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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5: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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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3.27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무엇이 우리를 위함인가?
막15:29-39
오늘의 본문은 예수 수난 이야기의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네가 그리스도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고 하면서 예수를 조롱하였다고 되어 있지요? 예수는 그때 묵묵히 있을 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부제목을 “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을까.”라고 했습니다. 이런 설교 제목은 오늘날 인기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고 무엇이든 빌기만 하면 들어주는 그리스도여야하고, 실패보단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들 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하튼 당시로서는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 구원의 빛을 던져 준 사건이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사람은 누구나 의미를 추구합니다. 의미가 있는 한에서 희망이 있고 고생도 참을 수 있습니다.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위로를 받고 일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현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고, 욥의 이야기가 그렇고, 또 아우슈비츠가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절규하셨듯이, 욥도,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절규했을 것입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은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며,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도 이와 같은 눈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하고 말하였다”(37-39절).
사람들은 성전 휘장이 찢어진 기적 때문에 백부장이 이런 고백을 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39절에는 분명히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그런 고백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일은 십자가와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백부장은 그것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아마도 나중에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보고서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백부장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의 입장이지만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관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변절하거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는 감화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군인이니까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또는 그에게 어떤 아픔이나 죽음의 경험이 있어서, 예수의 의연한 죽음 앞에서 경외감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예수의 죽음에 관련시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바로 이런 백부장의 방식이 갈릴리 사람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련시키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삶의 부조리함을 많이 겪었습니다. 억울하게 로마의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많은 것을 빼앗기고 억눌리며 살았고 또한 예루살렘의 종교 귀족들로부터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자기들만 소외되고 빼앗기고 죽임당한다고 하는 배반감과 열등의식 그리고 패배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했고 희망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조롱을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하는데도 십자가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조리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최고의 극형을 받고 있고, 천군천사가 내려와서 심판을 하면 좋을 그 자리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버림받은 자의 절규만 있었습니다. 이게 어디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던 그가 이렇게 맥없이 죽을 거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그와 같은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낙망하고 비탄해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반대로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 날마다 힘든 삶을 살아오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외아들마저도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앞에서 큰 위로를 받고 자기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아들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서로 위로했습니다.
사와 마사히꼬 목사의 투병 일기에도 이런 점이 잘 나타납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에서 남북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고 한국 사람과 결혼하였으며, 유신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돕다가 본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착하게 살았고 건강에 유의했고 매사에 조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49세 때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그 해 여름에 갑자기 위암으로 위 절제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후 간으로 전이가 되어 수술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50세 되던 해 3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적은 일기가『약할 때일수록』이라는 책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위 수술을 하기 직전 조깅을 하면서 다리가 불편한 사람을 안쓰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자기처럼 조깅을 할 수 없으니 딱하게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지 며칠이 안 되어서 위 절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에도 전이가 되지 않으면 앞으로 몇 년을 살면서 책도 쓰고 목회도 하려고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마침 어느 교회에 부임하기로 약속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간의 시간이라도 허락하실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책을 쓰는 계획도 포기하지 않았고, 부인과 같이 목회를 할 계획도 세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병은 그런 계획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서 마침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아, 자궁암으로 그친 사람이 부럽다 …… 유암으로 그친 사람은 좋겠다. 위암으로 그친 사람은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암이라도 다른 암환자를 부러워하는 그런 처량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아까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로서는 암의 재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은 나에게 있어‘아, 그렇구나, 나는 언제까지나 여유를 가지고 남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 나는 예수님과 가까이, 이렇게 말하면 실례지만,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로구나’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니까 자기 몸을 구할 수 없는 나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구하지 않은 모습으로 함께 계셔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다시 승리한 부활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걸어가려고 생각합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주 의연한 모습으로 자기 할 일들을 해 나갔습니다. 교회에도 부임을 했습니다. 아마 몇 주도 설교를 못한 것 같지만 녹음해서 설교 시간에 테이프를 듣는 식으로 몇 주간을 한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부조리한 것이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앞서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런 부조리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사실에 위로를 받으면서, 자기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 얹혀서 가는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네가 그리스도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너 자신이나 구원하라’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한 그리스도를 보면서 실망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서 한없는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 버림받고 죽임 당하셨기 때문에 자신은 그분의 등에 얹혀서 그분의 죽음에 묻혀서 갈 수 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있다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 강한 것 화려한 것만 추구합니다. TV를 켜면 온통 건강하고 화려한 미남미녀들만 사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실패한사람은 없고 성공한 사람만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도 큰 교회 목사만 목사 같고 작은 교회 목사는 처량하고 능력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는 세대입니다. 어두운 곳, 힘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자꾸 안 보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합니다. 교회마저도 자꾸 커지고 웅장해지려고 하고 화려해지려고 하고 그저 복 받아서 더 건강하고 부유해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도 ‘죽었다가 살아난’ 반쪽만을 봅니다. 그것만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이렇게 승리와 성공만을 인정하는 세상을 추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가는 방향과는 다른 길로 좁은 길로 가신 예수,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아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초라하고 부조리한 현실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경험하고 전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 구원이 있음을 믿고, 나의 아픔도 부조리함도 버림받음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약함과 아픔 그리고 부조리함을 이겨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약함과 아픔과 부조리함에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우리교회의 교우들이 이 사순절에, 다른 교회의 성도들처럼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말하거나 믿지 말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호기롭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한 채, 조롱을 당하다가 무능력하게 죽어버린 예수를 바로 읽는 눈들을 가졌으면 합니다. 여기에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3일 만에 보란 듯이 살아난 성공과 승리가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조롱을 당하다가 죽은 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함’인 줄 여러분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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