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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기른다는 것

에배소서 김남준 목사............... 조회 수 2245 추천 수 0 2012.07.23 23: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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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6:4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2007-05-06 안양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228 자녀를 기른다는 것

2007-05-06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가정 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I. 본문해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사람을 잘 만나야합니다. 첫째는 부모이고, 둘째는 배우자이고, 셋째는 자녀이고, 넷째는 좋은 목회자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맺어진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얻어집니다. 그 중에 맨 처음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통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지식을 흡수하여, 삶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배움을 얻도록 하십니다. 아이들은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옳은 것과 그른 것에 관계없이 부모의 신앙과 사상을 전수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바로 부모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특별히 부모 된 자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는 역할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과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와의 연합관계입니다. 이 연합이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인간을 흙으로 빚어서 세상에 내놓으시지 않고 부모를 통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와 자녀를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결탁시키시고, 자녀가 부모를 통해서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명은 자녀들을 참으로 올바른 인격과 삶의 태도를 가진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신자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II. 자녀를 노엽게 하는 길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 사용된 파로르기조(parorgi,zw)라는 단어는 “오르기조”(ovrgi,zw)와 “파라”(para,)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오르기조”(ovrgi,zw)는 “오르게”(ovrgh,)라는 명사에서 파생했으며, 이 합성어 파로르기조(parorgi,zw)는 “분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너희 자녀를 자극해서 분노를 품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하고 우리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이 연합의 통로가 끊어지면 그 어떤 교육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러한 연합이 깨지도록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몇몇의 경우가 있습니다.

 

A. 과도한 징계

 

첫째로, 아이들을 과도하게 징계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못을 했을 때, 부모에게는 자녀들을 책망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교육시킴에 있어서 그들이 항상 옳은 것만을 좋아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야단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하기 싫은 것도 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직무유기(職務遺棄)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가 책망과 징계를 하지 않으면, 결국 이 다음에 그 아이가 성장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책망과 징계를 받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성인이 된 다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여러분 자신들이 증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고 잘못을 고쳐주는 자체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마땅한 부모로서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면서 교육적인 이유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회초리를 대는 일이 필요하며 성경적으로도 그런 것들을 부모에게 허락하고 있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그러나 문제는 부모가 자녀를 징계할 때조차도 사랑의 연합을 깨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혈기를 가진 징계의 경우는 자녀들이 가장 심각하게 노여워하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징계하는 목적은 자녀를 위한 것이지만, 징계하는 그 순간에 부모는 참을 수 없는 혈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혼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나 매질은 자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육체의 죽음은 아닐지라도, 자녀의 내면 깊이 죽음과도 같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것이 비록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할지라도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자녀를 때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당한 징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월권(越權)입니다.

 

자녀들은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는 것에 대해서 부모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한 것보다 징계의 분량이 과도하다고 생각될 때, 또는 윤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일인데 자기를 강요하거나 징계한다고 생각될 때,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더욱이 이런 일이 빈번히 지속되면서 부모의 교육이 아이에게 흘러가게 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통로가 막히게 됩니다. 그것은 명분상으로는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녀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육과는 무관하게 자녀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범죄입니다.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교회 안에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 남아있고 심지어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교역자들의 가정 속에서도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 발견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회개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가정을 목양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성경적인 지침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어떤 성도의 가정에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확인했다면, 그를 치료해 주어야합니다. 마땅히 그를 근신에 처해야하고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계속적인 교회의 권고를 무시하면 더 중한 징벌을 내려서 자성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에 남은 지체들이 그런 징계의 과정을 보면서 마음 깊이 경고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을 보존하는 교회의 책무(責務)입니다.

 

B. 그릇된 기대

 

둘째로, 아이들에게 그릇된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와는 다른 개별적인 한 인격체임을 기억하십시오. 자녀의 성향에 대한 배려나 어떤 깊은 인격적 설득도 없이 부모의 기대만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기도해주고 도와주어야 하지만, 그 아이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도한 기대를 가지면 안됩니다. 신앙이 있는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녀에 대한 비뚤어진 기대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억압을 당하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져서 굽어진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삐뚤어진 기대는 하나님께서도 그 아이에게 기대하시지 않고, 요구하시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부모의 과다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녀는 일평생 자신을 자책하고, 결국에는 그 안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일그러진 자아상을 가진 채 살게 됩니다. 그러한 상처가 계속 쌓이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결국에는 그 관계의 기초마저도 무너져 버립니다.

 

부모들은 흔히 내 아이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내 아이가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천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능력과 성향과는 상관없는 빗나간 기대를 갖게 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랐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수십 만 명 가운데 한 명 나오는 귀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과도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예전에 저는 우리 아이를 흙덩어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그릇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에는 내 자식을 향한 사랑이 일그러져서, 그를 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저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깊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 차이점은 나도 자식을 향해서 기대를 갖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도 나에게 기대를 갖고 계신데, 나는 자식이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니까 그 관계가 소원해졌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며 나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토록 소중한 관계 자체가 파괴되도록 만드는 부모들의 양육 태도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양육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도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거듭나지 않은 가치관을 강요하면서 깨어진 부자의 관계, 깨어진 모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모두 내려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깊이 회개하고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식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해주었는지 깊이 반성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폭포수와 같은 사랑이 여러분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충분히 흘러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부모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꼭두각시나 도구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부모로서 그 자녀들에 대한 최대의 의무는 한없이 그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리는 그 자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랑을 맛보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배우고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한 자녀로 서 있는 자신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를 통해, 부모의 사랑이 자식을 통해, 하나님과 부모와 자녀가 다 함께 어우러져서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나가게 되는 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C. 그릇된 모본

 

셋째로, 아이들에게 그릇된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많은 측면들 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커다란 우주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일치와 조화를 볼 때, 그의 도덕적인 심성이 질서정연한 법칙을 따라 올바르게 형성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모순(矛盾)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단지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아버지가 자신을 책망하기 위해서 채벌을 가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폭력입니다. “아버지가 말은 그럴싸한데 행동은 순 거짓이구나!”라고 생각될 때, 그 자체가 아이를 분노하게 만드는 커다란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노할 때, 그 분노가 아이들의 심성에 영향을 미쳐서 도덕적인 가치체계를 허물어버리게 됩니다.

 

가정의 원리는 교회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최고인줄 알고 살다가 교회에서 잠시 생활을 하고 교회에 있는 지체들과 교제를 누리다가 보면, 교회에는 세상과 전혀 다른 신앙적인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에서 막 살던 자기 자신이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하고 각성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 안에 그런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 때,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더러우니까, 그렇게 살지!”하다가도 가정에 와서 “이렇게 사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마음과 영혼을 씻고, 손과 발을 씻는 이런 정화의 역할들을 가정이 담당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신앙적인 인격에 일치성이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자녀가 거짓말한다고 야단을 치면서 부모는 거짓말하고 돌아다닌다면, 그러한 도덕적인 그릇된 모본을 자녀들이 보면서 속으로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들의 생활태도를 그대로 답습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분노하면서도 부모를 따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일그러진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관성(一貫性) 있는 모본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결심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식에게 잘 보여야지 되겠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감명을 받고, 인생에 대해서 뭔가를 깨닫겠지!”하는 우발적이고 간헐적인 실천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인격적인 사람에게서 인격적인 삶이 흘러나오듯이, 부모의 존재와 성품 속에서 흘러나오는 일관된 삶의 모본을 보면서 자녀들이 영향을 받고 변화되어 갑니다. 그런 도덕적인 일관성을 가진 아버지, 어머니가 될 때에 자녀들이 일관성있게 올바로 자랄 수 있습니다.

 

III. 자녀를 양육하는 길

 

성경이 말하고 있는 자녀양육의 목적은 그 아이로 하여금 참으로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하는 것, 더 나아가 좀 더 큰 뜻을 품고 이 세상을 정복하는 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일이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지위와 권한과 물질을 사용해서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자녀양육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명을 가진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겠습니까?

 

A. 주의 교양과 훈계로

 

첫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가르쳐야합니다. 이것은 희랍어 원문에서 권면 혹은 책망으로 되어있습니다. 충고, 권면, 책망을 두루 이르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한 마디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삶과 실제적으로 연결된 가르침입니다. 여기에서 “교양”은 한 사람의 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특질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훈계”는 그 사람의 외적인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훈육한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고, 외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녀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신앙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입니다. 그 아이의 내면세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온 맘으로 사랑하게 하는 것, 주의 사랑에 끊임없이 감화되는 내적 세계를 가지게 하는 것이 자녀양육의 초점이 되어야합니다. 많은 재능과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자녀들 속에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부모가 그리스도께 깊이 사로잡히고 십자가의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를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이 세상에 많은 교훈들이나 삶의 태도나 처세술이나 교양 따위를 훤히 알고 있더라도, 그가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나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년 남짓한 세월동안 에베소 교회를 목회한 후에 순교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남긴 고별설교 속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1-32). 사도 바울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것을 교육시키거나, 이 땅에서 영원히 함께 있어줄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기 양 떼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드린 것처럼, 마지막에 우리 자녀들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 꽉 붙들어 주시길 부탁드려야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그리스도 예수께 깊이 사로잡힌 사람이 되면, 부모가 없는 때가 오더라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 우리의 자녀를 붙들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먼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흘려보내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말씀에 감화가 없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그렇게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부모라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배웁니까? 그냥 무지와 고집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무슨 교양과 훈계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B. 올바른 모본으로

 

둘째로, 올바른 모본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눈빛 다음으로 무서운 것이 자녀의 눈빛임을 알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보다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몸소 시청각 교재가 되어, 어떠한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날마다 주님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또한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잠 1:31).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살게 하고 싶은 삶을 부모가 먼저 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Paenitentia)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따라 살려고 하는 흔적이 여러분들에게 남아있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도 부모의 신앙과 삶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올바른 모본을 보임으로써,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마땅한 소임입니다. 부모가 보이는 삶의 모본이 예수님을 닮은 모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여러분들을 이렇게 가르쳤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부모님의 명예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모님이 아니셨다면, 여러분의 대(代)에서 그 불행의 고리를 끊어야합니다. 그 불행의 희생자가 여러분만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후손까지 그렇게 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혼란에 빠져 고뇌할 때, 꼭 필요한 신앙과 사상의 유산을 물려주려고 노력하십시오. “만일 아버지라면, 만일 어머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생각나는 부모가 되어야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가치와 이익 사이에서 고민할 때 눈에 보이는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도덕적인 가치를 내팽개쳐 버리려는 아찔한 순간에, 부모님과 그 가르침이 생각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다시금 돌이키게 해주는 그러한 부모들이 되어야합니다.

 

C. 사랑으로

 

셋째로,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의 첫 번째 항목은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충분히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들을 자주 안아주고 기도해주며 사랑해 주십시오. 아이에게 ‘엄마, 아빠는 이 세상에서 너희를 제일 사랑한단다.’라고 말해 주십시오. 아이들이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확신하면서 자랄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이 마땅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사람의 몸을 입히시고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땅에 내려 보내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는 대신 멸시와 욕, 그리고 쓰라린 고통을 당하게 하시면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서 33년이나 살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사 주님의 백성을 삼기까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는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살 때에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죄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불순종하다가 회개하며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리고 거기 계셨습니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그런 영혼의 고향이 되어야 합니다. 못난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과 다름이 없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결국에는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자녀들을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의 성적표에 매여 울고 웃으며 사는 그 모습이 참다운 부모의 모습입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소질이나 희망과는 상관없이 교육의 틀을 만들어서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돌리는 것은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흐르고 있는 충분한 이해, 용납, 사랑, 이런 것들을 주고받고 느낄 수 있는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부모를 통해서 자녀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충분히 느끼면서 구김살 없이 자라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오늘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그동안 바빠서 잘해주지 못했던 자녀들에게 장난감이랑 옷이랑 맛있는 음식을 사주거나 놀이동산 가서 실컷 놀아주면서 한꺼번에 다 보상해 주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우리의 어떤 잘못된 편견으로 인해서 자녀들이 분노하고 노여워하고 있는지를 깊이 헤아려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좋은 아들, 좋은 딸이 되어본 적이 없으면서, 우리 아이들을 향한 빗나간 기대나 그릇된 욕망들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자녀들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잣대로 그들을 기르려고 했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아이들을 영혼 깊이 사랑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부모인 우리들의 가장 큰 사명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랑을 맛보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지극한 행복입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을 이룬 것처럼, 자녀들과의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복된 가정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영혼을 위한 마음의 고통(롬 9:1-3)”을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장년) 자녀들에 대한 과도한 징계로 인해 자녀교육에 어려움을 당한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청년) 부모님에게 과도한 징계를 받아본 적이 있다면 그 때의 경험을 지체들과 나누어봅시다.
3. 자녀교육에 있어 부모의 모본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4.“주의 교양과 훈계로”양육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5. (장년)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의 어떤 부분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지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청년) 우리의 부모님들의 어떤 부분으로 인해 우리가 상처를 받았었는지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200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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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9 고린도전 기억하는 자 고전15:9-31  최장환 목사  2012-07-25 3834
» 에배소서 자녀를 기른다는 것 엡6:4  김남준 목사  2012-07-23 2245
7117 시편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시14:1  김남준 목사  2012-07-23 2157
7116 로마서 영혼을 위한 마음의 고통 롬9:1-3  김남준 목사  2012-07-23 4086
7115 열왕기하 잠잠할 수 없는 소식 왕하7:9  김남준 목사  2012-07-23 5547
7114 마태복음 그리스도의 마음 마9:36  김남준 목사  2012-07-23 5724
7113 시편 곤고와 환란중에 시25:18  김남준 목사  2012-07-23 6122
7112 요한복음 우리 몸이 다시 사는 날 요5:28-29  김남준 목사  2012-07-23 3643
7111 빌립보서 예수의 길을 구하는자 빌2:20~22  김남준 목사  2012-07-23 5322
7110 누가복음 겟세마네의 기도 눅22:42-43  김남준 목사  2012-07-23 3944
7109 요한계시 교회의 유형 -에베소교회 계2:1-7  강종수 목사  2012-07-22 2791
7108 마태복음 때를 아는 사람 마25:1-13  김동호 목사  2012-07-21 3367
7107 창세기 불가능에 도전하는 기독교 창18:1-15  김동호 목사  2012-07-21 2384
7106 창세기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창11:1-9  김동호 목사  2012-07-21 3116
7105 말라기 가난하신 하나님 말3:10-12  김동호 목사  2012-07-21 1963
7104 고린도전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고전10:31-33  김동호 목사  2012-07-21 2337
7103 로마서 영분단과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롬11:11-12  김동호 목사  2012-07-21 1872
7102 창세기 영하나님을 닮은 사람 창1:26-28  김동호 목사  2012-07-21 2003
7101 디모데전 직분자의 상급 딤전3:8-13  김동호 목사  2012-07-21 2603
7100 요한복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요3:1-8  김동호 목사  2012-07-21 2870
7099 이사야 영착각, 치명적 착각 사55:1-5  김동호 목사  2012-07-21 1893
7098 고린도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10:31-33  김동호 목사  2012-07-21 2153
7097 마태복음 영달란트를 땅에 묻은 사람 마25:14-30  김동호 목사  2012-07-21 2447
7096 빌립보서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 빌4:8-9  김동호 목사  2012-07-21 2188
7095 사도행전 부활이후 행7:54-60  김동호 목사  2012-07-21 2018
7094 요한복음 십자가와 구원 요3:16-18  김동호 목사  2012-07-21 2238
7093 마태복음 믿음대로 된다 마15:21-28  김동호 목사  2012-07-21 2793
7092 시편 시간의 소중함 시90:12  한태완 목사  2012-07-21 3109
7091 잠언 부부 성생활의 위기에 대한 존재의 용기 잠15:15~20  이준엽 목사  2012-07-19 3419
7090 창세기 결혼위기에 대한 존재의 용기 창2:23~25  이준엽 목사  2012-07-19 2136
7089 창세기 가정의 위기에 대한 존재의 용기 창1:26~28  이정수 목사  2012-07-19 2808
7088 이사야 비존재-不安(불안)에 대한 존재의 용기 사43:1-3  이정수 목사  2012-07-19 2699
7087 고린도전 비존재-허접한 일상에 대한 존재의 용기 고전9:26-27  이정수 목사  2012-07-1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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