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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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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7-05-23 설교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창조와 하나님의 경향성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곧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이다. 이 두 세계는 영원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첫째 날에 생긴 것이다. 천상 세계에는 천사들을 두고, 지상 세계는 인간을 두어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위는 천사들의 지위보다 더 고상하다. 왜냐하면 천사는 인간의 종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두 세계 모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다. 삼위는 각각 완전한 인격을 가진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셋 안의 하나,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인격은 셋인데,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할 수 없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해야한다. 영원 전부터 이 하나님은 세 위격이 서로를 향하여 교통하고 계셨다. 이 교통의 본질은 사랑이다. 삼위가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라 서로를 가장 완전하게 보며 사랑으로 교통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다. 생명은 이 사랑으로부터 생겨난다. 인간이 아이를 잉태할 때 사랑과 성(性)으로 잉태하게 하신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모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생명의 원천을 통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피조물을 창조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 이외의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있음” 그 자체로 꽉 찬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명 그 자체를 원천으로 해서 피조물에게 “있음”을 나누어주셨다. 예를 들어 풀에게 “있음”을 나누어 주는데, 풀의 한계 안에서 “있음”을 나누어 주신다. 그래서 풀은 풀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인간도 영과 육을 지녔는데, 인간인 한도 안에서만 “있음”을 분여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만 있는 것의 한계가 없는 무한하신 분이다. 세상은 한계 즉, 테두리를 가졌으나 하나님은 그 테두리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꽃은 꽃이고 풀은 풀이고 인간은 인간이고 세상은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신 흔적을 가지고 있다.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표”를 가졌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표(육체)”와 “하나님의 형상(영혼)”이 둘 다 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충만하시다면, 뭔가가 부족한 것처럼 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인간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 그 자체로는 뭔가 모자라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인간이 예술 행위를 하는 것은 뭔가 모자라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알타미라 벽화같은 것은 인간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상대적 완전성을 표출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육일 동안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할 때, 그분이 홀로 계심이 부족하다기보다 당신 자신이 완전함을 구현하고자 하심이다. 인간의 예술행위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세계와 교통하시고 당신 자신의 영광을 현시하기 위해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지금 현재화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만 영원이시고, 모든 것들은 시간세계 안에서 창조하셨다. 시간 세계 안에 있는 것은 있기는 있으나 완전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시간세계에 생겨나서 점점 사라져서 무로 돌아간다. 그래서 항상 눈에 보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이 갖는 유한성을 생각해야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보여주나, 시간은 이것들을 빼앗아 가버린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안 남는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인가? 자아 안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님을 닮은 선한 본성을 가진 자아와 죄 때문에 부패한 본성을 가진 자아가 있다. 어거스틴은 “내 안에서 사랑을 질서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더 사랑하고 덜 가치 있는 것은 덜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위치를 이탈해 있는 자기라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사랑은 자기의 욕심과 이 땅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목적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무로 돌아가는 것을 사랑하는 허무한 사랑이 되고 만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보자. 하나님은 공간 속에 제한되는 존재도 아니고 시간 속에 매이는 존재도 아니다. 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 된다.
시간 속에 있는 존재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이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할 터인데, 그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 허무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제시되나 시간 속에서 완전함을 상실하며 사라져간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이 빼앗을 수 없는 영혼을 주셨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이 땅에 있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아름다워야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주도성에 있어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무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마지막 창조 시에 말씀하셨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대한 생각 때문에 분탕질 당하고, 이런 육신의 감각이 육욕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해체한다. 시간은 우리를 분산시키고 영원은 이 분산을 한 곳으로 집약시켜서 하나님의 영원에 대한 인상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천상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천상을 묵상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공간 안에 태어나서 시간 속에 사는 존재가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言行心思)는 하나님 안에 모두 알려져 있다.
지상은 천국가기 위한 대합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사 여기에 두시고 그분께서 창조하신 창조 목적 속으로 돌아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는 장소이다. 영혼 안에는 첫째는 목적(目的)인, 곧 영혼이 목적에 이바지할 때 행복해하는 것, 둘째는 완성(完成)인, 곧 모든 인간의 영혼에는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불순물이 있기 때문에 이 불순물을 털어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주님의 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충성, 이 세상 인간들을 향한 사랑도 공간 속에 제시되었으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는 섬김일 때, 이것은 영원을 향해 가서 영원한 하나님의 심비(深秘)에 박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하는 한 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우리는 이슬처럼, 들풀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이기에 낙담하지만, 그러나 시간마저도 앗아갈 수 없는 영원자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고이고이 품고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기에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200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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