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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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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존재의 용기 그리고 인내
본문/ 약1:1-4
1. 들어가는 이야기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는 하나의 윤리적 실체(reality)로써,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궁극적으로 존재구조(존재+비존재)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다. 존재의 용기는 모든 비존재(두려움-불안-악한 현실-무의미-절망-죽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이 자기 존재(자기의 참된 본성-내적 목표-자기의 생명력)를 高揚(고양)하고 肯定(긍정)하는 강인한 마음의 태도이며 능력이다(존재의 용기, 37쪽)”라고 하였습니다.
즉, 존재의 용기란 때로는 狂風怒濤(광풍노도)로-때로는 雷聲霹靂(뇌성벽력)으로-때로는 안개비처럼 우리 삶의 실존에 침투하는 절대허무-절대절망-절대의심-절대불안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이맛살을 찌푸리고 회색빛 의심으로 갸웃뚱거린다고 할지라도, “아니야! 세상은 아름다운 거야!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Life is worth living!)” 외치며 사는 氣魄(기백)입니다!
그리하여, “자살”이 뒤집어져 “살자”가 되고-“역경(逆境)”이 뒤집어져 “경력(經歷)”이 되고-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Nowhere)”가 뒤집어져 하나님은 “바로 여기 계시다(Now-Here)”로 되고-그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Mission Impossible)"라는 패러다임이 뒤집어져 그 일이야말로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Mission I-M-Possible 아이 엠 파시불)”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막9:23)” 히신 말씀대로 살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존재의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마14:25-30)”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만약 주시거든 나로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몇 발자국 못가서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속에 빠지니 “주여 나를 구하소서” 합니다. 예수님이 즉시 그 손을 잡아 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는 “나도 예수님처럼 물 위로 걷게 하소서-나도 예수님처럼 살게 하소서” 존재의 용기를 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큰 바람을 보고 무서워 그만 물속에 빠집니다. 우리 모두는 때로 존재의 용기를 냅니다. 그러나 모처럼 낸 존재의 용기는 비존재의 위협에 함몰되어 作心三日(작심삼일)로 끝납니다. 우리 사람의 존재의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注目(주목)하였을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洶湧(흉용)한 파도를 注目(주목)한 순간 물속에 빠졌습니다. “처음처럼-처음처럼-처음처럼” 예수님을 주목하고, 큰 파도의 무서움을 참고-견디고-인내하여야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3. 존재의 용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어떻게 忍耐(인내)할 것인가?
첫째.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입니다-삶은 어차피 힘든 것입니다. 삶은 어차피 괴로운 것입니다-삶은 어차피 참고 견디며 忍耐(인내)하며 사는 것입니다. 천지창조 이래 동서고금-빈부귀천-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천하에 그 누구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셨기 때문입니다.
삶은 본질적으로 인내를 요구합니다. 아니, 삶 자체가 곧 忍耐(인내)입니다. 알고 내는 돈과 모르고 내는 돈-알고 당하는 고난과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전혀 다르듯이, 삶이 원래 그런 것인 줄 알고 사는 것과 그런 줄 모르고 사는 것은 天壤之差(천양지차)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거나 잊은 사람들은 삶을 더욱 힘들어 합니다.
아, 옛날이여!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옛날-왕년은 잊어야 합니다. 지금-여기-현재나의 실존에서 참고-견디고-버티고-인내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전7:10)” 하셨습니다.
둘째. 忍耐(인내)라고 다 같은 인내가 아닙니다. 인내에도 품격이 있습니다. 지혜롭고 품위 있는 귀족적 인내가 있고, 미련하고 비참한 노예 같은 인내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7:12)” 하셨습니다.
귀족적 인내: 율리우스 씨저가 지중해 해적들에게 사로잡혔을 때, 해적들이 로마 원로원에 몸값 10억을 요구하자, 씨저는 “내 몸값이 겨우 그거 밖에 안된단 말이냐? 100억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참고: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노예적 인내: 너무 흔한 경우라 생략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의미요법을 創始(창시)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고전적이며 귀족적 품격의 인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The one thing you can't take away from me is the way I choose to respond to what you do to me. The last of one's freedom is to choose one's attitude in any given circumstance. -나치 당신들이 나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당신들이 나에게 가한 행동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선택의 자유이다. 인간의 마지막 자유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忍耐(인내)의 방법론-인내하는 사람은 인내의 시간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두르기 십상이고, 인내의 시간이 오래 걸리면 실망하거나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그래서 인내의 방법이 필요합니다(참고: 말씀의 샘물 제1권 제39호 165쪽).
徐徐無慾速 汲汲無敢惰(서서무욕속 급급무감타: 무슨 일을 할 때 어서 빨리 끝내야지 하는 조급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천천히 다져가면서 일 할 것이요, 또한 일을 하다가 타성에 젖어 감히 게으르지 말고 두레박으로 물 길어내듯 쉬지 말고 부지런히 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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