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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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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년 1월2일 설교방송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회복해야 할 믿음의 권위
막1:21-28
오늘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거리에서 기도 드리고 나팔을 불고 자선사업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안식일 법, 성결법 등 저들이 중요시하는 것을 다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천대하는 무리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가르치는 것에 권위가 있다고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권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의 권위가 바리사이파 사람의 권위와 달랐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바리새인의 권위’만 있고 ‘예수님의 권위’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바랐던 다윗 왕국을 회복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청년들은 그걸 기대하고 즉각적으로 따라 나섰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일부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가게 해 주려고 부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저들을 부르신 것은 땅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룩되는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하려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한다는 것은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가능한 것입니다. 즉 악령과의 대결을 전제로 합니다. 지상의 권세란 악령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선교를 시작하시기 전에 받은 시험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나의 권위 아래 있다.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이 땅 위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과의 대결이 불가피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선교 활동의 첫 번 사건이 악령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악령과의 첫 대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회당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회당’안에 악령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예배당 안에 악령이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교회가 뭐하는 곳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는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그만 그릇된 권위에 쌓이면 되레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집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악령의 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당 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셨더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가르침이 율법학자와 달리 ‘권위’가 있다고 감탄을 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벌써 예수와 율법학자와의 대결이 암시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가르치셨기에 그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는지를 복음서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권위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언제나 삶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은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걸어라”하면 앉은뱅이가 걷고, “눈을 떠라”하면 소경이 보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되라”하면 문둥병자가 깨끗해 졌고, “악령아 나가라”하면 악령이 발악을 하면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새로운 생명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이런 놀라운 권위가 있었고 모두 이 권위에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왕국에 침입했다”고, “악령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너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룩됐는데 하나님은 너희와 같은 자들에게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원한다.”고 깨우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들은 “그렇지요. 정말 그렇지요.”하고 호응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을 했습니다. 이렇게 저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호응을 한 것은 이런 놀라운 사건들을 그들의 삶에서 친히 경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란 그의 삶과 말의 일치함에서 왔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과 대조를 시킵니다.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권위란 대단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민중들이 지킬 수 없는 갖가지 법을 만들어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지워줬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란 바로 그 때 그런 이들을 향해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돕기 위해 온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어려운 사람들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사회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이렇게 저들은 생명을 해치는 악령의 하수인 노릇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결한 것은 악령과의 대결과도 같았습니다.
“그 때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성전 안에 있었다”라고 복음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 악령이 예수를 보자 곧 알아봅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우리를 없애려고 왔습니까?” 하고 반발을 합니다. 여기에 신비한 비밀이 있습니다. 거짓으로 분장을 한 악한 권위자들이란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는 자를 제일 무서워합니다. 가면이 벗겨지면 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 안에서도 악령이 그를 금방 알아봅니다. 그리고 악령들이 한데 엉켜서 이 진리를 말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의 악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에도 악령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주변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 악령은 우리에게 “많이 소유해야 행복해 지는 것이야”,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거야” 하고 부추깁니다. 저들은 신문, 잡지, 텔레비젼을 통해서 우리들의 소유욕을 부추깁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이 선전에 코가 꿰어 무한 경쟁에 몰두하게 됩니다. 결국 사회는 인정도 사정도 없는 격렬한 투쟁의 장이 됩니다. 날이 갈수록 빈부 격차는 더 심해져서 약자들이 설자리는 축소됩니다. 그러는 과정에 우리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생태계도 파괴됩니다. 이것이 주검의 악령이 조작을 하는 산업문화입니다. 이런 사회의 가치주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교묘하게 복음을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그걸 이른바 ‘부흥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마이클 셀던의 ‘도덕능력’이라는 책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모름지기 지도자가 되려면 도덕능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여기서 ‘도덕능력’이란 공자시대의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지도자가 되고, 세상을 살리려면 ‘말과 행실이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 한대로 사는 사람, 또는 말한 것을 스스로 삶에 옮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세상 즉 악령을 이길 권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내 보일 낯 즉 얼굴인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도거나 목회자의 영적인 힘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류 역사는 생명을 사랑하면서 진실을 사는 자의 말과 뜻대로 될 것입니다. 폭군 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면서 술잔을 들었지만 로마는 기독교화하고 말았습니다. 하늘 열쇠를 잡았다고 자처하면서 전 세계를 주물럭거리든 교황도 독일의 한 승려에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여, 주여”하고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쓸데없습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악령이 추방이 되고 인정 공동체가 봄 동산의 민들레처럼 피어납니다.
우리도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도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삶을 말하고, 말 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서도,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악령이 추방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내 안에 있는 허망한 악령도 사라지고, 교회 안에 자리 잡은 악령들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예수님의 권위인 것입니다. 이 권위는 세상을 살리는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교회와 성도가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2011년도에 우리 교회와 교우들이 살아야 할 신앙생활의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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