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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데가 많은 사람

빌립보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25 추천 수 0 2012.08.27 23: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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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6-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7.12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허술한데가 많은 사람
빌2:6-7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6-7)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이 말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 즉 모든 면에서 완전한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고 종의 모습을 취하고 인간이 되기 위해 “자기를 비웠다”는 것입니다(7절).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한글 번역은 마치 “자기를 비워서”가 분사구이고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과 같이 되었다”가 주문장인 것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를 비운 것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이 되기 위한 겸손의 행동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성경은 한글 번역과는 정반대로, “모습을 취하고”와 “사람과 같이 되었다”가 분사구로 되어 있고, “자기를 비웠다”가 주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의 모습을 취하는 것과 사람이 되는 것은 부수적 설명일 뿐이며, “자기를 비웠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는 행동은 도덕적 겸손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흔히 정치가들이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말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대개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인데, 대개는 상대방을 궁지로 몰기 위한 말장난일 때가 많지요. 바울이 말하는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마음을 비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실제로 낮춘 것입니다. 이를테면, 노약자가 지하철을 탔는데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고 합시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노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든지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죠? 이 때 자기를 비유는 일이란, 자기를 낮추는 일은 어떤 게 되겠어요? 그렇습니다. 겸손한지 어떤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일어나서 자기 자리를 내준다면 그것은 그 노약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그게 자기를 비우는 것이고, 낮추는 것이죠?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결국은 누군가를 위한 빈 자리 만들기,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올 빈 칸 만들기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 탄생과 죽음이야말로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에게 빈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숨통을 틔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절망과, 질병, 종교적인 굴레로부터 질식할 것 같았는데, 예수는 그런 사람들에게 숨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비어있음이요 결핍입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파 율법학자 사두개인 헤롯왕가와 총독들 대제사장들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다른 누구를 받아들일 틈이 없는 팍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결핍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들 자기 욕심과 경쟁심으로 가득차서 어디에도 빈 곳이나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의지할 데를 찾을 수 없었고 숨 쉴 공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틈이 없는 그들은 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매도하여 사람들이 질식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어딘가 빈 곳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사며 바리새인들이 항상 시비하는 것입니다. 허술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 죄 많은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었고, 의지하고 밥상을 같이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 하셨지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고 말이죠. 이것은 말 그대로 ‘나는 빈 틈이 많다. 허술하다. 빡빡하지 않다’그런 말 아닙니까? 그러면서 몸소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자람이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사랑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몸소 모자람이 되셨습니다. 빈 틈을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퍼즐이라는 거 있죠. 숫자들을 맞추는 것인데 그거 딱 한 곳 빈칸이 있습니다. 새 판을 짜거나, 바른 숫자를 맞추려면 꼭 필요한 게 [빈 칸]입니다. 그 빈 곳이 없으면 숫자 조각들은 움직일 수 없고 놀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질서는 없습니다. 한 칸이 비어 있을 때, 숫자 조각들을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 로마총독과 헤롯 왕권이 이룩한 공고한 지배체제는 마치 빈 칸 없는 숫자판과도 같았습니다. 그 속에서 세상의 주류에 들어오지 못한 작은 사람들은 꼼짝 할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꽉 막힌 숫자판에 빈 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몸소 빈 칸이 되셨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수의 빈 칸을 메우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생긴 빈 칸을 또 다른 사람들이 메우면서 행복한 삶과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빈 칸 속으로 움직이면서 일어난 놀이마당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아닙니까?

이것을 요한복음 기자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복음 14:2). 여기서 아버지 집에 있는 “있을 곳들”은 방들을 의미하며, 뒤에 나오는 “있을 곳”도 어떤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피안적인 천국의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의 주권이 발휘되는 곳, 즉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죠.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의 십자가 의미를 하나님 나라에 신자들을 위한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큰 잔치의 비유(눅 14:15-24)에서도, 초대받은 기득권자들은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지만, 초대 받지 못한 길거리의 사람들과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몸소 결핍이 되고 빈 자리가 됨으로써, 작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서 들러리가 아니라 주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하나님은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원이 없는 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불사적인 것으로,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난을 당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고난, 격정은 지상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죠. 하나님은 고난이나 고통, 감정, 충동, 열정 등에 의해 동요되지 않습니다. 충동 또는 거기서 비롯되는 억압은 그 무엇도 하나님에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어떤 기쁨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합니다. 이와 같은‘고난에 무관심한 하나님’상은 복음서의 고난 받는 그리스도 상과 철저히 모순되죠.

하지만 문제는 후대에 와서 이러한 무감각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배고픔과 목마름, 피로와 매질, 고통, 하나님에게 버림받음 그리고 죽음의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 즉 그가 사랑과 분노를 느꼈다는 사실이 증언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부철학에서는 가능한 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공리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심지어 그리스도가 음식을 실제로 소화시키고 배설한 사실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무관한 하나님이라면 고난의 원인을 인간에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전염병, 전쟁 그리고 다른 곤궁들이 있는 것은 이를 통해 우리 죄를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은 형벌이요 시험이거나 교육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얻으려는 하나님의 시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죄 없는 예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고난은 성도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스런 마음과 끝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죠. 과연 이러한 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의 진정한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빈 칸이자 결핍이 되셨다면, 우리가 겪는 결핍이나 문제점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비워주심이 되고 결핍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조금은 허술하고 비어있는 사람들이 될 때에 은혜가 더욱 넘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묵상할 때, 나 때문에 죄 없이 죽은 예수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죄책감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믿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숨 막히는 숫자판에 빈 칸을 만들어 놀이판을 만드신 예수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빈 칸들이 되고 빈 자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허수룩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마련한 잔치 자리에 내가 주빈이 되고 그 놀이마당에 흥겹게 참여할 기회를 얻었듯이, 내 삶에도 누군가가 만만히 들어와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를 생각하면서 대중가요 한 곡을 듣겠습니다. 장재남이라는 가수가 부른 ‘나는 빈 의자’라는 노래입니다. 아는 분들은 따라 하셔도 좋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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