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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과연 간사한가?

마태복음 박신 목사............... 조회 수 2053 추천 수 0 2012.08.04 23: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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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3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2003.6.30 http://www.nosuchjesus.com/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1-3)

신기루 같은 기쁨

2002년 여름 한 달간 모든 한국인들은 평생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다란 희열을 맛 보았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 유무식을 불문하고 동일한 감격을 누렸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도 아니고 단지 4강에 오른 것뿐이었다. 국민 각자의 형편이 나아진 것 하나 없었다. 오히려 육신적으로 피로했고 생업에 손해를 보았지만 즐거웠다. 사람의 행복은 돈, 권력, 명예, 건강 등 외적 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생생한 체험을 전국민이 동시에 했다.  유사이래 없었던 일이며 전국민이 일시에 느꼈던 외형적 기쁨만으로 따져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의 기적을 맛 본 것에 견줄만 하다.  

그런데 문제는 4강전에서 독일에 패하자 마자 몇 주간 계속되었던 그 기쁨이 마치 바닷가에 쌓은 모래 탑이 파도가 스쳐 지나가면 와르르 무너지듯 일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너무 허탈해졌다. 그 텅 빈 모래 사장에는 “월드컵 후 무슨 재미로 살지?”라는 공포 아닌 공포(?)가 전국을 엄습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자 전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찬양했었다. 우리는 전국민이 모여 축제를 안 벌려서 그런가?  기쁨이 거품처럼 너무 순간적으로 빠져 나가버렸다.  

그 동안의 기쁨은 신기루 같은 허상이었는가? 인간의 행복이 외형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인데도 왜 그 동안 누렸던 그 감격과 기쁨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누구 할 것 없이 분명히 목청이 쉬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렸다. 4강에 올랐을 때 허벅지를 꼬집으면 분명히 아팠고 절대 꿈은 아니었다. 도대체 인간의 참 행복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특별히 신자라면 예수 믿고 행복해졌는가? 지금 현재의 신앙생활이 행복한가? 솔직히 예수 믿는 것이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올라 간 것보다 더 행복한가?

흔히들 예수 믿는 것을 장독대에 정한수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고 복 받기를 간구하는 기복 신앙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전도할 때 보면 “사업에 실패 한 자 있습니까? 병들어 고생하십니까?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까? 자녀가 대학 입시에 낙방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예수님께로 나와 고침을 받고 행복해지십시오”라고 권하면 상호 모순되지 않는가?

인간은 과연 간사한가?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 ‘복’이라는 용어는 원어상 조금 기쁘고 즐거운 정도가 아니라 절정에 이른 최대치의 행복- 지고 (至高)의 복을 말한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신자는 최고로 행복한 상태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 최고의 복을 준다는데 목사가 감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복의 성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외형적, 현실적 형통은 행복이 아니고 오직 정신적, 내면적, 인격적, 영적 성숙과 충만 만이 행복인양 분위기를 몰아간다. 그러면서 좀과 동록과 도적이 들 끓고 썩어 없어질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오직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전도할 때 사업에 실패한 자나 병든 자들에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교회 나오면 사업이 흥하고 병이 낫는다고 하는 말은 예수를 믿게 만들기 위해 순전히 꼬시는 미끼에 불과하지 않는가? 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사기를 친 꼴이다.

모든 인간이 제대로 행복하지 못하고 심지어 신자마저 무슨 일수돈  이자 갚듯이 주일을 마지못해 지키고 10년 20년을 교회 다녀도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행복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행복관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니까 행복이라고 지금껏 추구했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겉으로 믿음이 좋아 보이는 것과 상관 없이 아주 많은 신자가 그렇다. 여전히 불신자시절처럼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아무런 표적이 없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격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복을 단순하게 현실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으로만 구분한다. 이는 행복에 대한 아주 잘못된 이해다. 대개의 사람들이 행복을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하니까 두 가지를 다 갖추어야 행복이라고 하는 사람과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거나 고집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교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믿기만 잘 믿으면 매사에 복을 받고 형통하고 병도 낫고 아이들 대학 입학도 된다는 것만 가르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은 현실의 복이 아니라 죄를 멀리하고 인격적으로 성숙되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영적인 안식이 축복이라고 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고, 둘 다 중요하니까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도 잘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다. 즉 행복은 현실의 형통이나 정신적 안정의 둘 중 하나이거나 혹은 둘 다에 달렸다고 한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최고의 행복은 이 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독일에 지자마자 감격이 사그러진 것을 두고 “예선만 통과하길 바랐는데 4강에 까지 올랐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비난 받을 일이 절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한국이 결승전까지 가서 심판의 편파 판정, 관중들의 응원, 기타 홈 어드밴태지 일절 없이 세계 최장 브라질을 상대로 정말 완벽하고 정당한 승리로 그것도 3-0 정도로 두말 못하게 이겨 우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시 공휴일이 선포되고 학교는 휴학하고 길거리마다 사람의 물결로 뒤덮여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가 방방곡곡 열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밤새 싫컷 떠들고 평생 최고로 꿀맛 같은 단잠을 자고 그 다음날 모두 느지막하게 일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행복할까? 4강에서 떨어진 후 이제 무슨 재미로 사는가 걱정이 앞섰듯이 똑 같은 걱정이 수 십 배나 더 큰 크기로 가슴을 밀고 들어오지 않을까? 이제부터 무엇을 해도 어제 저녁 이상 신나는 일이 두 번 다시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아니까 더 쓸쓸하고 힘이 빠질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간사하거나 심성이 약아 빠지고 악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일 뿐이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예선, 16강, 8강, 4강 진출하는 매 게임에 전국민이 목을 매달고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경험을 한 것은 인간의 본성상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간사하다고 보니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오해하게 된다.

영어로 행복은 Happiness인데 이 단어의 어간 hap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는 동사 happen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좋은 일이 발생하면 행복한 것이고 발생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행복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해주는 말인 것 같다. 현실적 형통이나 정신적 안정만으로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이 단어의 의미만 살펴 보아도 알 수 있다.  

한달 수입이 이천 달러에서 사천 달러가 되면 행복하다. 누가 뭐래도 기쁘다. 목사라도 기쁘다. 그런데 그 4천불 수입이 몇 년간 계속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은 커가고 돈 들어 갈 곳이 많아지면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짜증만 늘어 간다.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7천불 수입이 안 되면 힘들다. 그런데 요행히 승진해서 그 정도 수입이 되면 또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는 주위에 고급 집이 눈에 들어 오고 여행도 가야 하는데 그 수입으로 엄두도 못 낸다. 또 만불 수입을 이루기 위해 죽어라고 일한다. 소망하던 일이 형통의 모습으로 일어나야만 행복해지는데 곧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으니 제대로 행복을 누려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이 그렇게 반응한다고 해서 단순하게 간사하다든지, 욕심이 끝이 없다든지, 정서적 안정보다 재물을 우선한다는 식으로 무조건 매도할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돈이 적거나 많거나 보다 잘못된 행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Happy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한  새로운 기쁜 일이 안 일어나는 동안에는 절대 행복해지지 않는다.
월드컵 1승, 16강, 8강, 4강 까지 오를 동안에는 내 속에 기뻐할 일이 계속 생기니까 행복한 것이지 꼭 4강에 오른 것이 기쁜 것만은 아니다. 우승을 하고 축제를 즐긴 그 다음 날 아침 행복하지 못한 것은 더 이상 올라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결국 무엇인가 신나는 일이 happen 해야 happy해진다.

새벽기도에 누가 나오는가?

신자의 경우에 교회를 10년 20년 다녀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를 적게 하고 말씀을 보지 않고 봉사나 구제나 선행을 하지 않아서인가? 헌금을 적게 하고 십일조를 도적질 해서 그렇는가? 아니다. 신자의 기도 제목들이 주로 무엇인가?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시고, 병이 낫게 해주시고, 골치 아픈 이런 저런 일들 해결 해주시고, 상처 받은 것 신원해 주시고 등이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되어 그 숙제들이 풀릴 때까지는 힘이 없고 행복하지 않다.

새벽 기도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나오는가? 얼굴 상이 찡그릴 대로 찡그려져 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 잘 나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잘 나가기 바쁜데 새벽 기도까지 나올 여가가 어디 있는가? 40일 작정 새벽기도에 개근하거나 금식 기도원에 가서 울부짖는 자는 믿음이 좋을는지 몰라도(?)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기도 제목이을 붙들고 계속 억지로 참고 기다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응답되면 그 때 가서야 얼굴이 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뿐이다. 새벽기도 한 동안 쉬다가 몇 달  안 가 어느 날 또 다시 죽상을 하고 나타나 담임 목사님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저 집사님 댁에 또 무슨 힘든 일이 생겼나보다.” 신자가 기도가 응답이 되어야 겨우 힘을 얻고 기뻐할 수 있다면 단지 종교적 용어로 치장했다는 것 뿐이지 반드시 어떤 기쁜 일이 일어나야 행복해지는 일반인들의 행복관과 하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현실적 문제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찬양 집회나 부흥회 참석하거나 기도원에 며칠만 올라 갔다 오면 자기 인생의 먹장 구름은 완전히 말짱하게 걷혀버린다. 이제는 마치 전세계를 자기 힘으로 금방 변화시킬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병으로 세상의 죄악과 마귀는 다 두드려 잡을 것처럼 설쳐댄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면 또 다시 시들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에 내면적, 정서적, 영적으로 흥분되어 충만한 상태가 분명히 일어났었는데 그 상태가 차츰 소진 되어갔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도 뭔가 happen해야 만 happy해지는 습관과 태도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좀더 화끈하게 은혜 받을 집회가 없는가 두리번거리고, 처음 믿었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을 다시 맛 볼 수 없을까 항상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행복(happiness)를 추구하면 끝이 없다. 평생 가도 기쁨이 없다.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새롭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행복에도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 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기쁘고 풍성해야 만족하지 같거나 덜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시큰둥하다. 그래서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부족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우리 모두 현실 생활과 신앙 생활 양 쪽에서 지금껏 경험하는 바다. 돈은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고  기도도 아무리 해도 어려운 일은 자꾸만 더 생기며 제대로 충만한 안식을 누릴 짬이 없다. 불신자는 행복을 위해 돈을 벌고 신자도 행복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형통이 아니더라도 돈이든 기도든 꼭 기쁜 일을 일어나게 해야 겨우 만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하는 복은 행복(幸福)이 아니라 축복(祝福)이다. 영어로 하면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다. 인간이 추구하여 쟁취하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어주시는 복이다. 영어 Blessing의 어원은 제단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Bleed이다. 그렇다고 그 Bleeding이 단순하게 윤리도덕적 죄를 회개하고 과욕을 부린 것을 반성하여 용서를 구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부패된 영혼으로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내 사고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의 속죄의 제단 위에 완전히 죽어서 바쳐져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  존재, 모든 문제가 그것이 현실적, 정신적 혹은 영적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기쁘고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것 만큼 착각 중의 착각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복을 누리려면, 행복을 제대로 찾으려면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하나님 앞에 알고 고백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내가 세상에서 채우려고 했던 욕심의 질이 나쁘고 그 크기가  많았던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우리 가운데 정말 큰 욕심 안 부리고 소박하고 평범한 수준의 꿈을 갖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불신자 가운데도 무소유를 주장하며 생활 철학으로 삼는 사람도 많다. 내가 가진 꿈의 크기를 측정하기 이전에 나라는 전 존재의 실체가 완전히 부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자아 안에는 내 인격을 성숙시키고 감정을 고양시키고 정신적 안정을 찾는 소원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절대 충만해지지 않는 부분이 따로 있다. 구조적, 본성적, 생래적으로 인간 내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인간의 영혼이 텅 비워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직접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생령(生靈)이 되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않고는 살아 있는 영이 아니라 죽은 영이 될 수밖에 없다. 생명은 있으되 충족되지 않는다. 지정의를 동원해  모든 사고와 활동을 스스로의 책임 하에 열심히 해보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리 해도 충족함을 구할 수 없는 존재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오랜 만에 심심풀이로 한국 영화 하나를 비디오로 봤다. 큰 사건을 저지르고 절간으로 피신한 폭력배들과 스님들 간에 생기는 일을 코믹하게 그린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였다. 어떤 일을 두고 서로 다툼이 벌어져 여러 가지 게임을 하여 이기는 측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승부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지 스님이 밑 빠진 독을 하나 가지고 와선 그 독에 물을 먼저 채우는 쪽이 이긴다고 했다. 아무리 물을 채워봐야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 스님이 깨어진 독에 자기가 들어가선 모든 것이 사람 마음 먹기에 달렸으므로 내 마음 속에 물을 가득 채우고 내가 독 속에 들어 왔으니 독 속에도 물이 가득 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완전히 불교식 해법이었다. 승부가 결정 난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폭력배 두목이 밑 빠진 독을 들고는 연못에 빠트려서 완전히 물 속에 잠기게 했다. 밑은 빠졌지만 물은 가득 찬 셈이었다.

대다수 신자의 행복관이 바로 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다. 조금만 죄를 지어도, 축구 경기 구경에 열을 올리느라 교회 봉사를 조금만 등한히 해도, 지난 주간 현실의 삶에서 돈을 조금만 밝혔어도 큰 죄라도 지은 양 생각하고 그래서 주일 예배 대표 기도할 때 마다 지난 주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기 바쁘다. 그  배경의 생각이 무엇인가? 내 마음에 정신적 영적 평강이 없었다는 뜻이다. 행복이 자기 마음 먹기에 달렸고 자기 마음에 어떤 외부적 요인이 그것이 죄이던 현실의 어려움이든 무엇이든 간에 마음의 평강을 흔들었기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벽기도에 죽을 상을 하고 나와 악을 바락바락 쓰는 것은 신자마저 꼭 무슨 기쁜 일이 일어나야만 행복하다고 믿는 사고를 나타내주는 전형적인 표본이다. 겉으로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신앙적 용어를 동원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렇게 치성을 드려도 복 주시시 않을 것입니까”라고 하나님에게 따지고 담판하자는 것이지 않는가? 예수 잘 믿었으니 믿은 만큼 좋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행복관(happen-happy)이다.  

신자의 행복관은 달라야 한다. 참 행복은 내 존재 자체가 밑 빠진 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욕심이 많은가 적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채워지는 것의 질과 양에 따라 그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밑이 빠져 있기에 원천적으로 무슨 수를 써도 채워질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행복해진다는 원리는 사실은 세상 사람의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저들은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고 또 스스로 의미 있는 어떤 일을 찾아서 한다 해도 참 행복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밑이 빠진 독인 줄 모르고 그 빠진 상태로  자기 힘으로 물만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자마저 그들과 동일한 행복관을 갖고 있으니 큰 일 아닌가?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그 독이 채워진다. 폭력배 두목이 밑 빠진 독을 물 속에 완전히 잠겨 물을 채웠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나’라는 존재와 삶과 전 인격을 푹 잠겨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죄악, 상처, 시련, 환난, 불안, 염려, 초조, 분노, 눌림, 매임, 그 무엇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 안에 완전히 던져 넣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의 생각, 행복관이 완전히 뒤 바뀌어져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으로는 내 갈급한 심령이 채워지지 않더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버러지 같으며 게으르고 더럽고 추하며 밑 빠진 독처럼 허무와 공허만이 가득 찼던 인생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독은  깨진 채로 있다. 그런데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을 정말 따뜻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감싸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분이 나를 채우시고 붙드시는 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날마다, 매 순간마다 체험하는 것이다. 정말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의 웅덩이에 내 인생 전부를 풍덩 잠기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게 기쁘고 좋은 일이 일어나든 안 나든 심지어 환난과 고통과 상처와 분노 속에 나날이 지새는 것 같아도 그 웅덩이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스스로 자족하거나 덤덤하거나 달관하거나 마음을 바꿔 먹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 사랑의 연못 안에 잠겨 있는 것만으로 기쁨, 감격, 희열이 넘치며 갈수록 평강과 위로가 넘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아무리 값지고 재미있고 신나는 것으로도 그 연못에 있는 나를 빼어내지 못하며 나아가 그런 것들로 유혹과 시험을 받지 않으며 날마다 주님 앞에 가까이 가서 그 관계가 깊어져 더 연못에 깊이 잠기게 된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죄악과 악령과 더러운 것들과 사람들과 환경 앞에 서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담담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어떤 일을 성취해야 갖는, 잠시 잠간밖에 그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 행복(Happiness)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그 아들로 대신 흘리시게 하여 죽었어야 할 우리를 새롭게 살리었고 당신의 자녀로 인쳐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기 전의 모든 인생은 밑 빠진 독이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 모든 인생의 진정한 참 행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시작되고 완성된다. 신자는 참 행복을 알고 맛보기 시작한 자다. 기도해서 행복한 일을 발생할 것이라고 제발 기대하지 말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Blessing) 안에 잠기기를 소원하라. 그럼 세상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든 안 벌어지든 관계없이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마태복음 강해 (27)  6/3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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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0 에배소서 지혜로운 사람 엡5:15-17  한태완 목사  2012-08-07 3310
7169 열왕기상 마음이 낙심될 때 왕상19:1∼8  조용기 목사  2012-08-06 3433
7168 이사야 경청하고 귀를 기울이라 사34:1  한태완 목사  2012-08-05 2878
7167 요한계시 버가모교회 계2:12-17  강종수 목사  2012-08-05 2541
7166 마태복음 암이 낫는 것은 복도 아니다 마5:3-12  박신 목사  2012-08-04 2373
» 마태복음 인간은 과연 간사한가? 마5:1-3  박신 목사  2012-08-04 2053
7164 마태복음 순종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4 2461
7163 마태복음 복음의 화룡점정(畵龍點睛)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4 1991
7162 마태복음 순종하지 못하는 첫째 이유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4 2516
7161 마태복음 정작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3 2106
7160 마태복음 다시 일곱 귀신이 들지 않으려면? 마12:43-45  박신 목사  2012-08-03 3268
7159 마태복음 평생에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말 마12:38-42  박신 목사  2012-08-03 2565
7158 마태복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마6:33  박신 목사  2012-08-03 5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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