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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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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5.12 소풍가는날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행복한 인생을 사는 연습, 소풍
마6:25-26
오랜만에 목회자 모임엘 나갔습니다. 근 1년이나 잘 참석치 않았습니다. 누가 제게 와서 손 인사를 건네면서 이럽니다. “허목사 만큼 재미나게 목회하는 사람도 없어.” 그렇습니다. 여기서 저는 ‘재미’를 ‘행복’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모르면 모를까, 삶이 목숨과 연관 지어 있다면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면 행복할까요? 오늘 우리가 소풍을 나왔으니까 거기 빗대어 생각한다면 하루하루를 ‘소풍’처럼 살면 될 겁니다. 소풍 하듯이 살자는 말입니다. 그럼 소풍처럼 사는 삶 을 일러주는 성경 말씀은 어디가 될까요? 그렇습니다. 다음의 말씀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25절)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또 이런 저런 걱정을 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다보면 중요한 것의 순서가 뒤바뀌죠. 이 한 목숨 잘 살아보자고 걱정을 하는 것인데, 이제 걱정이 심해지다 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병이 걸리기도 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걱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걱정하다”(merimnao) 또는 “걱정”(merimna)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보면, 그것은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위에서 눌러서 질식시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라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가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마 13:22). 즉 염려는 우리 안에서 말씀이 살아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마리아를 일러바쳤을 때 예수는 마르다에게,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0:41). 그래서 예수는,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고 하셨지요?(눅 21:34).
하지만 한 시라도 걱정하지 않으면 세상 일이 제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걱정을 안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26a)
예수는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보아라”(emblepsate)라는 단어는, 하늘을 나는 새를 실제로 “눈여겨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집에서 창문을 열면 작은 미루나무가 보이죠. 거기 까치집이 있는데, 어느 때 가만히 지켜보면 별로 그들은 하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요즘 새벽 4시면 뻐꾸기, 포곡조가 울어요. 그 녀석들은 어디 있다가 꼭 요맘때만 나타나서 울고는 다시 사라져요. 세상에 새처럼 행복하게 생긴 동물이 또 있을까 생각하게 되요. 날씬하고 기분 좋게 생겼지요? 더욱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지저귀는 소리도 예쁘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행복해지죠. 예수는 그것들이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놀고먹는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새들도 생존하고 또 새끼를 기르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벌레를 잡으러 다니는 수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신다고 하셨죠. 왜 그렇게 말씀했을까요?. 어쩌면 언제보아도 명랑해 보이는 새의 기분 좋은 모습 때문에 예수는 새는 걱정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머리가 나쁜 사람을 새에 빗대어 놀리곤 합니다. 그만큼 새는 별 생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예수는 어쩌면 우리가 너무 걱정이 많은 것 그것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를 보라고 하는 것은, 새처럼 단순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머리를 씌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버리고 그저 벌레가 있어서 그걸로 배를 채웠으면 행복하게 하늘을 날고 지저귀는 생각 없는 새처럼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코이케 류노스케라는 스님의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이 있어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번뇌가 생기는 것이므로, 이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버리고 그저 숨쉬기에 열중하고 또는 음식 먹을 때는 그 맛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무심코 듣기보다는 귀 기울여 듣고 무심코 보기보다는 눈여겨보는 방식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번뇌는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고대 명상법이 오늘 예수님이 말한 “새를 보아라”할 때 그 보는 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와 같이 살아 있는 것들을 눈여겨보면서 거기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세상 걱정 없이도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기르시는 손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b)
예수는 새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관심은 그렇게 행복한 새보다도 귀한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문학적 방식으로는 낚시하기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를 할 때쯤 예수는 우리를 낚아채시는 겁니다. 새를 보면, 도구도 없이 그저 나뭇가지 물어다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지만 거기에 알도 낳고 새끼도 기릅니다. 농사도 안하고 창고도 없지만 참 건강하고 예쁩니다. 참 오묘하다 싶어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쯤, 예수는 “너희는 새보다 귀하잖아. 그러니 너희들의 인생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선물로 준비되어 있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 낚이는 순간 세상 근심은 천리만리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풍을 나가보면 내가 보따리에 싸가지고 간 것 보다 더 많은 신비하고 감동적인 것들이 거저 널려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좀 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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