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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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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6.5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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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8:1-8
우리 교회는 춘천교도소와 원창고개 사이에 있습니다. 교도소는 북쪽이고 원창고개는 남쪽입니다. 그러면 우리교회는 어느 쪽일까요? 북쪽인가요? 아니면 남쪽인가요? 이렇게 북쪽이니 남쪽이니, 위니 아래니 하는 말은 절대적 값어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기준을 어디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직도 우리는 강릉 앞바다를 동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거긴 일본의 서해입니다. 어디가 맞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이세상이 옳다 그르다고 할 때, 바르다 바르지 않다고 할 때, 세상이 바로 서 있다면 바로 보는 세상이 바른 세상일 터이고 세상이 거꾸로 서 있다면 거꾸로 보는 세상이 바른 세상일 것입니다. 전체 세상이 바로 서 있는지 거꾸로 서 있는지를 판가름하려면 바름(正)과 거꾸로(倒)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이러한 절대적 기준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신구약성서는 가르치기를 이 세상은 죄악 가운데 있으며 궁극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서의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어떤 기본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내가 세상의 기준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개인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지 않습니까?
‘죄’는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밑바탕에 깊이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은 죄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은 죄의 문제를 구원론과 연계하여 논의합니다. 이 경우에 사죄 즉 죄의 용서가 모든 논의의 목표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신다는 뜻이죠? 그러면 죄의 용서를 강조하는 자리에는 오로지 ‘죄인’의 운명만이 관심의 초점(焦點)이 됩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닙니다. 죄는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행하여집니다. 이러한 종류의 죄가 행해진 자리에는 죄를 범한 죄인과 그 죄의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죠. 죄인은 가해자입니다. 피해자를 시야(視野)에서 완전히 배제한 채 오로지 가해자인 죄인과 그의 죄 용서를 목표로 삼는 것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 고립시키며 결국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전통적인 신학이 전개하는 죄론(罪論)은 이렇게 일방적입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오로지 죄인의 입장에서 보았고, 죄와 부정(不正)의 희생자들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죄인과 관련된 신학 사상을 많이 개발했지만 죄의 희생자는 염두에 두지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죄 문제의 주요한 한 측면을 간과한 것입니다. 교회는 죄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했던 거죠. 신앙의 마당에 세 사람이 있는 겁니다. 가해자, 피해자, 하나님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죄인(가해자)’하고 ‘하나님’만 문제에 참여하여 결론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피해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겁니다. 어찌 보면 정작 제 3자(하나님)의 관심을 받아야 할 대상이 그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서를 볼 때 관점 전환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해자/강자/승리자/억압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피해자/약자/패배자/피억압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위하여 신학의 틀을 바꾸어 왔습니다. 여러분이 성암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교회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무시해 버렸던 죄가 성립된 사건의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서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그와 같은 시각으로 본문을 대하게 됩니다.
눅18:1-8절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명입니다. 과부, 재판관, 과부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죠. 여기서 사건의 당사자는 과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재판관은 사건에 있어서 제 3자입니다.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전형입니다. 재판관은 부당하게 침해를 당한 권리를 되찾아 주는 기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과부가 재판관에게 그녀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은 무엇이 문제가 되어 있는지를 이미 잘 드러냅니다. 이 과부는 그녀의 마음에 맺힌 한(恨)을 치유 받기 위하여 심리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녀의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재판관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과부는 자기의 권리를 침해한 상대자를 ‘안티디코스’즉 ‘원수’라고 했습니다(3절). 개역성서가 여기서 이 낱말을 ‘원수’로 번역한 것은 원어의 뜻을 왜곡시킨 겁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에도 ‘안티디코스’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송사하는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티디코스’는 원수가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검찰청의 검사입니다. 우리가 재판을 받아보진 않았지만, 검사는 죄인을 나쁘게 말해서 더 많은 벌을 주려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때 과부가 재판관에게 호소한 말은 3절입니다. 이 말의 내용이 5~8절에서 되풀이해서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이 비유 이야기가 문제 삼고 있는 핵심 내용과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의 말은 무엇입니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개역>.
“내 (송사) 적수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200주년>.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표준새번역>.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공동번역>.
공정한 재판관이 해야 하는 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해 주는 일입니다. 공정한 재판관은 소송 사건의 정당한 당사자에게는 그의 권리 또는 그의 정당성을 회복해 줄 것이며(눅 18:3) 불의한 당사자에게는 공의로운 벌을 내릴 것입니다(고후10:6). 요한계시록 6:10과 19:2절에는 억울하게 흘린 성도의 피가 나오는데, 이 경우에도 성도들의 억울한 죽음을 무(無)에 묻혀 두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숨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이 공정하신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재판관은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죠? 그러나 약자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재판관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한테 미약한 과부가 억울한 사정이 공정하게 처리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이 과부는 그러한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이 과부는 불리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재판관에게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장 아무런 응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낙망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졸라댔습니다. 재판관은 처음에는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결국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요? 이것은 누구를 겨냥하여 이야기한 것인가요?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적대자들에게 던지는 공격·질책의 비유와,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격려의 비유로 나눈다면, 이 ‘과부와 재판관에 관한 비유’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비유임이 분명하겠죠? 그렇다면 이 비유가 가르치려고 한 것은 무엇이며 또는 격려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 물음의 답은 과부와 재판관 중에서 어느 쪽이 이 비유 이야기의 주주인공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과부가 주주인공이라면 과부의 행동은 제자 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은 다른 누가 아니라 피해자인 [과부]에게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과부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역사의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재판관을 주주인공으로 보는 경우에는 하나님은 끝내는 자기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재판관이라도 이렇게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더욱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일 테죠.
이 비유 이야기에는 도입 부분 하나(1절)와 적용 문 두 개(7,8절)가 붙어 있습니다. 도입문은 예수께서 무슨 취지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편집자가 논평한 말입니다. 적용문은 비유의 의미를 현실에 응용하는 말입니다. 첫 번째 적용문(7절)은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 적용문(8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상실할지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7절을 한 번은 수사학적 의문문으로, 다른 한 번은 평서문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두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첫 번째 적용문이 목표하는 바가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데 있나요? 즉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정보 제공이 그 목표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죠?.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하나의 대전제로 제시되었을 뿐이지 비유 자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적용문 속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숨겨진 의미는 두 번 째 적용문을 통하여 재확인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뜻하죠.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 운행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기의 백성을 오래 모른 체하지 아니하시고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그것은 곧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는 것이죠. 이게 이 비유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분명 도입부에서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즉 이 비유의 취지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도록 제자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요? ‘늘 기도하는 것’과 ‘낙심하지 않는 것’이라는 별개의 두 사항을 단순히 병렬한 것일까요? 아니면 두 개를 내용적으로 하나의 초점에 모으는 것일까요? “장래를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 또는 “이걸 먹고 힘내어라”라는 명령을 헬라어나 영어 문장으로 표현하면 “장래를 생각하여라.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 또는 “이걸 먹어라. 힘내어라”가 됩니다. 이 경우의 접속사는 앞뒤를 등가적으로 병렬하는 것이 아니라 무게 중심을 뒤쪽에 실어 주는 구실을 합니다. 장래를 생각하는 것은 게으름 피우지 않기 위한 하나의 지침이며, 이걸 먹는 것은 힘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데 역점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늘 기도한다’는 것은 낙심하지 않는 자세의 한 구체적 표현이며 낙심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는 사람은 늘 기도합니다. “놀지 말고 공부하여라”라는 문장에서는 ‘공부하여라’에 역점이 놓여 있듯이, 만일 도입문이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여라”라고 표현되었다면 ‘늘 기도하여라’에 역점이 놓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서들이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라”라는 표현을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여라”라는 뜻으로 뒤바꾸어 풀이한 것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를 어지럽고 어긋나게 했던 것입니다. 만일 늘 기도하는 데 역점이 놓였다면 과부의 행위는 늘 기도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입니다.
두 번째 적용문이 이것에 대한 확실한 반증입니다. 두 번째 적용문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볼(또는: 기도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겠느냐?”라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되어 있나요? ‘믿음을 보겠느냐’가 아닙니까? 더욱이 첫 번째 적용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백성이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죠.
그러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적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무력한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가망성은 이 세상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희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일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를 바로 세우시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낙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종말적 희망은 역사의 점진적 발전에 근거한 순진한 낙관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좌절을 거부하는 철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개개인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과 같을 지라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개개인을 그의 사회적 관계에서 유리시킨 채 ‘죄 투시경’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하늘나라로 보내거나 지옥으로 보내는 처사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며 역사를 새롭게 세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과부와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대를 걸고 살지만, 불의한 문제에 저항할 때, 하나님도 그들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제자들이 좀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바로 피해자인 과부들이 처신했던 것처럼, 그렇게 세상의 불의에 대해 저항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믿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가해자의 죄를 용서해주는 일에만 교리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제도 속에 교회가 힘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는 대부분 힘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피해자의 자존을 지켜줘야 합니다. 불의한 상황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정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지존을 경험케 해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서를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대로가 아니라, 거꾸로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눈을 자꾸만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려 그가 원하시는 바를 이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까지를 포함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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