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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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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7.22 |
팔복강해(1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세 종류의 의인
일반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의인(義人), 위인(偉人), 성자(聖者) 셋으로 분류한다.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평생 콩나물 장수로 모은 전재산 10억을 장학금으로 희사한 할머니는 의인이다. 전화기 등을 발명한 에디슨과 노예 해방을 시킨 링컨 대통령 같은 자는 위인이다. 평생을 인류의 복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자다. 마지막으로 성자는 평생을 두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나 생명마저 희생하여 오직 남을 위해 섬기며 사랑하는 삶으로 일관한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간디 같은 사람이다.
신자 또한 이 땅에서 신앙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이 세가지 중의 하나의 모습이 되어 있길 소원한다. 특별히 예수 믿는 신자가 본 받아야 할 가장 완벽한 표본으로 테레사 수녀를 꼽는데 주저함이 전혀 없다. 비록 신자가 이뤄낸 일이나 도달한 수준이 질적, 양적으로 그보다 훨씬 못 미칠지라도 일단 목표는 그렇게 잡는다. 그래서 평소 자신의 모습이 불신자인 콩나물 장수 할머니보다도 못할 수 있는가 하고 괴로워한다.
예수님도 본문에서 신자는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했기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가 아니다. 신자더러 그렇게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정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할 의의 본질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 생활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지점이 의인, 위인, 성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친 그 의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비중을 가진 계명으로 꼽으셨다.(마22:37-40) 그 말은 신앙 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사랑이 현실적으로 실천되는 모습은 불쌍하고 연약한 이웃을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의가 결과적으로는 이웃 사랑과 같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인가? 또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실천해야 할 포 커스를 어디에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다윗의 부하들
이 문제를 추적하기 위해 성경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다윗이 길에서 며칠을 물도 못 마시고 굶은 한 애굽 소년을 만나 도와주는 이야기가 사무엘상 30:11-15에 나온다. 그런데 전후 사정을 잘 살펴 보면 다윗이 단순하게 의를 실천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했다는 기록이 아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다가 이스라엘 땅에선 더 이상 숨을 데가 없어 적국인 블레셋에 도피했다. 그것도 단신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삼상22:2)들과 가족 등 수백 명이 함께 가드 왕 아기스에 투항했었다. 아기스로선 유다 사정에 능통한 다윗을 부하로 부려먹게 되었으니 손해 볼 것 하나 없어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하나 주어 거주케 했다.
당연히 다윗으로선 블레셋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따르며 모든 면에서 잘 보여야 했다. 그래서 동족이 사는 유다 남쪽을 노략질 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유다를 괴롭히는 남방의 이방 민족인 아말렉을 쳐서 그 노획물을 유다의 것인 양 블레셋에게 갖다 바치곤 했다. 로빈훗 같이 일종의 의적활동을 하면서 적국에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다윗으로선 블레셋의 녹을 먹는 신하 입장이라 자기 동족을 치는 전쟁이지만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거주하던 자기 부하 600명을 이끌고 가드 왕의 진지에 갔더니 블레셋의 다른 왕들이 혹시 다윗 일당이 전쟁 중에 변심하여 이스라엘을 편을 들면 큰일이라는 반대에 부딪혔다. 그 바람에 다윗으로선 다행스럽게 동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시글락으로 돌아와보니 그 동안 그에게 많이 당했던 아말렉이 그가 없는 틈에 쳐들어와 처자식들을 몽땅 포로로 잡아가고 성읍을 완전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집과 가족을 일순간에 다 잃어버린 비참한 상황을 보고 흥분한 부하들이 들고 일어나 다윗을 돌로 쳐죽이려 했다.(삼상30:6) 다윗으로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경우에 빠졌다. 올 데 갈 데 없는 자들을 거두어 먹여 살려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드는 셈이었다.
부하들의 뜻은 아주 단순했을 것이다. “우리가 시글락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너만 믿고 따라 나섰더니 이 꼴이 무엇인가? 아무리 우리가 유다 땅에서 돈 없고 권세 없이 억울하게 당하고 손해 보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같은 핏줄이요 우리 조국이지 않느냐? 처음부터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데 네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바람에 이 일이 생겼지 않느냐?”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전쟁에 동참하는 일을 두고 아마 공개적인 반대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블레셋 사람도 아닌 채 매일매일을 살얼음 위를 걷듯이 고생하는 것도 순전히 처자식 때문인데 이제 몽땅 잡혀가고 없으니 더 이상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차라리 우리가 죽느니만 못하지 않는가? 이 모든 일이 네 때문에 일어났으니 너라도 대신 죽어야 이 원한과 억울함과 상처가 반이라도 씻겨지지 않겠나?”
물론 그들의 분노와 억울한 사정을 이해해 줄 여지는 있다. 그러나 다윗도 처자식이 잡혀가긴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혈혈단신으로 사면초가에 빠졌고 복수의 희생 제물이 되어 생명이 날아갈 판이었다. 성경은 그 사정을 “크게 군급하였으니”(삼상30:6)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사태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실망하고 좌절했는가? “너희가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다 같이 살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지 않느냐? 블레셋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아말렉보다 그들이 먼저 쳐들어와 우리는 다 죽었을 것이다. 아말렉이 쳐 들어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 않느냐? 나로선 최선을 다했다. 나도 처자식 잃고 원통하긴 마찬가지다”라며 같이 분노를 터뜨리며 맞대꾸했는가? 아니다. 그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입고 용기를 얻었다”(6절)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며, 한량 없이 관대한 마음으로 부하들을 끝까지 용서하며 포용했고, 자기 전부를 희생해서라도 벌어진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졌다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또 그래서 다윗의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한 것이라고 믿고 신자가 그대로 본 받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마음 먹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공의(公儀)라는 속성에 견주어 영어로 따지면 Justice(正義)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선하고 곧으며 공평하고 의롭고 착하고 거룩한 일을 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이해가 믿음의 바탕에 깔려 있으니까 지금 다윗의 경우에도 그가 부하 탓을 전혀 하지 않고 용서하는 선한 모습만을 바라 보게 되고 또 바로 그것이 자신이 신앙 생활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솔직히 신자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본 결과는 어찌 되는가? 교회 생활 수 십년이 지나도 항상 “나는 왜 불신자인 콩나물 장수 할머니보다 못한가”라는 죄책감 밖에 남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만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오히려 세상 사람 앞에서 예수 믿는 것조차 떳떳하지 않고 자랑이 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영어로 치면 Righteousness다. 흔히 생각하듯이 선한가 악한가의 개념(good or bad)이 아니라, 맞느냐 틀리냐(right or wrong)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접근해 생각해 보면 이 구분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와 신자 개인에게 간섭하여 일하시는 모습을 두고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로는 절대 따질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 과정이 전부 다 인간의 판단에 의롭고 위대하고 성스러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의를 정의로 해석한다면 역으로 따져 의롭지 않고, 위대하지도 않으며, 성스럽지도 않은 일들은 절대 하나님의 의가 아니며 나아가 당연히 하나님이 하신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다윗이 처한 곤경을 보라. 처자들은 대적들에게 잡혀갔고 부하들은 집단으로 자기들의 지도자였던 자를 돌로 쳐 죽이려 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선한 측면은 없고 오히려 악한 모습 뿐이다. 그럼 그렇게 된 일이 하나님은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오직 사탄이 꾸며낸 일인가? 그렇지 않다. 블레셋의 다른 왕들이 다윗의 전쟁 참여를 허용했더라면 그들로선 더 어렵고도 악한 처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자기 동족을 살해했어야 했고, 어쩌면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었고, 또 설령 전쟁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 온다고 해도 어차피 그 동안에 아말렉이 쳐들어와 시글락은 노략 당했을 것이다. 반면에 처자를 되 찾으러 갈 시간적 군사적 여력이 아예 없어졌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감히 인간이 의롭다, 불의하다 구분 지을 수는 없다. 선하다 악하다 평가할 수도 없다. 심지어 그분이 하신 일을 큰 일과 작은 일로 나눌 수도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전부가 위대한 큰 일이며, 거룩하고 성스럽고 선하며 의롭기만 하다. 그분의 역사를 거룩과 비천으로 구분 지으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웃기는 짓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다. 하나님 당신이 위대하고 의로우며 거룩하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도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다. 마치 흰색 분필로 흑판에 글을 적으면 흰색 말고는 다른 색이 전혀 나올 수 없듯이…
인간의 눈에는 아무리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거나, 아주 시시껄렁해 보이는 하찮은 일이거나, 심지어 억울하고 짜증나며 의심과 불만과 불신만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완전히 실패해 더 이상 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신자에게 간섭하는 일은 언제든지 옳고 맞으며 모든 것이 다 선하다.
요컨대 하나님의 하신 일이 선해서(good) 그 분이 의로운 것(right)이 아니라, 그분이 의롭기 때문에(right)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한(good)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는 전자가 맞다고 생각하고 믿음 생활의 방향도 그렇게 끌고 간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 줄 때만 그 분이 선해 보인다. 그분이 절대로 의롭기 때문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하다고는 어지간히 믿음 생활을 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범사에 이런 선후 관계를 분명하게 구별해 내어 그것에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성경은 분명히 신자에게 하나님이 역사하는 모든 일이 선하게 결론지어진다고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해서 신자도 그 사실을 잘 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런 확신이 없다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신자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부분에 인식이 없든가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의 의가 궁극적으로 완성된 모습이 어디에 나타났는가? 골고다 언덕 위 주님의 십자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뜻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내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너를 위해 죽었다. 네 모든 죄악뿐 아니라 원통하고 억울하고 상처 받고 눌리고 묶인 것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네 대신 죽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 모든 것에서 너를 풀어 주었고 또 새생명을 주었으며 이제부터는 더 풍성하게 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하나님은 신자를 다룰 때에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의 원칙만 적용한다. 그래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 좀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은 때려 죽여도 신자의 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무조건 옳다, 절대 그른 법이 없다(right, not wrong)고 믿는 것이 신자가 붙들어야 할 그분의 의의 전부다.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의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우선적인 모습도 테레사 수녀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 그런 사랑을 베풀기 훨씬 이전에 참된 믿음의 적용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든 다윗처럼 크게 군급해도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의심치 않고 그분이 이루시는 어떤 일이라도 다 선하며 옳다고 확신하기에 어떤 환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이다. 처자식은 잡혀갔고 성읍도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은 반드시 보석처럼 빛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해 여호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간절히 물었다.
다윗은 굶주린 애굽 소년이 단순히 불쌍해서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떠한가?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들이 교통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타고 당장 뛰어가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택시 정거장 곁에 있던 거지 소년이 “돈 한푼 줍쇼”하고 손을 내민 셈이지 않는가?
그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내 아이가 다 죽어가는 판에 너한테 줄 돈이 어디 있어!”하고 매정하게 거들떠도 보지 않든지, 귀찮고 시간 잡아 먹는 것이 아까워서 급하게 한두 푼 던져 주고 택시를 타지 않겠는가? 평소에 이웃을 돌보는 일에 헌신 된 자라도 거지 소년의 형편이 딱하고 불쌍하긴 하지만 자신의 사정이 너무 급하므로 직장 동료들에게 좀 돌봐주라고 맡기고 갈 것이다.
다윗으로선 일분 일초가 아까운 긴급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지체해도 자기 부인들이 대적에게 겁탈을 당하거나 자녀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갈 형편이었다. 오죽 위급하면 아말렉 족속을 너무 빨리 쫓다 보니 9.10절에 처음에 600명이 나섰다가 도저히 피곤하여 더 이상 행군을 못할 자 200명을 도중에 남겨 두고 400명만으로도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상황이다. 그래서 그 소년을 돌봐주기 위해 두세 명 정도 더 남겨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영민하여 아말렉 족속의 정보를 캐려고 그를 돌 본 것도 아니었다. 성경은 분명히 애굽 소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말렉 족속이 아니므로 이번 시글락 침략에 직접 연관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윗이 항상 이웃을 돌보는 선을 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에 그를 도운 것도 아니요, 아말렉의 정보를 캐려고 그를 문초한 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참된 의, 이웃 사랑이 아닌 그분의 인도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처럼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간섭하신 결과라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비록 크게 군급한 일 가운데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운 뜻이 넘쳐 나고 결국에는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조건 자기 편이신 하나님 앞에 두 말 않고 무조건 무릎을 꿇고 겸비하게 당신의 뜻을 물었다. 범사에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만 바라보고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찾아 나섰다. 어떤 사소한 일도 무심결에 흘려 보내지 않았다.
다윗은 분명히 출발 전에 “아말렉을 추격할까요 말까요?”라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그 확답을 받고 움직였다. 이제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이 애굽 소년을 만난 일에 비록 아말렉 족속은 아니지만 분명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며 그 기도의 응답으로 확신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심문하였다.
그 결과 소년은 아말렉 족속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다윗의 군대를 즉시 인도했었다. 또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大小)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 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삼상30:19,20)고 기록하고 있다. 부하들도 자기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였다면 탈취는커녕 처자식도 못 찾을 뻔했음을 알고 그 공을 모두 다윗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 일은 다윗이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다. 다윗이 한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의, 즉 자기를 향한 선하고 의로우신 인도와 보호만을 굶주리다시피 목마르게 구했던 것뿐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다윗 일행이 잃었던 하나도 빠지지 않고 되찾게 했고 더 많은 것들을 얻게 하셨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대로 배부르게 채워주셨다.
하나님께 목숨을 걸어라
다윗의 일생 동안 그의 삶과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 아니 전부를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증이다.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한 것,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 온 원수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 준 것, 불쌍한 피난민 600명을 돌봐 준 것,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블레셋의 침공을 물리친 것 등 그가 이룬 모든 의로운 일들이 단지 사람을 섬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자 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는 당신의 의라는 확신을 갖고 겸비하게 순종했을 뿐이다.
그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자기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간절히 추구했었다.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직접 보고 듣고 만졌고 그래서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인격적, 체험적으로 맛 보아 알았다. 자기가 겪는 모든 일, 모든 여건, 모든 만남, 모든 사람,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분에게 자기의 전 일생을 걸었고 그분의 마음에 맞도록 온전하게 반응했다.
신자가 가장 먼저 본 받아야 할 사람으로 테레사 수녀를 꼽아선 안 된다. 일생을 두고 수도 없이 어려운 환난과 억울한 경우를 겪었지만 하나님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다윗을 본 받아야 한다. 신자란 무슨 뜻인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믿는다는 뜻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의로운 일을 베푸시니까 하나님을 의롭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의로우니까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일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것이 신자다.
따라서 신자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근본 목적과 이유도 그 의로우심을 맛본 신자가 아직 맛을 못 본 이웃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게 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풀어 주신 그 엄청난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는 것이다. 신자에게 부쳐 준 모든 이웃들 속에도 하나님이 당신을 닮게 만든 형상이 아직 남아 있음을 발견하여 그 형상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줄로 그어준 구역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 몇몇이 끼리끼리 모여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전하라고 부쳐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아끼시고 돌보시는 사랑에 신자는 단지 동참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에 자연적으로 신자는 반응하고 쓰임 받는 것이지, 신자가 자의적으로 내 이웃을 사랑해야지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도덕적, 종교적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 결과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일생을 두고 믿음으로 이뤄내야 할 목표로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큰 일을 소망하고 실현하는 것인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자기 삶의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간섭해 달라고 굶주려야 한다. 특별히 자기 속에 더 후미지고 슬프고 힘들고 상처 받고 부끄럽고 더럽고 추한 곳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미치도록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찾고 또 찾아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정말 생명을 걸고 찾아야 한다. 주의 자비가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자백이 순간순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우리더러 의인, 위인,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아느냐? 네가 나의 선함과 의로움을 맛보기를 소원하느냐? 내 은혜의 강물에 너의 존재, 삶, 일생 전부를 내어 던지겠느냐? 네 눈에, 네 생각에 비록 크게 군급하여 탈출구가 없어 보일지라도 그 속에도 나의 의가 더 크고도 신비하게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느냐? 그래서 용기를 잃지 않고 언제든 겸비하게 무릎 꿇고 네 생명을 나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느냐?” 이것 외에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나 신자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나서는 신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고 했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 사령관은 “무슨 기도를 하든지 목숨을 걸고 기도해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보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생명을 바꾸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영웅들은 의인, 위인, 성자라기보다는 전 평생을 걸고 하나님의 의를 찾고 또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정말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 맞다, 선하다고 믿었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에 자기 목숨을 걸고 반응한 자들이었다. 때려 죽여도 하나님은 내편이다라는 믿음에서 흔들림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능력만 찾아서 자기의 세상적, 인간적, 도덕적, 종교적 의를 채우려는 자들은 아무리 해도 배고파진다. 수도 없이 울부짖으며 기도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숨과 바꾸더라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에게 미치고 그 의가 자기를 통해 세상에 증거 되기만을 진정으로 소원하는 자는 배가 부르도록 채워주신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 아닌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의”로 자기를 채워달라는 데 하나님이 거부하실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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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세 종류의 의인
일반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의인(義人), 위인(偉人), 성자(聖者) 셋으로 분류한다.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평생 콩나물 장수로 모은 전재산 10억을 장학금으로 희사한 할머니는 의인이다. 전화기 등을 발명한 에디슨과 노예 해방을 시킨 링컨 대통령 같은 자는 위인이다. 평생을 인류의 복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자다. 마지막으로 성자는 평생을 두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나 생명마저 희생하여 오직 남을 위해 섬기며 사랑하는 삶으로 일관한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간디 같은 사람이다.
신자 또한 이 땅에서 신앙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이 세가지 중의 하나의 모습이 되어 있길 소원한다. 특별히 예수 믿는 신자가 본 받아야 할 가장 완벽한 표본으로 테레사 수녀를 꼽는데 주저함이 전혀 없다. 비록 신자가 이뤄낸 일이나 도달한 수준이 질적, 양적으로 그보다 훨씬 못 미칠지라도 일단 목표는 그렇게 잡는다. 그래서 평소 자신의 모습이 불신자인 콩나물 장수 할머니보다도 못할 수 있는가 하고 괴로워한다.
예수님도 본문에서 신자는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했기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가 아니다. 신자더러 그렇게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정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할 의의 본질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 생활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지점이 의인, 위인, 성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친 그 의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비중을 가진 계명으로 꼽으셨다.(마22:37-40) 그 말은 신앙 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사랑이 현실적으로 실천되는 모습은 불쌍하고 연약한 이웃을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의가 결과적으로는 이웃 사랑과 같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인가? 또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실천해야 할 포 커스를 어디에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다윗의 부하들
이 문제를 추적하기 위해 성경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다윗이 길에서 며칠을 물도 못 마시고 굶은 한 애굽 소년을 만나 도와주는 이야기가 사무엘상 30:11-15에 나온다. 그런데 전후 사정을 잘 살펴 보면 다윗이 단순하게 의를 실천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했다는 기록이 아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다가 이스라엘 땅에선 더 이상 숨을 데가 없어 적국인 블레셋에 도피했다. 그것도 단신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삼상22:2)들과 가족 등 수백 명이 함께 가드 왕 아기스에 투항했었다. 아기스로선 유다 사정에 능통한 다윗을 부하로 부려먹게 되었으니 손해 볼 것 하나 없어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하나 주어 거주케 했다.
당연히 다윗으로선 블레셋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따르며 모든 면에서 잘 보여야 했다. 그래서 동족이 사는 유다 남쪽을 노략질 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유다를 괴롭히는 남방의 이방 민족인 아말렉을 쳐서 그 노획물을 유다의 것인 양 블레셋에게 갖다 바치곤 했다. 로빈훗 같이 일종의 의적활동을 하면서 적국에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다윗으로선 블레셋의 녹을 먹는 신하 입장이라 자기 동족을 치는 전쟁이지만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거주하던 자기 부하 600명을 이끌고 가드 왕의 진지에 갔더니 블레셋의 다른 왕들이 혹시 다윗 일당이 전쟁 중에 변심하여 이스라엘을 편을 들면 큰일이라는 반대에 부딪혔다. 그 바람에 다윗으로선 다행스럽게 동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시글락으로 돌아와보니 그 동안 그에게 많이 당했던 아말렉이 그가 없는 틈에 쳐들어와 처자식들을 몽땅 포로로 잡아가고 성읍을 완전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집과 가족을 일순간에 다 잃어버린 비참한 상황을 보고 흥분한 부하들이 들고 일어나 다윗을 돌로 쳐죽이려 했다.(삼상30:6) 다윗으로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경우에 빠졌다. 올 데 갈 데 없는 자들을 거두어 먹여 살려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드는 셈이었다.
부하들의 뜻은 아주 단순했을 것이다. “우리가 시글락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너만 믿고 따라 나섰더니 이 꼴이 무엇인가? 아무리 우리가 유다 땅에서 돈 없고 권세 없이 억울하게 당하고 손해 보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같은 핏줄이요 우리 조국이지 않느냐? 처음부터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데 네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바람에 이 일이 생겼지 않느냐?”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전쟁에 동참하는 일을 두고 아마 공개적인 반대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블레셋 사람도 아닌 채 매일매일을 살얼음 위를 걷듯이 고생하는 것도 순전히 처자식 때문인데 이제 몽땅 잡혀가고 없으니 더 이상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차라리 우리가 죽느니만 못하지 않는가? 이 모든 일이 네 때문에 일어났으니 너라도 대신 죽어야 이 원한과 억울함과 상처가 반이라도 씻겨지지 않겠나?”
물론 그들의 분노와 억울한 사정을 이해해 줄 여지는 있다. 그러나 다윗도 처자식이 잡혀가긴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혈혈단신으로 사면초가에 빠졌고 복수의 희생 제물이 되어 생명이 날아갈 판이었다. 성경은 그 사정을 “크게 군급하였으니”(삼상30:6)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사태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실망하고 좌절했는가? “너희가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다 같이 살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지 않느냐? 블레셋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아말렉보다 그들이 먼저 쳐들어와 우리는 다 죽었을 것이다. 아말렉이 쳐 들어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 않느냐? 나로선 최선을 다했다. 나도 처자식 잃고 원통하긴 마찬가지다”라며 같이 분노를 터뜨리며 맞대꾸했는가? 아니다. 그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입고 용기를 얻었다”(6절)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며, 한량 없이 관대한 마음으로 부하들을 끝까지 용서하며 포용했고, 자기 전부를 희생해서라도 벌어진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졌다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또 그래서 다윗의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한 것이라고 믿고 신자가 그대로 본 받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마음 먹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공의(公儀)라는 속성에 견주어 영어로 따지면 Justice(正義)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선하고 곧으며 공평하고 의롭고 착하고 거룩한 일을 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이해가 믿음의 바탕에 깔려 있으니까 지금 다윗의 경우에도 그가 부하 탓을 전혀 하지 않고 용서하는 선한 모습만을 바라 보게 되고 또 바로 그것이 자신이 신앙 생활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솔직히 신자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본 결과는 어찌 되는가? 교회 생활 수 십년이 지나도 항상 “나는 왜 불신자인 콩나물 장수 할머니보다 못한가”라는 죄책감 밖에 남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만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오히려 세상 사람 앞에서 예수 믿는 것조차 떳떳하지 않고 자랑이 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영어로 치면 Righteousness다. 흔히 생각하듯이 선한가 악한가의 개념(good or bad)이 아니라, 맞느냐 틀리냐(right or wrong)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접근해 생각해 보면 이 구분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와 신자 개인에게 간섭하여 일하시는 모습을 두고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로는 절대 따질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 과정이 전부 다 인간의 판단에 의롭고 위대하고 성스러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의를 정의로 해석한다면 역으로 따져 의롭지 않고, 위대하지도 않으며, 성스럽지도 않은 일들은 절대 하나님의 의가 아니며 나아가 당연히 하나님이 하신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다윗이 처한 곤경을 보라. 처자들은 대적들에게 잡혀갔고 부하들은 집단으로 자기들의 지도자였던 자를 돌로 쳐 죽이려 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선한 측면은 없고 오히려 악한 모습 뿐이다. 그럼 그렇게 된 일이 하나님은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오직 사탄이 꾸며낸 일인가? 그렇지 않다. 블레셋의 다른 왕들이 다윗의 전쟁 참여를 허용했더라면 그들로선 더 어렵고도 악한 처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자기 동족을 살해했어야 했고, 어쩌면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었고, 또 설령 전쟁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 온다고 해도 어차피 그 동안에 아말렉이 쳐들어와 시글락은 노략 당했을 것이다. 반면에 처자를 되 찾으러 갈 시간적 군사적 여력이 아예 없어졌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감히 인간이 의롭다, 불의하다 구분 지을 수는 없다. 선하다 악하다 평가할 수도 없다. 심지어 그분이 하신 일을 큰 일과 작은 일로 나눌 수도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전부가 위대한 큰 일이며, 거룩하고 성스럽고 선하며 의롭기만 하다. 그분의 역사를 거룩과 비천으로 구분 지으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웃기는 짓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다. 하나님 당신이 위대하고 의로우며 거룩하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도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다. 마치 흰색 분필로 흑판에 글을 적으면 흰색 말고는 다른 색이 전혀 나올 수 없듯이…
인간의 눈에는 아무리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거나, 아주 시시껄렁해 보이는 하찮은 일이거나, 심지어 억울하고 짜증나며 의심과 불만과 불신만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완전히 실패해 더 이상 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신자에게 간섭하는 일은 언제든지 옳고 맞으며 모든 것이 다 선하다.
요컨대 하나님의 하신 일이 선해서(good) 그 분이 의로운 것(right)이 아니라, 그분이 의롭기 때문에(right)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한(good)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는 전자가 맞다고 생각하고 믿음 생활의 방향도 그렇게 끌고 간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 줄 때만 그 분이 선해 보인다. 그분이 절대로 의롭기 때문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선하다고는 어지간히 믿음 생활을 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범사에 이런 선후 관계를 분명하게 구별해 내어 그것에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성경은 분명히 신자에게 하나님이 역사하는 모든 일이 선하게 결론지어진다고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해서 신자도 그 사실을 잘 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런 확신이 없다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신자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부분에 인식이 없든가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의 의가 궁극적으로 완성된 모습이 어디에 나타났는가? 골고다 언덕 위 주님의 십자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뜻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내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너를 위해 죽었다. 네 모든 죄악뿐 아니라 원통하고 억울하고 상처 받고 눌리고 묶인 것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네 대신 죽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 모든 것에서 너를 풀어 주었고 또 새생명을 주었으며 이제부터는 더 풍성하게 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하나님은 신자를 다룰 때에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의 원칙만 적용한다. 그래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 좀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은 때려 죽여도 신자의 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무조건 옳다, 절대 그른 법이 없다(right, not wrong)고 믿는 것이 신자가 붙들어야 할 그분의 의의 전부다.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의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우선적인 모습도 테레사 수녀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 그런 사랑을 베풀기 훨씬 이전에 참된 믿음의 적용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든 다윗처럼 크게 군급해도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의심치 않고 그분이 이루시는 어떤 일이라도 다 선하며 옳다고 확신하기에 어떤 환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이다. 처자식은 잡혀갔고 성읍도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은 반드시 보석처럼 빛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해 여호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간절히 물었다.
다윗은 굶주린 애굽 소년이 단순히 불쌍해서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떠한가?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들이 교통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타고 당장 뛰어가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택시 정거장 곁에 있던 거지 소년이 “돈 한푼 줍쇼”하고 손을 내민 셈이지 않는가?
그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내 아이가 다 죽어가는 판에 너한테 줄 돈이 어디 있어!”하고 매정하게 거들떠도 보지 않든지, 귀찮고 시간 잡아 먹는 것이 아까워서 급하게 한두 푼 던져 주고 택시를 타지 않겠는가? 평소에 이웃을 돌보는 일에 헌신 된 자라도 거지 소년의 형편이 딱하고 불쌍하긴 하지만 자신의 사정이 너무 급하므로 직장 동료들에게 좀 돌봐주라고 맡기고 갈 것이다.
다윗으로선 일분 일초가 아까운 긴급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지체해도 자기 부인들이 대적에게 겁탈을 당하거나 자녀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갈 형편이었다. 오죽 위급하면 아말렉 족속을 너무 빨리 쫓다 보니 9.10절에 처음에 600명이 나섰다가 도저히 피곤하여 더 이상 행군을 못할 자 200명을 도중에 남겨 두고 400명만으로도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상황이다. 그래서 그 소년을 돌봐주기 위해 두세 명 정도 더 남겨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영민하여 아말렉 족속의 정보를 캐려고 그를 돌 본 것도 아니었다. 성경은 분명히 애굽 소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말렉 족속이 아니므로 이번 시글락 침략에 직접 연관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윗이 항상 이웃을 돌보는 선을 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에 그를 도운 것도 아니요, 아말렉의 정보를 캐려고 그를 문초한 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참된 의, 이웃 사랑이 아닌 그분의 인도만을 추구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처럼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간섭하신 결과라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비록 크게 군급한 일 가운데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운 뜻이 넘쳐 나고 결국에는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조건 자기 편이신 하나님 앞에 두 말 않고 무조건 무릎을 꿇고 겸비하게 당신의 뜻을 물었다. 범사에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만 바라보고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찾아 나섰다. 어떤 사소한 일도 무심결에 흘려 보내지 않았다.
다윗은 분명히 출발 전에 “아말렉을 추격할까요 말까요?”라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그 확답을 받고 움직였다. 이제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이 애굽 소년을 만난 일에 비록 아말렉 족속은 아니지만 분명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며 그 기도의 응답으로 확신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심문하였다.
그 결과 소년은 아말렉 족속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다윗의 군대를 즉시 인도했었다. 또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大小)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 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삼상30:19,20)고 기록하고 있다. 부하들도 자기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였다면 탈취는커녕 처자식도 못 찾을 뻔했음을 알고 그 공을 모두 다윗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 일은 다윗이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다. 다윗이 한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의, 즉 자기를 향한 선하고 의로우신 인도와 보호만을 굶주리다시피 목마르게 구했던 것뿐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다윗 일행이 잃었던 하나도 빠지지 않고 되찾게 했고 더 많은 것들을 얻게 하셨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대로 배부르게 채워주셨다.
하나님께 목숨을 걸어라
다윗의 일생 동안 그의 삶과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 아니 전부를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증이다.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한 것,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 온 원수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 준 것, 불쌍한 피난민 600명을 돌봐 준 것,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블레셋의 침공을 물리친 것 등 그가 이룬 모든 의로운 일들이 단지 사람을 섬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자 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는 당신의 의라는 확신을 갖고 겸비하게 순종했을 뿐이다.
그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자기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로 향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간절히 추구했었다.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직접 보고 듣고 만졌고 그래서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인격적, 체험적으로 맛 보아 알았다. 자기가 겪는 모든 일, 모든 여건, 모든 만남, 모든 사람,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분에게 자기의 전 일생을 걸었고 그분의 마음에 맞도록 온전하게 반응했다.
신자가 가장 먼저 본 받아야 할 사람으로 테레사 수녀를 꼽아선 안 된다. 일생을 두고 수도 없이 어려운 환난과 억울한 경우를 겪었지만 하나님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다윗을 본 받아야 한다. 신자란 무슨 뜻인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믿는다는 뜻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의로운 일을 베푸시니까 하나님을 의롭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의로우니까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일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것이 신자다.
따라서 신자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근본 목적과 이유도 그 의로우심을 맛본 신자가 아직 맛을 못 본 이웃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게 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풀어 주신 그 엄청난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는 것이다. 신자에게 부쳐 준 모든 이웃들 속에도 하나님이 당신을 닮게 만든 형상이 아직 남아 있음을 발견하여 그 형상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줄로 그어준 구역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 몇몇이 끼리끼리 모여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전하라고 부쳐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아끼시고 돌보시는 사랑에 신자는 단지 동참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에 자연적으로 신자는 반응하고 쓰임 받는 것이지, 신자가 자의적으로 내 이웃을 사랑해야지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도덕적, 종교적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 결과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일생을 두고 믿음으로 이뤄내야 할 목표로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큰 일을 소망하고 실현하는 것인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자기 삶의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간섭해 달라고 굶주려야 한다. 특별히 자기 속에 더 후미지고 슬프고 힘들고 상처 받고 부끄럽고 더럽고 추한 곳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미치도록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찾고 또 찾아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정말 생명을 걸고 찾아야 한다. 주의 자비가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자백이 순간순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우리더러 의인, 위인,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아느냐? 네가 나의 선함과 의로움을 맛보기를 소원하느냐? 내 은혜의 강물에 너의 존재, 삶, 일생 전부를 내어 던지겠느냐? 네 눈에, 네 생각에 비록 크게 군급하여 탈출구가 없어 보일지라도 그 속에도 나의 의가 더 크고도 신비하게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느냐? 그래서 용기를 잃지 않고 언제든 겸비하게 무릎 꿇고 네 생명을 나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느냐?” 이것 외에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나 신자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나서는 신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고 했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 사령관은 “무슨 기도를 하든지 목숨을 걸고 기도해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보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생명을 바꾸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영웅들은 의인, 위인, 성자라기보다는 전 평생을 걸고 하나님의 의를 찾고 또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정말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 맞다, 선하다고 믿었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에 자기 목숨을 걸고 반응한 자들이었다. 때려 죽여도 하나님은 내편이다라는 믿음에서 흔들림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능력만 찾아서 자기의 세상적, 인간적, 도덕적, 종교적 의를 채우려는 자들은 아무리 해도 배고파진다. 수도 없이 울부짖으며 기도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숨과 바꾸더라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에게 미치고 그 의가 자기를 통해 세상에 증거 되기만을 진정으로 소원하는 자는 배가 부르도록 채워주신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 아닌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의”로 자기를 채워달라는 데 하나님이 거부하실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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