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6:1-15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년 7월29일 http://dabia.net/xe/603234 |
정용섭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요 6:1-15, 성령강림절후 제9주, 2012년 7월29일
‘오병이어’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에 보도된 것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야기가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실컷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는 겁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별로 많은 게 못됩니다. 본문에 보면 이것은 한 아이가 갖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기껏해야 한 가족의 한 끼 먹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것으로 오천 명이 먹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백 데나리온(2천만 원)어치의 빵으로도 오천 명이 먹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만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거나, 물 위를 그냥 걸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이런 초능력이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증거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검은 모자에서 오색종이를 무한정 끄집어내는 마술사처럼 보입니다. 성경의 이런 보도를 그대로 믿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다르게 읽어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마술사로 믿지 않습니다. 마술은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연예오락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종교적 엔터테이너로 믿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병이어를 좀더 합리적으로 해석합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먹을거리를 갖고 있었지만 서로 눈치를 보다가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내놓자 모두 자기 것을 내놓자 열두 바구니나 남았다는 겁니다. 그럴듯한 추정입니다만 그것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네 복음서가 그런 암시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영적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빵을 먹고 배부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고 배부른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쨌든지 우리는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당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굉장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려고 하는 핵심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그것을 정확하게 전합니다.
오병이어 오병이어를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을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 6:14) 이들의 반응은 그럴만합니다. 사람들의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꿔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본문의 선지자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께 자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오실 그분인가?’ 하고 묻게 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먹는 문제의 해결은 인류의 오랜 숙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옛날에 비해서 훨씬 좋아진 오늘날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그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경제 살리기에 모두 몰입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계 경제가 어렵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나라가 부도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건 대부분 상대적인 겁니다.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가난하다고 느낍니다.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느낍니다. 실물 경제가 나쁘다고 하면서 수출이 어려우니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경제학자들이나 경제 관료들의 주장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계속 달리게 하는 형국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야 하나요? 지금 제가 가난의 미학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시대정신이 안고 있는 무한정의 탐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죄가 아닐까요? 제가 동의하든 않은 상관없이 지금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리워합니다. 거기에 매달립니다. 오병이어를 일으킬 선지자를, 그런 메시아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고 전합니다.(요 6:15a) 그럴만합니다. 오병이어의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지금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즈음에 일어난 것으로 전합니다.(요 6:4) 오병이어와 유월절은 깊숙이 연결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으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제적인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네 달 반쯤 남겨놓고 있습니다. 안철수 교수의 대망론이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소위 안철수 현상은 바로 대한민국을 읽을 수 있는 키워드입니다. 대중들이 그에게 자기를 투사시킵니다. 그분에 대한 평가는 다 다릅니다만, 오병이어 사건 앞에서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했던 민중들의 열광주의가 여기에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대중들을 피해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도 이와 비슷한 사실을 보도합니다. 오병이어 후에 예수님은 민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셨고, 그 동안에 제자들을 배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막 14:23) 민중들로부터 거리를 둔 겁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 당신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가 치솟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인기가 짱입니다. 이 기회를 잡아서 부패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더 나가서 유대 독립을 이뤄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 모릅니다.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습니다. 만약 그때 예수님이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혁명을 일으켰다면 유대의 역사는,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민중들의 혁명의지를 외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세월이 흐른 뒤에 그는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민중들은 빌라도 총독 앞에서 혁명가 바라바를 석방시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의 왕권 오병이어를 둘러싼 본문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왕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이 그들이 생각하는 왕권과 달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왕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왕이십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에서 합창단들은 예수님을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이라고 노래합니다. 세상의 왕은 많습니다. 모두가 그런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왕은 한분이십니다. 지금 저는 세상의 왕은 무의미하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정치와 경제 문제가 아무런 의미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의 왕과 하늘나라의 왕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왕권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해결해주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오병이어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그런 선지자를, 그런 메시아를, 그런 영웅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걸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기업총수들도 그걸 약속합니다. 그것은 그것 나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요구를 늘 거절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로마 황제나 총독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을 기억하실 겁니다. 첫 번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신 8:3절을 인용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막 4:4) 예수님도 이런 고민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절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왕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요구를 그대로 반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오병이어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면 부자가 될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암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사람들은 신사도운동이나 삼박자 축복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암시하는 사람들은 청부론을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빵 문제, 경제 문제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걸 원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왕들에게 가면 됩니다.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고, 그런 기업에 들어가서 활동하면 됩니다. 저는 그런 삶을 나쁜 뜻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혼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가 그런 일을 위해서 오신 것이라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한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무엇일까요? 그가 왜 왕 중의 왕일까요? 그가 왜 생명 나라의 왕일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즉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는 분 이외에 우리에게 무슨 왕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오병이어는 그것이 아무리 신기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모두 먹고 죽을 양식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경제 수준이 지금보다 열배 높아진다고 해도 삶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죄의 실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삶이 여전히 지루합니다. 허무합니다. 생명과 단절됩니다. 생산하고 소유하고 소비하는 삶의 반복에 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전혀 다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고 자기연민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 속으로는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과 같은 소비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솔직한 말씀입니다. 오병이어를 재현할 왕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참된 선지자, 참된 메시아는 우리를 피하실 겁니다. 생명의 알짬들은 점점 멀어질 겁니다. 오병이어, 즉 경제 문제는 그냥 상식적으로, 세상의 왕권에 따라 대처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나라에, 그의 왕권에 두십시오.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놀라운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