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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받았던 헌금함
(마가복음 12:41-44)
햇살이 뜨거운 어느 여름 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헌금함이 잘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성전을 오가는 아침나절에는 여러 부자들이 와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로 보아 제법 많이 바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지나가던 사람들도 ‘쩔렁!’하는 소리에 어떤 부자가 저렇게 헌금을 많이 하는지 궁금해 돌아보기도 했지요. 부자들은 의식하지 않는 척 했지만 그들의 몸짓에서 은근히 남들이 자신들이 헌금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느껴졌지요. 물론 간혹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긴 했지만 말이죠.
한낮, 뜨거운 태양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시간이면 오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다시 날씨가 서늘해질 저녁 무렵에야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하겠지요.
헌금함은 여느 날 보다 더 묵직한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 그래, 바로 이 맛이라니까. 대제사장들이 헌금을 꺼내가지만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행복할 텐데. 그 욕심 많은 대제사장들은 동전 하나도 남김없이 싹 쓸어간단 말이야. 영 밥맛이야.’
날아가던 새들도 그늘에 들어갈 쉴 무렵, 초라한 행색의 여인이 남들이 볼까 조심스럽게 헌금함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헌금함은 바짝 긴장을 했습니다.
‘저거 혹시 내 안에 든 헌금을 훔치러온 것 아냐?’
헌금함 앞에 선 여인은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안다고 했는데 그 여인의 손을 보니 쩍쩍 갈라지고 손가락마다 풀 떼가 꺼멓게 끼었습니다. 아마도 남의 밭에서 막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여인일 것입니다. 잔뜩 헌금함이 긴장을 하고 있는데 여인은 두 렙돈(헬라의 동전 명칭)을 꺼내어 소리가 날까 조심조심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헌금함이 여인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아줌마, 절 도대체 뭐로 보고. 겨우 요걸 헌금이라고 하는 겁니까?”
“얘야, 난 너에게 헌금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이란다.”
“어린 아이들도 이렇게 조금 헌금을 하지는 않는데 정성이 부족한 것 아니에요.”
“미안하구나. 그게 내가 가진 전부란다.”
여인은 너무 슬펐습니다.
헌금함의 질책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고 싶은데 자기가 가진 것이라고는, 드릴 것이라고는 두 렙돈 밖에 없으니 슬펐습니다. 두 렙돈을 바치고 났으니 여인의 수중에도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지요. 여인의 눈물을 보자 헌금함은 조금 미안해 졌습니다.
“아줌마, 미안해요. 제가 처음 마음을 잃어버렸네요. 워낙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이 기이한 일에만 사용되다보니까 정성껏 드린 헌금보다는 액수에만 관심을 가졌네요.”
“아니야. 그게 사실인 걸. 부자들이라고 많은 헌금을 바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여인이 쓸쓸하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헌금함은 맨 처음 예루살렘 성전에 왔을 때의 감격을 생각했습니다.
그 곳에 오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을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로 살아왔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이가 되었을 때 성물을 만드는 목수에게 발견되어 헌금함으로 짜여 지게 된 것이지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다보니 쑥쑥 자라질 못했지만 아주 오랜 세월에 거쳐 단단하게 자랐고 그만큼 향내도 좋아서 귀한 대접을 받았답니다. 가장 좋은 나무로 만든 헌금함, 그것이 예루살렘 성전에 놓인 것이었기에 그 이전의 모든 아픔들을 다 잊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놓였을 때 첫 헌금은 맑은 눈동자를 가진 꼬마가 했습니다. 고사리 손으로 바친 두 렙돈이었지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감격을 잊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헌금을 대하는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보면서 점점 그 감격을 잃고 살아가게 되었지요. 믿음의 척도는 곧 헌금액수였고, 그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되기 보다는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일에 주로 사용되었답니다. 그 뿐 아니라 헌금만으로도 부족해서 성전 뜰에 성물을 파는 장사치들을 유치해서 돈벌이에 주력을 했지요. 예를 들면 먼 곳에서 순례자들이 와서 작은 비둘기라도 제물로 드리려고 하면 성전 뜰에서 산 것이 아니면 흠이 있다고 받질 않았지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드려야 했거든요. 물론 성전 뜰 장사치들에게 산 것은 흠이 있어도 눈감아 주었지요. 그런 것을 오랜 세월동안 봐오면서 처음 감격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순순함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것도 잊고 지냈던 이 때 과부의 두 렙돈의 잠자던 헌금함의 혼을 깨운 것입니다. 눈을 들어 성전 뜰을 보니 남루한 차림의 장정들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부드러운 눈빛을 가진 분이 둘러앉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래도 정성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크게 보이는 것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잣대와는 다른 잣대를 가지고 계시지. 하나님은 편협할 정도로 가난한 자와 낮은 자들과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편이란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간혹 성전 뜰에서 대제사장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그가 소년이었을 때에는 내노라하는 종교지도자들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질문을 해서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던 그였던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나는 헌금액수에만 정신이 팔려서 성전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때였거든요. 그저 헌금함에 ‘떨렁!’ 떨어지는 소리에 견주어 얼마인가를 맞추는 재미에 빠져 지냈었기에 성전에서 무슨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성전 뜰에서 순례자들이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지 들리지 않았었지요.
“예수님, 이 성전의 돌들과 건물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너는 이 큰 건물에 관심이 있구나. 이 건물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치장하고 그것을 통해서 돈벌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미 예배도 형식적인 예배가 된지 오래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대제사장의 은근한 협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를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든가, 부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메시지와 끊임없이 죄의식을 부추겨 죄의식에 빠져 살아가게 만듦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그런 것들이었지요. 온갖 미사여구와 거룩한 언어들이 다 동원되었지만 그들은 절대로 말하는 대로 살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나는 성전창고에 버려졌습니다.
다 낡아서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건 것이지요. 그런데 벌어진 틈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께 드렸던 두 렙돈과 소년이 하나님께 드렸던 두 렙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예물만이 내 몸 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하나님, 가장 귀하게 받으신 예물을 제게 남겨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나 나의 일부가 헌금함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전 입구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과부의 두 렙돈과도 같은, 고사리 손으로 바친 소년의 두 렙돈 같은 헌금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뒤 창고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내 몸에는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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