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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압살롬

사무엘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176 추천 수 0 2012.09.06 23: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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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삼하18:24-3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8월12일 http://dabia.net/xe/605170 

jys.jpg 정용섭 목사

 

다윗과 압살롬

삼하 18:24-33, 성령강림절후 제11주,

 

다윗의 아들이 몇 명이었는지 아십니까? 구약성경에 간단하게라도 언급된 인물은 십 수 명이나 됩니다. 그 외에도 더 있을지 모릅니다. 고대 왕들은 여러 부인을 두고 후손을 보았기 때문에 자녀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들은 네 명입니다. 나이순으로 말씀드리면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솔로몬입니다. 이들은 다 배다른 형제들입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물론 솔로몬입니다. 그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순리대로 한다면 암논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암논이 아니면 압살롬입니다. 다음 차례는 아도니야입니다. 솔로몬의 왕위 계승은 그의 형들에게 유고가 일어날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낮은 가능성이 실제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았을 겁니다. 성경은 그 모든 걸 말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중요한 몇 대목만 말합니다. 그중에서 핵심 인물은 압살롬입니다.

 

압살롬과 요압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는 삼하 13장부터 오늘 설교 본문이 있는 18장까지 나옵니다. 상당히 긴 서사입니다. 다윗 왕조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은 왕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습니다. 외모도 그렇고 지도력도 대단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후계자로 압살롬을 생각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 이야기는 전형적인 궁중비화로 시작됩니다. 다윗의 큰 아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암논입니다. 암논은 배 다른 누이인 다말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 사랑이 진실이었는지 아닌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암논은 계략을 써서 다말을 범한 뒤에 외면합니다. 여기까지는 삼류 드라마에 나올만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말의 친오빠가 압살롬이었습니다. 자기 누이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압살롬은 2년 동안 참고 있다가 암논을 살해할 계획을 짭니다. 다윗의 큰 아들이며, 자기의 형이고, 앞으로 왕이 될 암논을 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잔치를 벌이고 암논을 비롯해서 많은 왕자들과 공주들을 초청합니다. 암논이 술에 취한 순간을 노려 부하들에게 암논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거사가 성공하자 압살롬은 외가가 있는 그술이라는 나라로 피했습니다. 정치적 망명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삼하 13장에 나옵니다. 그 마지막 구절이 특이합니다. 자식들 사이에 근친상간과 살해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윗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삼년의 세월이 흐르자 다윗은 멀리 떠난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졌다고 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눈치 챈 요압 장군은 압살롬을 데려오도록 왕을 설득합니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 나서서 살인자인 압살롬을 데리고 올 수는 없었지만 요압 장군의 말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 그 일을 허락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망명의 신세를 면했지만 왕을 직접 알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은둔의 세월이 또 2년이나 흘렀습니다. 압살롬은 요압 장군을 통해서 아버지 다윗 왕과 화해를 합니다. 왕자로서의 활동이 허락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삼하 14장입니다.

 

만약 문제가 이런 정도로 끝났다면 압살롬이 다윗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역사는 다르게 흘렀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암살롬이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게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지금 우리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압살롬이 왕자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처럼 일개 장군이었다면 분명히 쿠데타입니다. 군사적인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달랐습니다. 백성들의 여론은 압살롬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 아픔을 해결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이 처음 왕이 되었던 헤브론에 가서 왕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지도층 인사들의 지지도 뒤따랐습니다. 당시 상황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삼하 15:12)

 

다윗은 청천병력과 같은 이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장군을 보내서 반역자들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습니다. 민심이 이미 압살롬에게 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분명하게 전합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삼하 15:13) 결국 다윗은 가까운 일부 신하와 함께 야반도주하듯이 예루살렘을 빠져나갑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삼하 15:14) 다윗은 광야로 쫓거나고, 압살롬은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압살롬과 다윗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전력이나 민심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압살롬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에 성공했다면 솔로몬은 틀림없이 제거되었을 겁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다음에 다른 왕자들을 제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라는 게 늘 그렇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흘렀습니다. 여러 가지 사연들이 뒤섞이면서 결국 압살롬은 전투에 나섰다가 죽습니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다윗은 자기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 다윗의 마음은 이중적입니다.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왕으로서의 의지와 압살롬의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자의가 아니라 주변 세력의 충동질에 의한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다윗의 장군들과 부하들은 왕의 명령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도망가다가 나무에 걸려 있던 압살롬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압 장군이 나서서 직접 창을 들어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요압은 압살롬이 그술에 망명객으로 머물 때 다윗을 설득해서 압살롬을 데려왔으며, 압살롬을 왕과 화해시키고 압살롬이 왕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사람입니다. 그가 다윗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압살롬을 죽인 이유는 압살롬이 결국 자기의 정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대 이스라엘 왕궁의 역사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정략과 중상과 모략이 판을 쳤습니다.

 

전투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다윗의 관심은 전투가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압살롬의 안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읽은 삼하 18:24-33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비통해했습니다. 그의 심정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참척(慘慽)의 고통을 넘어

 

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신가요? 요압 장군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다윗을 설득하고 위협합니다. 요압 장군의 위세는 이미 다윗 왕권을 좌지우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요압은 훗날 아도니야와 솔로몬 사이에 왕권 투쟁이 벌어졌을 때 아도니야 편에 섰다가 실패합니다. 자세한 것은 왕상 앞부분을 읽어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왕정 초기의 역사에 대한 한 대목을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역사책에도 나올만한 평범한 겁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들여야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의 관점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관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정 역사를 무조건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다윗은 성군이었지만 여전히 미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은 참척의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내 아들 압살롬!...’ 하는 절규를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이런 고통에는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그 외의 많은 일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실존이고 삶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도 많습니다. 실제로 유대인의 역사는 그런 고통의 점철이었습니다. 20세기에도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운명에 빠졌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참척의 고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반복해서 읽어주었습니다. 거기서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합니까? 이건 고대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나름으로 읽어야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영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참척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인간 삶의 실존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고통을 포함한 모든 삶과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기독교인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의 영적 관점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 하는 다윗의 탄식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비통에 찬 외침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사건에서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으로부터 유기입니다. 참척의 고통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는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대신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압살롬을 죽인 요압의 창과 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류 역사에 반복되었습니다. 실제 전쟁터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고, 노동현장에서도, 또는 교육현장에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생명을 살린다는 병원에서도 일어납니다. 개인이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극치는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결국 하나님까지 죽인 겁니다.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하나님 살해를 외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척의 고통에 참여하는 분이십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다윗의 절규에서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읽지 않았을까요?

 

기독교 신앙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고통스런 실존에 동참하는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희망하고 약속합니다. 부활 생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당한 예수님은 유대교 산헤드린 법정이나 빌라로 로마법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생명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그 일을 행하신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길을 갑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줍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영적 경험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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