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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의 밥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35 추천 수 0 2012.09.06 23:42:30
.........
성경본문 : 요6:52-5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8월19일 http://dabia.net/xe/606459 

jys.jpg 정용섭 목사

 

영원한 생명의 밥

요한복음 6:52-59, 성령강림절후 13째 주일,

2012년 8월19일

 

오늘 설교 제목은 ‘영원한 생명의 밥’입니다. 얼핏 식상해 보입니다.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영원한 생명의 밥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런 제목은 가슴에 잘 와 닿지를 않습니다.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은 좀더 자극적으로 표현해야 솔깃해합니다. 이번 주에는 ‘강남 스타일’을 패러디하는 설교 제목이 많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 설교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에 해당됩니다. 성서는 2천년 내지 3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언어는 우리에게 거리가 너무 멀어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영원한 생명의 밥이라는 말은 따분한 이야기일까요? 이 제목이 말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 더 실질적인 것, 더 근본적인 것, 더 재미있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내용입니다.

 

이 제목은 오늘 설교 본문의 하나인 요 6:58절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구절은 6장 전체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의역으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밥입니다. 이 밥은 유대인 선조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던 만나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선조들은 만나를 먹고도 결국 죽었지만 예수님이라는 밥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이런 주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시나요? 이해가 갑니까? 아예 관심이 없습니까? 여기에는 질문할 게 많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 하늘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식인종이 아닌 이상 예수님을 직접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요? 영원히 산다는 말도 확 와 닿지는 않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천당에 간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밥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 지금 우리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오병이어 후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에서부터 나온 겁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문제가 되는 바로 그 발언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35)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기자의 특징입니다. 41절과 48절과 51절에서도 반복된 발언입니다. 41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예수의 가족을 잘 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예수님도 자기들과 똑같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자랐습니다. 지금도 교회 밖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위대한 인물로만 봅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역시 그렇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왜 요셉의 아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믿을 뿐만 아니라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사람의 살을 먹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사람이 사람의 육체를 직접 먹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찬의식을 가리킵니다. 5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뒤 이은 5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 사건을 보도하면서 떡을 ‘내 몸’(막 14:22)이라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조금씩 다르게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똑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찬예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기자는 56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상호내주, 이게 옳은 이야기인가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으로 크게 논쟁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찬에 대한 것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은 화체설입니다. 사제가 미사 중에 빵을 들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고 말하면 그 순간에 빵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의 겉모양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질적인 차원이 바뀐다는 겁니다. 마틴 루터는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임재설을 주장했습니다. 빵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종교개혁주의자들은 기념설과 상징설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가톨릭의 미신적인 신앙을 극복해보려고 했습니다. 빵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면 악한 사람이 성찬에 참여해도 똑같은 종교적 효과가 일어난다는 모순이 생깁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란이 있지만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두 인정합니다.

 

이런 신앙적 인식을 이해하려면 생각을 좀더 깊이 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성찬의 빵을 먹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성찬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존재론적인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모차르트의 악보가 있다고 합시다.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음악 기표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악보를 들여야 보아도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보면 모차르트 음악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시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습니다. 성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언어를 보십시오. 영광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죽은 언어입니다. 그러나 시편, 출애굽기, 이사야 등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언어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재론적으로 일치가 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했습니다.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님의 운명과 하나 되는 경험입니다. 그런 영적 경험을 하는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 56절의 말씀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생명의 본질

 

지금까지의 설명은 이해하기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본질적인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게 과연 옳은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53b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고, 성찬예식에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는 말일까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모두 잘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더 오래 산다거나, 더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생명이 없다거나, 또는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성서는 생명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면 죽습니다.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지금 살아있지만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곧 죽습니다. 백년 후에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인간실존을 가리켜 성서는 원죄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죽는 걸 보니 믿지 않는 사람이나 결국 마찬가지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남매들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죽었던 나사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과 일치된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생명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지금 이미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즉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활동합니다. 이 비밀스러운 생명활동을 얼마나 깊이 느끼느냐 하는 것이 영성의 근본입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이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은 형식적인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자라고 하더라도 구원받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평생을 기독교 신자로 산다면 그 중심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길을 알고 싶으신가요?

 

거기에 이르는 왕도는 따로 없습니다. 구구단을 외우듯이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성령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도움을 바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생명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허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생명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욕망이 있습니다.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개인과 사회는 이런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 욕망을 여하한 방식으로라도 충족시켜주는 사람은 권력과 돈을 얻습니다. 일주일 전에 런던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전 세계인들의 욕망이 분출된 축제 한마당이었습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사건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목표치보다 더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렇다고 크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닙니다. 스포츠의 과도한 열기는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속습니다. 자기망상이 강했던 네로 황제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크게 박해했습니다. 그는 5년마다 한번 열리는 스포츠 제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들에게 자극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 자기의 광기를 감추었습니다. 히틀러와 베를린 올림픽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류 역사에서 독재자와 스포츠는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매우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이성적으로 삽니다. 쉽게 속습니다. 현대 문명 문화에 쉽게 속습니다. 현대문명은 더 많이 소유하고, 생산하고, 소비하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현대인들을 그렇게 길들여가고 있습니다. 이런 게 생명을 얻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머물고 말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의 외침을 잊지 마십시오. 조상들이 광야에서 받아먹은 만나는 아무리 먹어도 죽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성취해도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삶의 에너지를 거기에 너무 쏟지 마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온 떡, 즉 영원한 생명의 밥이 여러분을 살립니다. 거기서 참된 영적 만족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참된 약속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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