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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교회답게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72 추천 수 0 2012.07.27 23: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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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2:23-2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1.23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교회를 교회답게  
막2:23-28

*23일 주일 오후(2시)에 허목사는 서울의 전농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갑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제목이 ‘교회를 교회답게’입니다.
거기에 맞춰 준비된 설교입니다. 
  
간절한 심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아우성을 치는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저들을 껴안으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서로 만나게 됐을 때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나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하나님나라 운동이 누룩처럼 퍼지게 되자 당황한 세력들은 예수님에게 도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도전을 했지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의 랍비라고 하는 자가 어떻게 저주받아야 할 죄인들과 그리고 개와도 같은 이방인들과 식사를 나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치 병자가 건강한 삶을 바라듯, 새로운 삶을 간절히 갈구하는 자라야 하나님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 기자는 이 이야기에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는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논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안식일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면서 밀 이삭들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먹은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다시 예수에게 공격의 화살을 보냅니다.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런 짓을 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성결 법’과 ‘안식일 법’은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법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한 안식일 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들의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39 가지의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안식일 2 천 보 이상은 걸어서는 안 되고, 음식을 짓지 못하고, 물건을 옮기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금요일 날 해가 지면 거지가 와도 먹을 것을 줘서는 안 됩니다. 나귀에 짐을 싣고 마당에 들어오자 해가 지면 그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물론 병을 고치는 것도 금기입니다. 심지어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있을 경우 그 부러진 다리를 바르게 잡아주어도 안 됩니다.  그렇게 안식일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밭을 통과하면서 벼이삭을 잘라서 비벼서 먹었으니 문제를 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벼이삭을 잘랐으니 이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볐으니 이것은 탈곡행위요, 그것을 이로 씹어 먹었으니 이것은 맷돌로 간 것이라는 거죠. 저들 보기에는 이것은 안식일 법을 어겨도 이만저만 어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비아달 대사제 때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얻어서 그 부하에게 준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강조하는 안식일 법이란 사람을 못살게 하는 법입니다. 특히 하루하루 노동을 해야 입에 풀칠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죽으라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적인 제도란 사람으로 기쁨에 찬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 제도 자체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득권자들이 이것을 그릇 되게, 자기들의 기득권에 맞도록 해석해서 사람을 못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신명기 5장에 있는 십계명을 읽어보면 압니다. 안식일 제도를 제시한 십계명이란 철저히 생명을 살리고 보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아 홍해를 건넨, 시내산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 계약은 “너희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낸 것은 나 야훼다.”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그 야훼야말로 저들의 생명을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어 저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분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나 여호와 밖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일견 “나만을 신으로 섬기라”는 자기중심적인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만 신적인 존경을 받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신들은 다 강자 편에 서서 저들과 같은 약자들은 짓밟고 수탈하는 신이요. 야훼만이 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신들을 섬기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앞날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상이란 생명을 해치는 악한 신들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도 나의 이름을 “생명을 살리는 일 외에는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강자들이 하는 것처럼 남을 해치는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써서는 아니 된다 말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안식에 대한 계약입니다. 그 본문은 이렇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너희 하나님 야훼가 분부하는 대로 행하여야 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엿새만 일하고 하루는 완전히 쉬라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하루 종일 즐겁게 지내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일입니까?

저들이 애굽에서 살던 일을 뒤돌아보십시오. 1 년 365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 피곤해도 병이 들어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무수한 노예들이 애굽 군대의 채찍 밑에 쓰러져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하루 하루의 삶이란 저주스런 한 맺힌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노동의 열매를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즐긴 것도 아닙니다. 그 노동의 열매란 다 강자들에게 약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현현한 신이라고 하는 바로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엿새만 일하고 하루는 쉬라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하루 씩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하루 씩 쉬라는 것입니다. 몸이 고달플 때 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쉬라는 것입니다. 쉬면서 가족과 같이, 그리고 이웃과 같이 삶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엿새 동안 하는 일도 옛날과 다릅니다. 엿새 동안의 일이라는 것도 자기들의 생업을 위한 것입니다. 노력해서 일한 열매는 노력한 자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처럼 누가 와서 약탈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일 자체의 가치도 완전히 변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야말로 그 저주스런 삶에서의 해방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감격에 찬 저들의 이웃을 향한 자세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 밑에서 일하는 종들을 향한 심정도 달라졌습니다. 저들 역시 일 주일에 하루 씩 쉬면서 삶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의지하고 사는 갈 곳이 없는 떠돌이들도 푹 쉬면서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소나 나귀들도 쉬어야 한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레에 하루 씩은 쉬어야 한다는 안식일 법에 “너의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하지 못한다. 그래야 너희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란 저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던 쓰라린 경험입니다. 따라서 그 때 일을 생각하고 모두가 하루를 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진정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것인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주를 단 것입니다. 2 천 보 이상을 걷지 못하고, 병자를 돌봐도 아니 되고 심지어 부러진 다리도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배고픈 거지에게 먹을 것도 주지 못하고, 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온 나귀의 짐도 내려주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찌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수긍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런 고마운 안식일 법이 어떻게 이렇게 변질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유대나라가 바벨론에 망하게 된 뒤에 이룩된 일입니다. 이방 나라에게 패망하여 포로가 된 유대 지도자들은 이것을 그들의 율법을 자키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저들의 삶이란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다 미천한 쓰레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인식일 법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안식일 법을 보십시오. 모두 안식일에 쉬게 하라는 법의 근거를 출애굽 사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에서 찾습니다. “이는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세기 1 장의 창조설화도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잡혀간 뒤 여호와를 지존한 자로 높이는 과정에 작성이 된 문건임) 저들이 강조한 성결법, 안식일 법도 하나님만을 높이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작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 사람을 완전히 비하했습니다. 저들은 사람을 비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한 판단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란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교회도 바리새파 사람처럼 하나님을 높이는 과정에 사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신격화하면서 이 경향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는 정성을 다 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으뜸이 되는 본분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늘에 치솟는 성전을 짓습니다. 정중한 예배 순서를 마련합니다. 장엄한 음악을 창출합니다. 그리면서 사람이란 만물의 때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구라파에 있는 대 사원들을 보십시오. 건물들이란 하늘을 향해서 웅장하게 치솟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화려한 색깔로 하늘나라의 영화를 드러냅니다. 천지를 진동케 하는 파이프 오르간은 예배 자들의 마음을 압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대상은 교인들의 머리 위에 높이 치솟아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엄숙한 예복을 입고 정중한 모습으로 군임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비해서 교인들이 앉는 의자란 성냥개비처럼 왜소합니다. 거기에 앉은 사람들의 찬송 소리는 거대한 오르간에 휩싸여서 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날로 왜소해 집니다.

이와 같은 전통 속에서 교우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신부나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제정된 의식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과 예수님은 커지고 사람은 왜소화됩니다.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예수 찬양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만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돕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십니다. 교회의 의식이나 제도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에 공헌하라는 것입니다. 찬송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만을 높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라는 찬송가는 그렇게도 많은데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찬송은 그렇게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날로 볼품없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실하다고 하는 교인들을 보고 가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그냥 무시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합니다. 사람을 다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 서로 위하고 아끼는 생명공동체가 탄생되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성암교회가 이런 생명공동체를 갈망하는 심정들이 날로 증대되는 것을 압니다. 그런 잔치 집의 기쁨을 맛보게 해달라고 속삭이는 기원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오,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차적, 3차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을 위해서 신앙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고, 가장 소중한 보화를 찾도록 노력합시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총력을 기울이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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