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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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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7-05-02 주일설교 안양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2007-05-02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시인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마음과 생각이 부패해져서 악을 행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게 되면 이 세상에 모든 만물들이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정신과 마음을 가졌으며, 그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태어나서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천체와 자연의 만물은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연적 통치이다.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자연적 법칙을 따라 그대로 유지된다. 역시나 인간의 도덕 세계에도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 법칙을 따라 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나 절대적인 것은 없다.
II. 도덕적 통치란 무엇인가?
A. 도덕적 통치의 정의
도(道)는 인간의 개념을 형성하기 이전에 지키면서 살도록 주어진 삶의 기준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이 도를 찾아오는 역사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도(道)-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분이 직접 성육신하셔서 몸소 도를 인간에게 일려주셨다. 덕(德)은 거기에 부합하여 살려하는 영혼의 힘이다. 영혼의 올바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시키려하는 것이 바로 덕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찬란하게 현시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객관적인 도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지침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가르친다. “거짓 말 하지 말라”, “숙제 꼬박꼬박해가라” 등등의 개별적인 지침들을 말이다. 그 모든 개별적인 지침들이 이어지고 어우러져 마지막에 그 목표지점에 이른다. 이것과 마찬 가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각인을 다르게 지으시어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이러한 개별적인 목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전체 목적으로 나아간다. 혹자는 음악으로, 혹자는 학문으로, 혹자는 힘으로 등등 무엇을 하든지 전체가 하모니를 이루어서 이 땅에 존재하는 만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야한다. 온 세상에 인간들,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해야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는 악은 잠간동안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 악들에 대한 공의를 당장에 시행하시지 않는 것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다. 올바른 선을 행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악을 제거하시지 않는 하나님이 이상하지만,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무한한 감사와 찬양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극적이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잠시 동안 악인의 번성에 대한 혜안이 생긴다. 악인의 미래는 싱싱한 풀과 꽃을 베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곧 마르고 지푸라기처럼 날아가듯 그 보응을 받을 것이다. 믿음의 눈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B. 도덕적 상태의 중요성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는가? 이 세상에 있는 물건들은 생명이 없다. 물질들은, 동물들, 식물들은 도덕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나 의지가 없다. 물론 인간의 행실과 비슷한 동물의 행실도 있다. “짐승보다 못한 놈아”라고 할 때, 그것은 도덕이 떨어진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동물의 겉모양은 사람의 행실과 같아 보이지만 새는 그 의미를 모른다. 그 의미를 아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영혼에서 나온다. 이 세상의 피조물들에게 없지만 인간에게 가장 빼어난 부분은 영혼이고, 그 영혼의 핵심적 기능이 지성이다. 이 천하보다도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이 세상이 더 크고 넓지만, 인간이 그 천하보다 소중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내버려두시지 않고 다스리신다. 어떤 이는 말한다. “이 세상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맘껏 놀기만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어도 이 세상은 특히, 물질문명은 발전했을 것이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인간이란 존재는 생명샘가에서 과일이나 따먹고 놀기만 할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고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명령하셨다. “다스리다.”는 말은 “라다”이다. 그 “라다”라는 말에는 전치사 “베”가 있는데, “베”는 into이다. 속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인간이 완전하고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완전성의 발현되어야하기 때문에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그것이 도라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합치하며 살아가려할 때, 인간의 직업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창조목적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과, 청소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들 중 어느 사람이 더 행복한가? 그러면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 목적에 기여하면서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깨달을 것이다.
II. 도덕의지와 지성
하나님이 이 세상을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통치하신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가는 의지가 바로 도덕의지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도덕의지이고, 그것을 가르쳐주시고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게 하실 힘을 주시면 행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도덕의지가 바로 지식이고 이 지식은 지성을 통해 알게 된다.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다.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하나님의 도덕의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알고, 행할 힘이 없는데 하나님은 행할 은혜를 주신다. 지성으로 이해하고 은혜로 실천하게 된다.
IV. 용서와 사랑으로 돌이키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정해 놓으셔서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가는 것은 선(善)이다. 즉 도를 향해 가는 것이 선이다. 그것이 아니면 모두 악이다. 죄의 목적은 그 도를 못 따라가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악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향해 계속 가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을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가? 첫째는 회개이다. 그 선한 목적대로 살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한다. 그 창조 목적대로 안가려고 했던 자신에 대한 형벌과 마음이 바로 자기 깨어짐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둘째는 은혜이다. 다시 주님을 따라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능력을 주신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다. "Power of love"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사랑과 증오이다. 증오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해주신다.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희망이 있는 것이다.
V. 선의 연속성
창조목적을 한 마디로 하면 선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 선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실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어긋나게 행동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목적이란 항구를 두시고 인간을 향해 바람을 주신다, 멍청한 사공이 배를 맛 바람 쪽으로 돌려도 바람이 워낙 세서 갈 수 없다. “주 우리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인자하시다”는 것은 시편 기자가 자주 찬송하는 제목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선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로 인도하시려고 하심도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이 두 가지가 선의 연속성이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에게는 이 선이 잘 안 느껴지다가, 하나님을 따라가려는 자에게는 이 선이 잘 느껴진다. 이것이 각 사람 마다마다에게 있고 하나님께서 이 작은 물 줄기를 새내가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저마다 살면 결국 모든 인간의 그 물줄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창조목적으로 간다.
VI. 결론과 적용
이제 결론은 두 가지이다. 창조 목적을 따라가든가, 반항하든가? 그 중간은 없고 그것은 바로 반항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기 위해 그분의 선하심을 매일 맛보며 느끼며 살든지, 아니면 거스르면서 살아가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에 거하기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 세상에 구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 모두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걸어가자! 200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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