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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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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존재, 비존재, 존재의 용기(1)
본문/ 신31:6, 수1:1-8, 사41:10
1. 들어가는 이야기
나는 울릉도 여행 때 배낭에 <폴 틸리히, 차성구 역, 존재의 용기, 예영출판사>를 넣고 다니며, 배에서-버스에서 “아멘!”으로 읽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 *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1:6-7)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2. 존재(Being)-비존재(Non-Being)-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이 세상의 모든 존재(Being)는 지금 현재 실제 상황으로 비존재(N0n-being)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심각하게 위협-공격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 각 사람 개인과 가정-교회-지역-국가-세계 인류 공동체의 육체적-정신적-경제적-사회적-종교적 삶의 총체입니다.
비존재란 무엇인가? 각 사람 개인과 공동체가 느끼고 겪는 모든 인간 존재(삶)의 죽음과 운명의 불안-공허함과 무의미성의 불안-죄 의식과 정죄의 불안입니다. 즉, 몸의 질병-실직-실패-대안 없음-희망 없음-늙음-사회적 부정부패-부조리-구원의 불확실성-죽음 등등입니다.
존재가 비존재의 위협과 공격에 함몰되면, 존재(삶)는 공허-무의미-절망입니다. 존재가 생명력 넘치고-鳶飛魚躍(연비어약)-용솟음치는 기쁨과 감동-信望愛(신망애)로 충만한 삶이 되려면 비존재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존재와 비존재는 구조적으로 分離不可(분리불가)이기 때문에 “존재의 용기”는 필연적으로 비존재의 막강한 위협-방해-공격에도 불구하고-무릅쓰고(in spite of)-어쩔 수 없이 자아가 자기 존재(삶)를 긍정하고-인정하는 마음의 태도(Though Form)에서 나옵니다.
(Courage: mental or moral strength to venture, persevere, and withstand danger, fear, or difficulty. firmness of mind and will in the face of danger or extream difficulty-용기란 위험-두려움-극도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도덕적-정신적으로 강인하고 굳센 마음)
3. 비존재를 극복하는 존재의 용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첫째. 존재의 용기는 막강한 비존재의 힘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길 위를 걸라 하시네!” 소리 높여 찬양하며-자신감-자존감-임마누엘-Optimism의 마음으로 “좋아, 한 번 붙어보자!”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이 점이 아주 매우 중요합니다.
비존재의 힘이 작동하면서 이 세상에 뿜어내는 그 모든 답답함-불편함-괴로움-어려움-두려움을 슬-슬- 피해 다니느냐? 아니면, 담대하게 맞서서 對面(대면)-直面(직면) 하느냐?가 존재의 용기로 사느냐? 비존재의 힘에 질-질- 끌려 다니며 사느냐? 하는 갈림길입니다.
둘째. 존재의 용기는 정신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건전한 육체-건전한 정신이라는 말입니다. 존재는 활력 넘치는 생명의 힘을 지니면 지닐수록 비존재의 힘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감소하면, 결국 존재의 용기도 감소합니다. 생명력을 강화하는 것은 곧 존재의 용기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몸과 정신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사람 몸의 모든 세포들은 자유와 정신생활에 참여하고, 모든 정신적 창조성은 활력 있는 몸으로부터 그 에너지원을 얻습니다. 즉, 건강한 몸일수록 정신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내용과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112-119쪽).
셋째. 존재의 용기가 발붙이고 있는 터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의 절대 믿음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존재의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절대 믿음 때문입니다. 절대 믿음은 오직 자기만의 주관적 착각도 아니고-객관성을 결여한 일시적 감정도 아닙니다. 절대 믿음은 주관과 객관-의심과 오해의 차원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성경에 이 절대 믿음의 대표적 사례가 있습니다(212-113 쪽).
(1)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사건(창22:1-14)-참고: 말씀의 샘물 제8권 제482호 절대 허무 그리고 절대 믿음 98-99쪽.
(2)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hope in him; I will surely defend my ways to his face(욥13:15)
(3)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폴 틸리히는 이 책 마지막 문장에서 “존재의 용기는 무의미와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버린 우리 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아멘!
존재, 비존재, 존재의 용기(2)
본문/ 신31:6, 수1:1-8, 사41:10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 다 함께 큰 소리로 존재의 힘을 용솟음치게 하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도록 합시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아멘!
2. 용기(勇氣-courage)에 대한 철학적 정의 몇 가지
*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는 하나의 윤리적 실체(reality)이나,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 그 자체의 구조(존재와 비존재는 둘이 아닌 하나이다)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존재의 용기는 모든 비존재(두려움-불안-악한 현실-무의미-절망-죽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이 자기 존재(자기의 참된 본성-내적 목표-자기의 생명력)를 高揚(고양)하고 肯定(긍정)하는 강인한 마음의 태도-마음의 능력이다(존재의 용기, 37쪽)
* 용기는 희랍어로 안드레이아(andreia-남자다움)-라틴어로 포르티투도(fotitudo-힘)로 무기를 가지고 용맹을 발휘하던 고대 귀족사회의 군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귀족사회가 붕괴되고 용기를 선과 악에 관한 보편적 지혜로 정의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자, 지혜와 합쳐진 진정한 용기(courage)는 군사적 용기(fortitude-불굴의 정신)와 분리되었다. 불의한 죽음을 받아들인 소크라테스의 용기는 귀족적-영웅적-군사적 용기가 아니라, 스토아적인 지혜-이성-시민적인 용기였다(존재의 용기, 37-38쪽).
* 스피노자는 용기의 존재론에 대하여 누구보다 상세히 설명하였다. 존재의 자기 긍정의 학설은 그의 중심 사상이다. 그는 주저 <윤리학>에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각자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奮鬪(분투-코나투스-conatus)한다. 그 분투가 존재 자체의 본질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분투(코나투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향하여 열열히 노력한다”는 뜻이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란 존재가 가진 여러 가지 성질 중의 하나가 아니라, 현실적 본질(essentia actualis)이다. 어떤 존재에서 코나투스가 사라진다면 그 존재 자체도 사라진다. 자아 보존-자기 긍정을 위한 코나투스는 존재의 본질-존재의 힘-존재의 생명력이다. 그리고 완전한 자기 긍정은 고립된 한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모든 개인 속에 작동하는 보편적이고 神的(신적)인 행동이다"라고 하였다(존재의 용기, 52-53쪽).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위에 말씀드린 용기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참고 하되, 성경이 말씀하는 용기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은 “존재의 용기”가 어디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시는가?
첫째. 성경의 첫 문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입니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문장입니다. 천지창조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God saw all that he had made, and it was very good(창1:31)”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기독교의 존재에 대한 정통적-역사적 교리는 “존재로서의 존재는 선하다(esse qua esse bonum est)” 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 이후 아담(사람)이 타락하여 영원한 비존재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는 미우나,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라는 지극하신 사랑 때문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믿음)-모세를 부르시고(율법)-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은혜).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비존재의 권세를 물리치고 천지창조 하신 그 때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셨던 원래 그 존재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존재의 용기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둘째.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다시 범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5)” 하셨고, 마틴 루터는 “신앙인은 영원히 의인인 동시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나는 용서 받았다-나는 구원 받았다-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나라 계신 임금 우리 임금 예수라(All unworthy I be, There is welcome there for me, For the King is our own Jesus, Lord and Saviour of His own)” 라고 한 찬송가 493장 말씀도 바로 그 뜻입니다. 존재의 용기는 바로 그런 믿음에서부터 비롯합니다.
셋째. 그러므로 이제부터 지금 당장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용기로 사십시요! 좀 있다가-나중에-성경을 좀 더 배운 뒤에-금식 기도 한 다음에가 아닙니다. Just Do It Now!
亭亭山上松 瑟瑟谷中風 風聲一何盛 松枝一何勁 氷霜正慘愴 終歲常端正 豈不罹凝寒
松柏有本性(정정산상송 슬슬곡중풍 풍성일하성 송지일하경 빙상정참창 종세상단정 개불이응한 송백유본성 : 산꼭대기 낙락장송, 소슬한 계곡 바람, 바람 소리 거세고, 굳센 솔가지, 어름 서리 맞아 괴로움이 극심하나, 죽는 날까지 항상 단정하구나, 너라고 어찌 혹한이 두렵지 않겠냐만, 네 성품이 원래 그러한 줄 아노라-劉楨). 존재의 용기는 낙락장송의 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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