 떨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이제 우리나라도 저작권이 점차 중시되고 90년간 보호되는데 그 문제에 걸리면 성경 66권 전권 설교파일을 천년 영향력을 가진 문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죽어도 계속 그 문서들이 검증될 테니까 그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9년 전의 결심을 지금까지는 비교적 잘 실천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목사도 배워야 합니다. 독불장군이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의 설교도 참고할 필요가 있어서 200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영문설교만 보고 들으면서 나름대로 꽤 방대한 자료를 구축했습니다. 그 작업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네트영어였습니다. 그처럼 네트영어가 좋은 줄은 알았지만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네트영어를 주셨을 때의 꿈과 비전을 거의 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임대로 내준 이곳의 절반 공간을 쓰던 어린이 스포츠센터가 갑자기 이사 가서 그 절반 공간도 우리 교회가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리어 공사를 마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공간을 무엇으로 쓸까요?” 그때 한 목사님이 영어교육 공간으로 활용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제안을 듣는 순간 한 동안 잊었던 네트영어의 비전이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네트영어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 네트영어가 있지?” 그 후 3년 동안 네트영어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느낌상의 실패 후에 다시 일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동안 네트영어의 탁월성을 다시 확인하고 많은 자료를 축적했지만 목회와 함께 하려니까 몸이 상당히 축났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가졌는데 시작한지 3년 만에 금방 안식년을 가지니까 마치 또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느낌상의 두 번째 실패였습니다.
그때 자꾸 패배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와 네트영어를 같이 할 수 있을까?” 몸이 편하니까 계속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어느 날 하나님이 기도 중에 <네트영어 교육방송>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때 인도의 이상기 선교사님이 선교사 사관학교를 추진하면서 10억 원을 구하는 것을 보고 저도 따라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네트영어로 선교도 하고 많은 국제적인 인물을 키우려고 합니다. 이 비전도 인도의 선교사 사관학교만큼 중요합니다. 저희에게도 시설과 장비와 인력과 교재를 위해 10억 원을 주소서!”
그때 두 번째 실패한 느낌 후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온새기에 네트영어를 연재하며 10억 원을 구하는 기도제목을 첨부했습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특별한 응답이 없고 온새기 회원들에게 부담만 주는 것 같아서 연재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이 느낌상의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그래도 네트영어의 비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틈틈이 2019년에 완성할 <네트영어 사전>을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다시 네트영어의 비전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약 2주 전에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과 이런 통화를 했습니다. 얼마 전 임 선교사님이 필라델피아의 한 백인 교회로 3일 간 선교집회를 갔는데 300명 정도 되는 그 교회가 매년 20만 불의 선교비를 보내고 이번에는 몽골로 몇 만 불을 보내 교회 하나를 설립한다는 얘기였습니다. 또한 우리 선교연맹 교회 중에 산호세에 있는 한 중국교회는 교인 천 명이 매년 약 100만 불을 선교비로 보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들떠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멋진 교회들입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선교 많이 하고 싶습니다.”
결국 수면 아래로 잠긴 네트영어 비전을 품고 또 다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네트영어를 주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을 줄 믿습니다. 저희도 네트영어 교육방송을 인터넷 방송부터라도 시작해서 주신 물질로 선교도 많이 하게 하소서! 또한 교인도 300명을 이뤄서 최고로 선교하고 나눌 줄 아는 모델 교회가 되어 나눔이 쉽고 기쁜 일임을 한국 교회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하소서!” 세 번째 실패한 느낌 후에 또 다시 비전을 새롭게 하고 일어선 것입니다.
몇몇 분들은 아직 네트영어의 비전이 감이 안 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감동과 확신을 주지 못한 제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로마는 하룻밤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성공은 대개 수많은 실패를 딛고 이뤄집니다. 실패한 느낌이 진짜 실패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패해도 일어서십시오. 그렇게 일어섰다가 실패하면 또 일어서십시오. 그렇게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나가면 언젠가는 감이 오고 때가 되면 비전에 감동하는 사람도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이제 나누려는 대 전제를 가지고 물질도 구하고 축복을 구하십시오. 거룩한 커넥션이 아직 없어도 낙심하지 말고 전진하십시오. 남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거룩한 꿈과 비전에 미치십시오. 미친 사람이 곰을 잡듯이 미친 사람이 목표에도 미칩니다(도달합니다). 그처럼 계속 믿음으로 말하고 선포하고 기도하고 땀을 흘리십시오.
때로는 믿음이 말이 너무 찬란해서 사람들이 허황되게 듣고 실제로 그 말대로 이루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위축되지 마십시오. 너무 말이 앞서면 안 되지만 믿음이 담긴 찬란한 말과 생각은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말한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뛰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돈키호테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눔의 의지를 가지고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그를 돈키호테로 만들지 않고 가장 적절한 때에 반드시 그 꿈과 비전을 이뤄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15살부터 약 3년 간 복싱을 했고 24살까지 여러 격투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대일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4살부터 지금까지 거의 운동을 안 했지만 여전히 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딸이 키가 작다고 놀리면 저도 농담 섞어 말합니다. “그래도 싸움은 안 져! 두 방이면 다 쓰러뜨려! 호랑이나 곰도 때려잡아!” 그러면 두 딸들이 더 놀립니다. 그래도 아빠가 자신감이 없는 모습보다는 그런 모습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늘 자신감을 가지고 사십시오. 돈키호테라고 놀려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진짜 돈키호테가 되지 않고 정말 꿈을 이뤄내면 됩니다. 실패하면 또 일어나십시오. 실패를 실패라고 생각지 말고 더 멀리 뛰려고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후반전의 역전승을 위해 잠시 하프타임과 중간 사역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처럼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계속 일어나 도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감동하시고 거룩한 커넥션을 주시며 마침내 꿈과 비전이 이뤄지는 찬란한 때가 오게 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연로하신 권사님들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 한 층 오르내리기도 힘든데 교회에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좋겠네요.” 우스갯소리였지만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주간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엘리베이터가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한 층 정도는 오르내릴 수 있는 건강과 기력을 구하라! 그것도 못하면 더 건강이 나빠진다.” 그때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엘리베이터 대신 권사님들에게 한 층 정도는 오르내릴 수 있는 건강과 기력을 늘 주소서!”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이 좋게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기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과 기력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실패가 있어도 꿈과 비전을 잃지 않는 강력한 신력과 심력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수면 아래에서 수면 위로 드러날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묵묵히 오리발을 움직여 마침내 성공을 만들어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드러내고 더욱 많이 나누며 행복하게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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